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에 생각하는 부모사랑, 나라사랑

특집, 조국통일을 위한 불교의 역할

2007-09-14     관리자


6·25가 난 지 45년이 되었다. 우리 아버지가 납북되신 지 45년이 지났고, 통일과 상봉을 염원하시던 할머니도 가시고 이제 어머니 가신 지도 18년이 지나가니, 국난 속에서 생명을 걸고 자식을 지켜왔던 그분들의 은혜도 간절한 염원도 과거 속으로 묻혀가니송구하고 애처로운 마음을 가다듬어 그분들의 뜻을 남기신 염원으로 정리하여 본다.
아버지〔鄭仁植〕께서는 제2대 국회의원으로 광산군 을구(지금의 광주 서구와 북구 지역)에서 40세의 젊은 민족주의자로서 광주의 대지주인 경쟁자를 누르고 당당하게 당선하였다.
그 해는 우리 할머니가 서른 하나에 홀로 되신 지 30년이 지나서 10월에 회갑을 맞는 해였으므로 아버지는 그 어머님께 효도와 보람을 드리고자 오랜 기간 구상하여 오셨던 바가 있었다.
국회의 개원식에 참석하신 후 바로 고향에 내려오셔서 6·25를 당하였고 그 해 7월 20일경 광주까지 밀고 내려온 인민군의 점령 아래서 연락이 두절된 채로 난감하여진 아버지는 급히 친구집으로 피신하셨으나 지방 빨치산들의 수색으로 체포되어서 심한 고문을 받았었다.
국회의원 체포를 보고 받고 내려 온 내무국의 간부가 직접 광주의 본부로 호송하여 간 후 광주에서 평양으로 모셔 갔다는 소식만을 들었고 아직까지 생사 안부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 있다.
아버지가 납치되어 가실 때 어머니 뱃속에 남겨 둔 일곱 달 된 아우가 벌써 마흔이 되었고 아버지의 소식만이라도 기다리던 할머니와 어머니는 세상뜨신 지 23년과 18년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난세에 화현하시어 우리 4형제를 지켜주시는 장업하신 관세음보살의 화현이셨다.
우리 집을 수색하고 재산과 먹고 살 양식까지 몰수하여 가는 인민군들에게 호령하시던 호랑이 같은 할머니의 당당하신 모습은 지금도 역력하게 기억한다.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고 짐승 같은 마음을 먹고 난세에 살아갈 줄 아는가.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져도 사람 마음을 짐승 마음같이 쓰지는 마라."하시던 할머니는 집안을 지켜 주시는 수호신 같았다.
삼 개월의 비극적인 난리가 가고 국군이 광주에 진주하였다. 인민군의 피해가족이라고 하여 우리 가족을 위로하고 겸하여 마을의 공산당을 소탕한다고 중무장을 한 특공대가 마을에 들어와서 공산당을 수색하여 마을 사람들 앞으로 잡아왔다. 그들은 인민위원장, 노동당위원장, 여성동맹위원장 세 사람이었다.
특공대 책임자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그들의 죄상을 물었다. 그러나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들은 죄가 없는, 그저 공산당이 세워 놓은 무식한 양민일 뿐이며, 그들이 아니면 다른 누구라도 그 자리에 세워 놓았을 것이라고 변호하시고 특히 인민위원장이 사람을 통하여 우리 식구더러 피신하라고 연락하여 준 사실을 들어서 특공대장을 설득하셨다.
지금도 역력하게 기억되는 장면은 마을 앞에서 이들 세 사람을 세워 놓고 즉결하려고 할 때에 할머니와 어머니가 그들의 앞을 가리고 무서운 총구 앞에 서서 이를 끝까지 말리시던 장한 모습이다.
"당신들은 이들을 해꼬지하고 가면 그만이지만 우리 동네는 그들의 가정과 우리 가정에 원한만이 남아서 이미 지나간 난리 끝에 또 새로운 불화와 원한을 맺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이들을 말리셨다. 온 마을 사람들이 초조한 마음으로 떨고 보고 있는 앞에서 마을의 불행을 당당하게 막아내시던 우리 할머니, 어머니는 자비로운 화현 보살의 모습이셨다.
공산당 단 한 사람도 소탕하지 못하고 불평스럽게 떠나 가는 특공대를 보내고 난 후 우리 마을은 6·25를 딛고 모두가 한 마음이 된 듯하였다.
그 후 우리 마을에는 아름다운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새해 설날 아침 일찍이 인민위원장을 했던 이가 그의 가족을 모두 데리고 우리 할머니께 제일 먼저 세배를 왔었다. 그리고는 마을의 어른들을 모두 찾아가 세배를 드렸다. 그날 이후로 온 마을이 어른 계시는 집에는 일가와 타성을 구분하지 않고 세배하려고 찾아가게 되었고 모두의 마음들이 밝고 평화롭고 정성스러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이러한 마을의 풍습은 더욱 발전하여 동란 후 몇 년만에 새며느리를 얻은 집에서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서로 협심하여 세배 손님을 접대하는 준비를 하게 되었고, 집집마다 며느리 자랑, 솜씨 자랑의 경쟁 분위기로 발전하였다.
오랜 고부간의 불화나 시집살이 풍조가 사라지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기세 안 죽이려고 온갖 솜씨를 다 내어서 며느리 자랑에 전력하니 며느리도 시부모에게 효도하며 부부간에 금슬도 좋아지게 되어 온 마을이 협력하는 체제가 서게 되었다.
동란 후 10년 안에 우리 마을 양지 부락은 우리 고장에서 가장 논을 많이 새로 사들인 부자 마을로 소문이 났었다.
동란이 가고 생활이 안정되어 갔지만 할머니와 어머니의 염원은 아버지의 상봉과 통일이었다. 세월이 가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남북 이산가족을 곧 찾아 줄 듯이 우리 가족을 가슴부풀게 하였고, 그때마다 실망과 설움을 키워서 두 분의 마음 속의 병을 키워만 갔다.
어머니는 아들 4형제중 형과 나, 그리고 셋째를 여의시고 막내는 못 여의시고 돌아가셨다. 결혼한 세 아들들의 며느리들은 옛 법도대로 어머님께 효도금을 해올려 새 이불을 마련해 드렸다. 그러나 그때마다 어머니는 새 이불 덮기를 거절하셨다.
"내가 지금 비록 이렇게 아프고 늙었지만 그래도 너희 아버지 오시면 새 이불 덮고 새 요 깔고 한번 안겨 보고 싶다. 그때까지는 이 새 이불은 아껴 놓을란다."
우리 어머니의 이 간절한 염원은 이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지난 일이 되었다. 그리고 이 이불 세 채는 고스란히 형수의 몫으로 남겨졌다.
이제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의 생존의 가능성을 거의 희박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금년이 85세이시니 온갖 보약 다 먹고 살던 김일성 주석도 작년에 작고하였는데 아버지는 어려운 상황에 계셨을 것인데 오래 수하시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버지의 실종선고를 받아서 금년 봄에 호적을 정리하였고 아직 재산상속의 분배문제를 남겨 놓고 있다.
이제 남은 일은 북한에 계셨던 아버지의 행적을 확인하는 일과 북한에 남기셨을 것으로 기대하는 우리 피붙이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이다. 만일 부처님의 은덕으로 북한에서 내 형제를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어른들의 한이 서린 염원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은혜와 보람으로 가꾸어 나가겠다.
우리의 심성이 맑고 밝고 따뜻하다면 부처님의 가피 속에서 부모님의 염원을 반드시 사랑과 화합으로 꽃피울 것으로 확신하며 나의 가장 큰 소임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교수불자 모임을 통하여 남북불자의 교류를 위한 북한 방문단에 참여하기로 하였으나 왜 불교는 남북교류가 안 되는지 답답하고 불만스럽다.
세계 일등 국민을 목표로 삼으면서 한반도 속에 지척에 부모형제를 두고 생사안부조차도 모르는 우리의 현실은 반만년을 이어온 조상에 대한 배은이요, 세계 인류 중의 수치이다.
나는 분단을 넘어서 내 피붙이, 내 살붙이를 만나는 날 나라 사랑의 참 마음이, 민족 화합의 참모습이 이런 것임을 보여주련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은영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