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명법문] 관람객이 되라 / 무주스님

인생의 희로애락 영화가 상영될 때 관람객이 되라

2017-05-30     무주스님
무주스님 / 사진 : 최배문

법우님,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봄이 오는 길목인데도 아직 아침과 저녁으로 겨울을 느끼게 됩니다. 온도의 변화가 큰 요즘과 같은 환절기엔 각별히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우리가 당연히 내 것이요, 내 뜻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마음’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란 무엇이며 그 작용은 어떠한 것일까요? 이 마음을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에 비유하여 보겠습니다.

영화가 상영되기 전 극장의 스크린은 고요하고 깨끗합니다. 스크린 가득 찬 배경도 없고 연기하는 배우도 없는 그냥 스크린 그 자체일 뿐이지요.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하면 스크린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생로병사生老病死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펼쳐지는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그 영화에 몰두하게 되고 영화에 동화되어 자기의 현실인 양 울고 웃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극장에 설치된 스크린으로 가정해 보면 영화가 상영되기 전 스크린, 그 고요하고 깨끗한 스크린은 진여眞如 또는 불성佛性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참 마음’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스크린에 잠시도 쉬지 않고 생각이 빚어내는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하지요. 하나의 스토리가 끝나기 무섭게 또 다른 영화를 상영하게 됩니다.

마음의 저 깊은 곳을 지켜본 수행자들은 마음의 극장은 본인이 살아 있는 동안 깊은 잠이나 기절(졸도)한 상태를 제외하고는 평생을 찰나도 쉬지 않고 영화를 상영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본인은 의식하지도 못하면서 마음의 스크린에 상영되는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한평생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마음에 일어난 경계마다 꺼둘리는 삶이란 결국 괴로움으로 이어지는 윤회의 길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 윤회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희로애락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식들은 다릅니다. 선지식善知識들은 경계에 꺼둘리는 삶을 벗어나기 위해 수행 정진하여 참 마음의 자리에 도달합니다. 이분들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쉬지 않고 상영되는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을 지금 당장 바꾼다면 중생의 삶을 청산할 수 있는 탈출구에 접근할 수 있다.”

선지식들이 말하는 시각의 변화란 영화를 단순히 영화로만 보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생각이라는 영화가 상영될 때 스스로 주인공으로 나서지 말고 객석에서 생각을 구경하는 관람객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생각의 관람객이 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늘 주인공 노릇만 하던 나를 객석에 앉혀 놓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전쟁영화를 하나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면 수많은 군인들이 전장에 투입되고 포탄이 터지고 폭격으로 사상자가 생깁니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통곡이 이어지고 생이별하는 부부와 전쟁 고아들로 스크린이 넘쳐흐릅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난 스크린에는 전쟁의 미세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객석에서 영화를 관람한 사람들은 영화에 도취하여 영화가 스크린에 비친 하나의 영상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생사의 기로를 넘나드는 전쟁을 함께 치르고 영화가 끝나도 한동안 그 여운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영화에서 받은 충격으로 자살을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깨친 시각으로 그 영화를 바라보는 사람은 영화와 스크린을 분리하여 관람합니다. 그는 관객으로 영화를 보는 것일 뿐 영화 속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어떤 영화를 보아도 그는 그냥 영화를 본 것뿐이니까요.

이것을 마음에 비유하여 봅시다.

마음에 “화禍”라는 영화가 상영될 때 ‘화’에 도취하여 그것과 나를 동일시하게 되면 그 사람은 생각이란 놈의 장난에 놀아나 육신마저 병드는 무명無明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스크린에 ‘화’가 상영될 때 ‘화’가 본마음(스크린)이 아니라 스크린에서 돌아가는 영상(생각)이 만들어내는 환영幻影과 같은 것임을 알아차린다면 다릅니다. 객석의 관객처럼 마음을 지켜보는 순간 ‘화’는 마음 저편으로 분리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치를 생활에 응용해 보면, 어떤 상황에서 누가 나를 화나게 할 때 무의식적으로 반응하지 말고, 먼저 빠르게 마음의 스크린을 지켜보는 것이지요.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의 스크린에 무엇이 비치고 있는지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에 비친 생각은 본질이 아니라 생각이 빚어내는 영화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 순간 무의식에서 출발한 ‘화’는 스크린에 상영되지 못하고 마음에서 분리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내가 남을 미워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재빨리 스크린을 보아야 합니다. 알아차림에 들켜버린 미움 또한 스크린에서 사라집니다.

처음부터 빠르게 스크린을 지켜보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자주자주 마음의 스크린을 지켜보는 것,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정도 가운데 ‘바른 마음챙김(正念)’입니다.

『법구경法句經』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마음이 모든 법法들에 앞서가고,
마음이 그들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가 지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나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한다면
그에게는 반드시 고통이 뒤따른다.
마치 수레가 황소를 뒤따르듯이.”

 

우리의 모든 행위가 일어날 때 그 바탕에는 반드시 마음이 먼저 작용합니다.

몸과 입으로 짓는 모든 선업善業 또는 불선업不善業이 행위 이전에 먼저 마음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현상으로 드러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짓는 모든 행위는 스스로의 마음을 지켜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세세생생 이어온 윤회의 고리를 단절할 수 있는 해답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마음은 우리의 모든 행위를 제어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불교에는 오래전부터 마음을 닦는 방법으로 독경, 간경, 사경, 염불, 명상 등 다양한 수행방법들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자기의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선택하여 꾸준히 노력한다면 틀림없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이 나의 주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탐진치 삼독三毒에 빠져 고통의 바다를 헤매게 되지만, 내가 마음의 주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영원한 행복에 머무를 수 있습니다.

불자 여러분.

참 행복으로 향하는 길은 늘 열려 있지만 찾지 않고 가지 않는다면 도달할 수 없음은 삼척동자라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 바로 내가 마음의 주인이 되는 지름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은 이만 마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성불하십시오.

 

무주스님
1993년 현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중앙승가대학교를 졸업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월정사에서 포교, 재무 소임을 봤으며, 원주 국형사 주지를 거쳐 현재 월정사 강릉포교당 관음사 주지 소임과 강릉경찰서 경승실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