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통신] 우리들의 생사生死

2017-06-15     김성동

● 깨달음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생사가 있는 바로 여기다.
圓覺道場何處 現今生死卽是

해인사 장경각 법보전 주련에 새겨진 글귀다. 이 말은 장경藏經에 능통하고 일제강점기에 선풍禪風을 일으켰던 남전 한규(南泉 翰奎, 1868-1936) 스님이 해인사 주지로 있을 때인 1908년 한 대중설법에서 꺼냈다. 남전 스님뿐 아니다. 멀리 석가모니 부처님부터 역대 조사의 말씀에는 ‘생사를 떠나 열반이 없다.’는 뜻을 전하고 있다. 나고 죽는 지금의 삶을 떠나 부처가 없고, 깨달음도 없다는 것이다. 나고 죽는다는 것은 석존 이래로 변하지 않는 진리의 출발점이다.

 

● 나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고
인간으로 성장하였으며
인간으로서 붓다를 이루었다.

我身生于人間 長于人間 于人間得佛

『증일아함경』 권28 「청법품」에 실린 부처님의 인간 선언이다. 부처님이 그러하듯이 모든 인간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이 변하지 않는 사실을 앞에 두고 깊은 사색과 선정을 통해 싯다르타는 인간으로서 붓다를 이루었다. 어찌 싯다르타뿐이겠는가. 세계 곳곳의 역대 조사들이 생사를 넘어서는 길을 찾고자 했으며, 100년 전 해인사 남전 스님도 그러했고, 2017년 어느 봄날 불교의 텍스트를 읽으며, 사색과 선정의 수행을 이어오고 있는 우리 불교인들도 그 길을 가고 있다. 싯다르타가 말했듯이 그 길은 새로운 길이다.

 

● 싯다르타의 생사生死, 남전 스님의 생사生死, 그리고 지금 여기 우리들의 생사生死는 같은가, 다른가. 왕자의 신분으로 태어나, 누구보다도 호화로운 삶을 살고, 아름다운 이성과 결혼하고, 사랑스런 아들과 가족을 꾸렸다. 그에게 생사는 무엇일까. 경전은 ‘괴로움’이라고 적어 놓았다. 그가 본 생사는 괴로움이다. 그가 경험했던 생사는 사문유관四門遊觀의 성문城門 밖에 있다. 근육이 바짝 말라 가죽과 뼈만 남고, 이빨이 몽땅 빠진 이. 숨을 헐떡이는 거무죽죽한 노인. 더러운 피고름이 나오는 병자, 울부짖는 망자의 행렬들. 성문 안의 생사에는 없었던 날카로운 광경들이다. 성 안에서는 알 수 없었던 그 생사의 괴로움을 성 밖에서 본 것이다. 성 안도 생사가 있었고, 성 밖도 생사가 있다. 성 안과 성 밖. 같지만, 달랐다. 그를 출가로 이끈 것은 성 밖의 생사다. 성 안의 생사도 본질에서는 성 밖의 생사와 같다. 다르지만, 같다. 싯다르타에게 성 안과 성 밖의 생사는 모두 괴로움의 반복일 뿐이다.

 

● 싯다르타가 봤던 괴로움은 무엇일까. 그가 왕자의 신분으로 성 안에서 성 밖의 경계를 통과할 때, 그는 미처 몰랐을 것이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 이토록 강렬한 것인지. 성 안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이 성 밖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성 안에서는 체감될 수 없었던 생사生死가 날 것 그대로 다가왔다. 성 안에서 그의 삶이 계속되었다면 몰랐던 모습들이다. 성 밖의 생사를 보면서 비로소 인간의 삶, 괴로움을 자세히 들여다본 것이다. 탐진치貪瞋癡가 일으킨 수많은 삶의 파장들을 본 것이다.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삶을 상징으로 드러낸 것일 뿐이다. 싯다르타가 출가 전 깊은 사색을 했다는 것은 인간의 삶 전체를 통찰해나간 것이다. 깨달음이 생사生死에 있고, 인간은 생사生死를 풀어갈 주인이다. 2017년 5월, 우리들의 성 안의 생사는 어떤 것이고, 성 밖의 생사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