[사찰벽화이야기] 해남 미황사 천불도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다

2017-06-15     강호진
해남 미황사 천불도 | 사진 : 최배문

생이 없으면 부처도 없다

몇 해 전, 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출가를 권유받은 적이 있다. 출가 권유는 으레 건네는 인사말 같은 것임을 알기에 “모든 사람이 다 출가하면 스님들은 누가 먹여 살립니까?”라고 받아넘겼는데, 되돌아온 말이 걸작이었다.

“걱정 마세요. 세상에 중생들은 차고 넘치니까요.”

중생은 원래 범어 사트바sattva를 번역한 말로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를 뜻하며 유정有情이라고도 한다. 좁게는 욕망과 어리석음으로 자신과 남을 고통 속에 빠트리는 이들을 일컫기도 하는데, ‘아이고, 이 중생아.’라고 말할 때는 후자의 뜻이다. 고통과 번민 속에 허덕이는 가련한 목숨들과 정반대편에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 알다시피 ‘천상천하 유아독존’, 바로 오직 홀로 존귀한 붓다이다. 

깨달은 이를 뜻하는 붓다는 불타佛陀나 부도浮屠 등의 한자 음차로 쓰이다가 우리말 ‘부처’로 정착을 했지만, 역사상 실존한 붓다는 고타마 싯다르타란 이름을 지닌 석가모니뿐이다. 그렇다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받고 깨달은 1,250명의 제자들은 부처가 아니란 말인가? 당시에 깨달음을 얻은 이를 통상적으로 아라한이라 불렀을 뿐, 감히 붓다라고 명명하지 않았다. 붓다란 말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오직 석가모니에 한정되는 고유명사로 출발했다. 절집에서 흔하디 흔한 보살이란 말도 실은 전생의 수행자 시절 석가모니만을 지칭하기 위해 생겨난 것처럼 말이다. 

붓다가 열반에 든 후 교학적 이론들이 발달하고, 시공간에 대한 세계관이 심화되면서 부처란 명칭은 석가모니란 역사적 인물에서 조금씩 벗어나 부처가 곧 진리라는 추상적 논의로 그 외연을 확장해나가기 시작한다. 대승불교의 흥기와 함께 석가모니와 다른 인격으로 상정된 아미타불이나 미륵불 같은 여러 부처들이 등장하는데, 특히 『화엄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국토마다 헤아릴 수 없는 여래가 존재한다는 기술에까지 나아간다. 중국 선불교에 이르면 붓다가 지닌 권위를 파괴하는 일군의 승려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흔히 조사祖師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조사와 그 후계자들은 살불살조殺佛殺祖와 불립문자란 기치를 세우고 여래선 위에 조사선을 버젓이 놓기도 하고, ‘석가도 몰랐거늘, 어찌 가섭에게 전했으랴.’ 하고 호통을 치기도 한다. 또한 어록에다 ‘경(『육조단경』)’이란 명칭을 붙이기도 하고, 기존의 경전 대신 ‘자신 안의 부처를 보라.’고 주장하니, 말 그대로 부처가 중생 수만큼 차고 넘치는 시대, ‘보통부처들의 위대한 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해남 미황사 천불도 | 사진 : 최배문

해남 미황사 대웅전에 그려진 천불도가 천 명의 부처를 예경하는 천불신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 천불신앙이 사상사적으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밝히기는 쉽지 않다. 천불신앙은 ‘역사적 붓다’와 ‘보통부처’의 개념 사이에서 애매한 위치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석가모니에 대한 향수와 대승불교의 특징인 다불多佛예경이 혼재된 것이다. 이는 천불신앙의 근거인 『현겁경賢劫經』을 관불수행경觀佛修行經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붓다집안(여래가)의 족보로 파악할 것인지 쉬이 용단을 내리기 어려운 것에서도 기인한다. 뭐가 됐든 『현겁경』이 주목을 받는 부분은 현겁, 즉 현 우주가 탄생했다가 다시 멸망하는 기나긴 시간 동안 출현했거나 출현할 천불의 이름을 쭉 나열된 「천불명호품」과 부처들의 출생지, 가족관계, 상수제자와 신통제자, 제도한 사람의 숫자 등이 작성된 「천불흥립품」이다. 희왕보살의 질문에 석가모니가 답을 하는 형식으로 된 경에서 천불의 계보는 구류손拘留孫, 함모니含牟尼, 기가섭其迦葉, 석가문釋迦文, 자씨불慈氏佛로 시작해 인사자人師子, 유명칭有名稱, 호루유號樓由로 끝을 맺으며 천이란 숫자를 빼곡 채운다. 행여 이 경전에 대해 더 알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불면증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경을 펼치자마자 부처님의 가피를 몸소 느꼈다는 체험담이 줄을 잇는 영험한 경전이란 점이다. 

해남 미황사 천불도 | 사진 : 최배문

『현겁경』을 근거로 한 해남 미황사의 천불도는 대웅전 사방 내목도리 윗벽 21곳과 두 대들보 양 측면에 각각 그려진 그림인데, 부처의 수가 정확히 1,000이다. 현재 대들보에 있는 네 점의 그림을 제외한 판벽 그림들은 훼손이 진행되는 바람에 모두 떼어내 보관 중이다. 판벽 그림을 해체 없이 떼어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벽화들과는 달리 종이에 그림을 그려서 벽에 붙인 첨부벽화 방식이기 때문이다. 첨부벽화는 오랫동안 보존이 가능하다는 점 외에도 섬세한 표현이 가능해 사찰벽화나 단청에 종종 쓰였다. 벽화가 그려진 시기는 대웅전을 중수했던 1751년으로 추정되는데 260여 년이란 세월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필선의 선명함과 채색의 우아함이 살아 있다. 대들보에 남은 네 점의 그림만으로 대웅전을 그득 채운 천 명의 부처들이 뿜어냈을 장엄미를 상상하긴 어렵지만, 미황사 천불도를 일별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전체 25점의 벽화의 핵심구도가 어간문 위로 놓인 대들보에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미황사 천불벽화는 서 있는 부처와 앉은 부처의 구도로 나뉜다. 천불 가운데 앉아 있는 모습의 부처는 오직 두 대들보 안쪽에만 그려져 있고, 들보 바깥 부분과 그림과 떼어낸 판벽의 벽화는 모두 선 채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을 취하고 있다. 졸업식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한 것 같이 옹기종기 모여 선 모습의 부처들은 대의大衣와 두광頭光의 색깔, 전체 숫자가 조금씩 다를 뿐 23점의 벽화가 유사한 구도이다.

입상으로 표현된 부처들은 종교적 도상이 지니는 엄숙함보다는 인간미에 중점을 두고 있다. 몸을 슬쩍 기울이고 고개를 돌려 서로 담소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라든지, 쌜쭉한 눈매와 입술에서 배어나오는 미소는 고결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은 일상의 삶에 터전을 두고 있다. 부처들의 상호는 어디 하나 모난 데 없이 둥글지만 어떤 얼굴은 천진한 아이 같고, 어느 얼굴은 원숙한 50대 아주머니 같기도 하다. 들보의 나뭇결과 섬세하고 여성적인 필선, 세월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레 옅어진 색감이 골고루 조화를 이루면서 벽화를 보는 이들은 약간 늘어난 니트를 걸친 것 같은 편안함과 따스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에 비해 거대한 연화좌에 병렬로 앉아 있는 8불의 그림은 보다 균질적이고 엄숙함이 감돈다. 모두 정면을 응시하고 있으며 허리를 꼿꼿이 세운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다. 중생을 구제하는 권능과 진리의 담지자로서 부처의 모습이 강조된 그림이다. 그런데 천불 가운데 오직 들보 안쪽 두 곳에만 각각 8불씩 총 16불의 좌상이 대칭적으로 그려진 이유는 무엇일까? 대웅전의 어간문에 기대서서 불단을 바라보면 화사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석굴암의 본존불은 팔부신중이 새겨진 복도식 전정前庭을 통해 바라볼 때 신비로운 종교적 미감이 극대화되듯 미황사 대들보에 그려진 좌상도 공중에 걸린 전정과 같은 역할을 한다. 차례로 늘어앉은 부처들의 모습이 끝나는 곳에 닫집이 있고 바로 그 아래 석가모니불상이 자리하고 있으니 그림으로 공간을 끌어들여 불전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또한 들보의 벽화는 불단에 우두커니 앉은 석가모니가 여러 부처로 몸을 나투어 예경하는 이들에게 점점 다가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들고남이 자재한 불법의 묘리가 두 점의 벽화로 완성되는 것이다.

해남 미황사 천불도 | 사진 : 최배문

그러나 해남 미황사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천불도나 부처의 가피가 중생들에게 넘쳐나는 것과는 별개로 많은 부처를 필요로 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우울한 일이다. 경전에서 붓다를 큰 의사에 비유하는 것은 중생이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의사가 필요한 시대는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아픈 시대라는 뜻이다. 해남 출신의 시인이자 전사였던 김남주는 ‘시인’이란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세상이 법 없이도 다스려질 때
시인은 필요없다
법이 없으면 시도 없다

중생에게 중생심이 사라지면, 부처도 필요 없고, 출가도 필요 없다. 그저 본바탕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부처가 없는 세상, 출가자가 없는 세상. 의사도 병자도 없는 세상. 그런 세상이 진정 붓다가 이루려고 한 불국토일 것이다.       

 

강호진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올라가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일각 一角이란 불명을 받았다.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껏 별달리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대와 통하는 불교』,『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이야기』를 썼다. 

 

사진 : 최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