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무형문화 순례] 대흥사 서산대제

2017-06-15     김성동
대흥사 서산대제

대흥사 서산대제

"난리를 평정하고 나라를 평안하게 하는 것은 단하 선사가 목불을 살라버린 것과 운문 선사가 개밥 준다는 것과 노파가 부처님을 아니 보려는 것 같은 것들이니, 모두 요사한 것을 꺾고 바른 것을 드러내는 수단이니라.”(용담 스님 역) 조선시대 선禪의 지침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선가귀감禪家龜鑑』에 나온 말이다. 청허 휴정(淸虛 休靜, 1520-1604). 서산 스님이 『선가귀감』을 쓴 때가 1564년 여름이었다. 스님의 제자인 사명 유정(泗溟 惟政, 1544-1610)은 15년 뒤인 1579년 봄에 발문을 써 이를 간행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선가귀감』이 세상에 나온 지 13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제자 유정은 발문에서 『선가귀감』의 뜻을 이렇게 전한다. “아! 위태하여라. 이 도가 바로 전하여지지 못함이 어찌 이다지 심할까. 겨우 이을락 말락 하여 마치 한 올의 머리카락으로 천 근이나 달아 올리듯 거의 땅에 떨어질 듯하더니, 마침 우리 큰스님께서 서산에 계신 지 한 10년 동안, 소를 먹이는 틈틈이 50본의 경론과 어록을 보시다가 그 속에 혹시 공부하는 데 요긴하고 간절한 말이 있으면 곧 기록하여 놓으셨다.”

위태한 것이 어찌 ‘부처님 법’(道)뿐이었을까. 온 나라의 백성들이 난도질을 당하는 지옥도地獄道에서 휴정과 제자 유정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숭유억불을 통과하는 시대에 선禪과 교敎가 길을 잃어버린 교단의 모습과 참혹한 중생의 고통스런 현실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난리를 평정하고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 요사한 것을 꺾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 서산 스님은 문도 1,500여 명의 승병을 이끌고 명군明軍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했다. 선조는 직호를 내렸고, 정조대왕은 매년 해남 대흥사에서 국가제향을 봉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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