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구병의 평화모니] 성철의 왕방울 눈

2017-05-30     윤구병

성철의 왕방울 눈

윤구병

석성철은 가까운 이들에게 모진 스님이었다. (‘모질다’ 함은 ‘모’가, 삐죽한 모서리가 길다는 뜻을 지닌 말일지도 모른다. 모서리가 길어지면 가시가 되기도 하고 바늘처럼 찌르기도 한다.) 스님 스스로에게는 더욱 모질었다. 나중에 상좌로 받아들인 원택 스님에게 맨 먼저 이른 말이 ‘속이지 마라’였다고 한다. 그이가 나이 여든에 돌아가시기에 앞서 읊었다는 ‘열반송’은 다음과 같다.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 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데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어찌 들으면 고개 갸웃거려지기도 하고 머리를 외로 꼬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노래로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열반송’을 읽으면서, 그래, 성철 스님은 그래도 스스로 속아 넘어가지는 않았다(저를 속이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열반송’을 쓰고 난 뒤 이승을 떠나기 예순 해쯤 앞서 성철은 이런 시를 썼다.

 

‘하늘에 넘치는 큰일들은 붉은 화롯불에 한 점의 눈송이요.
바다를 덮는 큰 기틀이라도 밝은 햇빛에 한 방울 이슬일세.
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
만고의 진리를 향해 초연히 나 홀로 걸어가노라.’

 

눈빛 밝고 그릇이 큰 분이었다.

홀로 마신 술에 알딸딸한 오늘 같은 날은 스님에게 엉기고 싶다. 스님은 깨우침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삼서근(麻三斤)’을 화두話頭로 들라고 이르시는 적이 많았다고 한다. 부처가 무어냐고 묻는데 ‘삼이 세 근’이라니! 동산수초洞山守初를 찾아갔던 중놈들 가운데 ‘마’(삼)를 제대로 보기나 했던 이들이 몇이나 될까? 그게 어떻게 삼베옷 한 벌이 되는지 생각해 본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삼 서 근? 아, C-8! 너 그거 허벅지에 대고 비벼대느라고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맺히는 아낙네들 본 적이나 있나? 낱낱이 따로따로 흩어져 있는 삼대 겉껍질 벗기고 속껍질 가닥가닥 갈라서 그걸 하나로 이으려고 밤 홀딱 새우는 꼴 보기나 했나?’

스님요, ‘수인감사편시몽誰人甘死片時夢’(그 누가 잠깐의 꿈속 세상에 꿈을 꾸며 살다가 죽어가랴)이라고요? 저 같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질 꿈이라도 그 꿈에 한목숨 걸겠어요.

이제 벌써 마흔 해가 넘고 쉰 해에 가깝나? 나를 데리고 해인사 백련암 모퉁이에 따로 지은 ‘장경각’에 들어가 책 자랑하던 성철. 그 몸 불사르는 ‘다비식’에 30만이 넘는 ‘불자’들이 온 나라에서 모여 들었다는 그 큰 스님. 늦게라도 스님에게 졌던 빚을 갚아야겠다. 섣부르게 입 놀렸던 말빚을 갚아야겠다. “스님이 일찍 열반에 드시거나 마음 고쳐 장경각 서고를 개방하시거나.”라고 삐딱하게 대거리했는데, 이 나이에 들어 생각해 보니 “그거 내놓으면 그걸 파는 책버러지들 먹이고 입히고 재우느라 얼마나 많은 애꿎은 중생들 피땀 흘러야 할지 니 생각해 본 적 있나?” 속으로 야단쳤을 스님 말소리가 귓전에 쟁쟁하다.

누군가 먼 길 걸어 나를 찾아온 사람에게 대뜸 내가 ‘온 바퀴 다 돌아도 좆 잡고 흔드는 것만 못 해.’라고 화두 아닌 화두를 던졌다 치자. 그러면 그 말 들은 이 ‘바퀴? 자동차 바퀴? 바퀴벌레? 뺑뺑이? ….’ 하고 머리를 싸매겠지. 어쩌면 죽는 날까지 머리 굴리다가 마지막으로 ‘휴’ 하고 한숨 뱉으면서 뻗을 놈도 생길지 몰라.

원택圓澤 스님이 성철 스님 밑에서 ‘행자’로 있을 때 도시내기인 이 ‘먹물(대학 출신) 행자’에게 이렇게 야단쳤다고 한다. “혼자 사는 게 중인기라. 밥할 줄 모르고, 반찬 할 줄 모르고, 빨래할 줄 모르면 우째 혼자 살겠노.” 듣는 이에 따라 가시 돋친 말로 여겨질지 모르나 이런 말씀이 ‘원음圓音’이다. 둥근 소리. 부처님 말씀.

언젠가 나는 『금강경』의 고갱이는 ‘여시아문’(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이라는 한마디에 다 들어 있다고 헛건방 떤 적이 있다. 『금강경』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듣기와 읽기, 귀를 파고드는 소리의 울림과 눈에 비치는 글의 꼴이 어떻게 다른지, 왜 ‘육조六祖’ 이래 중국에서 경전 읽기보다 참선 수행을 더 높이 쳤는지 궁금했다.

등불이 이어지듯이 말에서 말로 이어져 내려오던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이 어떻게 해서 그 많은 ‘경전’으로 묶이게 되었을까? ‘불교종단’이라는 위계질서가 생겨나 조직화되고 벼슬아치들에게나 어울림직한 이름들이 위아래로 붙게 되었을까? 나는 모른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가 죽은 뒤에 꽤 긴 세월이 흘러서야 불교가 세속 권력과 손잡은 ‘왕실 종교’, ‘국교’가 되면서 팔만사천이라고 헤아려지는 경전으로 묶이고, 그것을 보는 ‘눈’이 말 듣는 ‘귀’를 앞지르게 되었다고 본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였다. 예수의 열두 제자가 들었다는 ‘복음福音’은 그이가 죽은 지 300년이 흘러서야 로마 황제의 돌봄 아래 ‘복음서(신약성경)’로 엮였다 한다. 동양에서나 서양에서나 거의 모든 사람이 까막눈인 세상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되었고, 그이들은 직간접적으로 힘 있는 사람(권력자)에게 끈이 닿아 있었다.

‘경’에 기대는 사람은 예수를 믿거나 부처를 믿거나 가리지 않고 ‘말씀’을 듣는 것을 접어두고 글을 읽었다. 말에는 ‘울림’이 있지만, 그리고 흐르지만 글은 한 자리에 붙박인 단단한 ‘꼴’로 줄 세워져 있다. 소리의 떨림은, ‘톨’로 굳어 있다. 부르는 소리와 긋는 줄 사이에는 오갈 수 없는 틈이 생긴다. 이어주기와 떼어놓기, 귀와 눈, ‘안식眼識’과 ‘이식耳識’. (이것은 파바로티의 노래와 피카소의 그림만큼이나 거리가 멀다.)

글은 그림과 함께 ‘우상偶像’을 그리고 세운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을 쓰고, 그리고, 짓거나 만든 사람이 죽고 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말은 소리로 흐른다. 지난 소리는 꼬리를 감추고 입 밖에 내지 않은 소리는 아직 고개를 디밀지 않았다. 글이 ‘일방통행’이라면 말은 ‘쌍방통행’이다. 한쪽으로만 열린 길과 오가는 길. 책으로 묶인 예수나 부처의 말씀(그것을 ‘복음’이라고 불러도 ‘원음’이라고 불러도 좋다.)은 내리 먹일 뿐이지만, ‘선문답’은 주고받는다. 어떤 때는 퉁명스러운 외마디 ‘없어!(無)’로 끝나기도 하고 같은 물음에 다른 대답이 들려오기도 하지만 ‘문답’이고, 주고받는 말이다. (유식한 말을 쓰자면 글은 ‘모놀로그’, 독백이고, 말은 ‘디알로그’, 대화다.)

“부처가 무어요?” “(그런 거) 없어!” “똥 막대기여.” “삼 서 근.” “저 뜰 앞에 선 잣나무.” 이런 말 속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어떤 뜻을 담아내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듣는 사람 몫이다.

저마다 다른 길을 내고, 찾고, 닦고, 걷지만, 그것도 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요, 흐르는 물에 뜬 달그림자다. 그리고 열반. 너나없이 허물을 벗는다. 죽는다. 뼈마디도, 그것의 바뀐 모습인 ‘사리’도 어느 결에 흩어졌다 사라진다. ‘톨’로 엉겼던 것들이 차츰차츰 ‘결’로 풀린다. ‘해방’. 돌돌 뭉친 톨이 데굴데굴 구르면서 한 가닥 또 한 가닥 마치 삼실 뭉치 풀리듯이 풀려나간다. 풀리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결로 돌아간다. 언젠가 다시 되감기겠지. 꼴도 모습도 달라진 또 다른 삼베옷을 짓겠지.

‘제행무상諸行無常’. 늘 그대로인 것은 아무것도, 아무 때도, 아무 데도 없다. 그러니 어찌하랴. “그러니께 ‘자비희사’하라는 거여, 이놈아야.” 성철이 몽둥이 들고 쫓아오는 것 같다. (나도 불필不必 못잖게 날렵하게 달아날 수 있으려나?) 또 속이고 있다. 남도 속이고 나도 속이고…. 헤헤. 잿밥에만 마음을 둔 ‘염불念佛’.

뉴스를 본다. 일흔 넘긴 늙은이들의 추한 꼴이 여기저기 보인다. 전직 대법관, 헌법재판관, 변호사협회 회장, 판사, 검사, 목사, 정치인. 그 사이에 ‘멸빈’ 당한, 그래도 허울은 그럴싸하게 차린 현직(?) 스님 …. 그러게 늙으면 죽어야지. 나도 마찬가지. ‘아스팔트를 피로 물들이겠다.’(?) 이미 그 아스팔트 피로 물들었다. 한 차례만 아니고 여러 차례 물들었다. 당신들과 내가 함께 몽둥이를 휘둘렀다. 또 그러고 싶은가?

‘조서’나 ‘판결문’? 언제 예수가, 석가모니가, 그런 걸 쓴 적이 있나? 그리고 그걸 믿으라고 윽박지른 적이 있나?

저잣거리를 서성이면서 한 번도 저자에 발 디딘 적이 없던 성철 스님에게 마지막 불퉁 맞은 한마디.

“스님, 이 꼴 안 보고 잘 가셨슈.”

 

윤구병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대학원을 나오고 월간 「뿌리깊은나무」 편집장을 거쳐 충북대학교에서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 1995년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전북 부안으로 낙향, 농사를 지으면서 대안교육을 하는 ‘변산교육공동체’를 설립해 20여 가구가 함께 생활하고 있으며, 어린이 전문 출판사인 보리출판사를 설립해 많은 어린이 책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