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 Ⅳ

재가의 선수행

2007-09-14     관리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은 모두 이 경에서 나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은 모두 이 경!에서 나옴!'을 우주가 떠나갈 듯이 마음 속으로 크게 외치며 한동안 앉아 보라.
금강경(金剛經) 가운데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에 나오는 대목이나 금강경을 술술 외워도 해결할 수 없다. 실제로 부처의 법(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단지 부처의 법이라는 이름이 있을 뿐이다. 이 말할 수도 없고 이름뿐인 이 법을 담고 있는 이 경은 무엇인가? 부처의 말씀이 담겨 있는 종이로 만든 책〔經〕은 그 분량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유한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담을 수 없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경은 결코 아니다. 잘 간구해 보라.
한편 서산(西山) 대사로 유명한 휴정(休靜) 스님의 『선가구감(禪家龜鑑)』에 보면 '삼교의 성인들이 모두 이 말에서 나왔네〔三敎聖人 從 句出 〕'라는 대목이 있는데 위 화두와 똑같은 구절이다. 그리고 참고로 여기서 삼교성인은 불교의 석가모니와 도교의 노자(老子) 및 유교의 공자(孔子)를 일컫는 말이다.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得)
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인데
어느 심에 떡을 먹겠는가!〔要點那箇心〕

당대 금강경 왕이라고 칭송받던(물론 자만에 가득찼던) 덕산 스님이 자기가 쓴 금강경 소초를 등에 짊어지고 천하를 돌며 자기의 실력을 뽐내고 다니다 하루는 낮이 되어 시장기가 몹시 돌아 주위를 둘러보니 마침 떡집이 있어 요기를 하기 위해 들어갔다. 그런데 떡집 할머니가 떡 줄 생각은 안하고 등에 지고 있는 것이 무어냐고 물어서, 자기 자랑을 한참 늘어 놓으며 금강경에 관한 모든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러자 할머니가 묻기를 "금강경 가운데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에 과거심불가득 현재심불가득 미래심불가득이라고 쓰여 있는데 스님은 어느심에 점(點)을 찍어 떡을 먹겠는가?"하고 물었다. 덕산 스님이 우쭐대며 돌아다니다 일개 시골 할머니에게 한방 얻어 맞은 것이다. 배고픈 것도 잊고 틀림없이 주위에 눈 밝은 스님이 계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할머니에게 계신 곳을 물어 쏜살같이 달려갔다. 참고로 대부분 순우리말로 잘못알고 있는 점심(點心)이란 용어까지 만들어낸 이 일화(逸話)는 무문관(無門關) 제 28칙에 들어 있다.
자! 여러분은 어느 심(心)에 떡을 먹겠는가? 과거심은 지나가 버렸고 미래심은 오지도 않았으며 현재심은 잡으려 하면 이미 지나가 버리곤 한다. 한동안 앉아 보라. 그래도 모르겠으면 무심하게 한 끼쯤 굶어 보라. 그래도 모르겠으면 무심하게 두 끼쯤 굶어 보라. 절대로 잡인(雜人)들처럼 이해에 얽힌 어떤 목적을 가지고 동네방네 떠들면서 굶지는 말라. 모든 것은 자명해지리라.
한편 만공(滿空) 선사 회상(會上)에 있다가 혜월(慧月) 선사 밑으로 간 운암(雲庵) 스님께서 한번은 만공 스님 회상으로 이 화두를 물어왔는데 이에 대한 답으로 만공 스님께서 "과거 위음왕불(威音王佛:가장 최초로 성불하신 부처님) 이전에 점심을 먹어 바쳤느니라!"라는 답을 보내려 하자 옆에 있던 보월 스님께서 "큰스님! 죄송합니다만 누구의 눈을 멀게 하시려고 이런 답을 보내려 하십니까?" 하면서 성냥불로 그 답을 태워버리고 그냥 나가버렸다. 그러자 만공 스님께서는 그 자리에 정좌(靜坐)하신 채 꼼짝도 하지않고 일주일간 용맹정진(勇猛精進)하시고는 드디어 칠 일째 되는 날 이 화두에 대한 점검을 마치시고는 큰 소리로 "보월아! 내가 자네에게 십년 양식을 받았네."라고 하시면서 "지난번에는 내가 그릇되이 답했네. 나에게 다시 묻게!" 하시자 보월 스님이 "삼세심 불가득 점마하심입니까?〔三世心不可得 點 何心〕"라고 묻자 "점찍는 곳에서 점찍노라!"라고 답하셨다고 한다. 이처럼 법(法)앞에는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가 없는 것이며 잘못됐으면 과감히 시인하고 백의종군하는 마음자세로 바로 잡으면 되는 것이다. 자! 어디가 만공 스님이 잘못 본 곳이고 어디가 다시 바르게 본 곳인지 찬찬히 잘 간구해 보라!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이 일어나는구나〔應無所住 而生起心〕
이 화두는 본래는 하나이다 둘로 나누오 보아야 철저히 투과할 수 있다. 응무소주는 평등적 입장에서 살펴야 하고 이생기심은 차별적 입장에서 살펴야 한다. 우선 '응무소주!' 해 보라. 그러면 '이생기심!'은 자명해지리라.
이 화두는 선을 중국 천하에 풍미하게 한 육조혜능 선사의 마음을 처음으로 열게 한, 금강격 가운데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사람의 마음은 이랬다 저랬다하며 끊임엇이 바뀐다. 예를 들어 젊은이들의 경우에(요즈음은 나이드신 분들도 꽤 늘어났지만)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 천지가 떠나갈 듯 통곡하며 슬퍼했다가도 일년도 안 되어 다른 아내를 맞아 행복하게 살아가고있는 사람을 우리는 가끔 주위에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구만 리 같은 인생이 남아 있기에) 결코 나쁜 것은 아니며 그것은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그리고 특히 요즈음처럼 시대가 바뀌어 외톨이가 된 젊은이들의 양쪽 집안에서 모두 장래를 걱정해주며 새 생활을 권유하느 s사회적 분위기도 잘 잡혀있지 않는가! 이처럼 같은 마음이 슬퍼하기도 하고 또 새 사람을 만나 즐거운 삶을 다시 살아가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이다.
다시 화두로 돌아가 머무를 곳이 없다고 하는 뜻은 보기를 들어 만일 사람의 마음이 어떤 생각을 일으켜 그 생각이 한평생 없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큰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한번 슬픈 일이 있으면 죽을 때까지 계속 울고 한번 기쁜 일이 있으면 일생을 웃으면서 죽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은 수시로 변하고 있고 그럼으로 해서 사람은 잘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덧붙여 마음 자체는 희로애악 중 그 어느 마음도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슬퍼하기도 하는 것이며, 이 어느 마음도 아닌 것이 인간의 마음의 변하지 않는 본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달마 선사는 이것을 '심불가득(心不可得)'이라고 나타내기도 했던 것이다.
한편 우리는 역사를 통해 왕 한 사람의 잘못으로 나라가 흔들리는 경우도 많이 보아왔다. 특히 고려시대 공민왕의 경우 처음에는 나라를 잘 다스렸으나 사랑하던 노국 공주가 죽자 슬픔에 잠겨 나라 일은 내팽개쳐버리게 되어 결국은 고려가 망하는 원인이 되었다. 극단적인 보기였으나 우리의 일생을 한 나라의 흥망성쇠에 비교한다면 우리가 마음의 본래 모습을 잘 파악하여 바르게 이 마음을 일으킨다면 우리의 일생은 무난(無難)하리라!

지렁이를 두 토막으로 잘랐는데 어느것이 진짜인고!( 蚓兩斷 那箇是眞底)
'지렁이를 잘랐다! 어느 것이 진짜인고!'하며 한동안 진득하게 앉아보라. 그러면 모든 것은 자명해지리라.
중국의 장주라 사람이 꿈을 꾸었는데 나비가 되어 훨훨 하늘로 날아다니다가 꿈에서 깨어 하는 말이 "내가 나비던가 나비가 나던가?"라고 술회한 일이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사경잠(長沙景岑) 스님에게 축상서(竺尙書)가 물었다. "지렁이를 두로 잘랐는데 둘 다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진짜입니까?" 그러자 스님께서 대답하기를 "망상을 일으키지 말지어다."라고 했다고 한다. 말은 쉬우나 보통으로 수행을 해가지고는 이렇게 답하기 어렵다. 사실 선에서는 진짜, 가짜를 가리지 않는다. 자! 어떻게 하면 진짜, 가짜를 초월할 수 있겠는가? 물론 차별계에서 볼 때는 진짜는 진짜이고 가짜는 가짜이다. 그런데 이 화두의 경우는 평등적 입장에서 볼 줄 아느냐를 타진한 것이다.(진땀 좀 흘려야 할 것이다!)

긴 수염을어디에 놓고 자는가?
어느 때 한 선사가 수염이 긴 위풍당당한 장군(將軍)에게 물었다. "당신은 잠잘 때 수염을 이불 밑에 놓고 자는가? 아니면 이불 밖에 놓고 자는가?" 그 날 밤부터 그 전까지는 잠을 잘 자던 장군이 수염을 이불 밑에 놓아도 불편하고 이불 밖에 놓아도 불편해서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자! 만일 당신이 그때 그 장군이었다면 무어라 답했겠는가? 절대로 수염에 끄달리지 말라. 그러면 곧 자유로와지리라!
이렇게 해서 나의 참선 입문과정은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어졌으며 이때 종달 노사로부터 법경(法境)이란 거사호(居士號)와 무자시아사(無子是我師:무자는 나의 스승)란 서필(書筆)도 받아 족자로 만들어 벽에 걸어놓고 이를 쳐다볼 때마다 이때의 법열(法悅)을 늘 새롭게 체득하곤 한다. 다음 호부터는 '선수행의 필독서:무문관(無門關)과 벽암록(碧巖錄)'을 다루기로 하겠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은영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