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갤러리] 어둠 속의 죽비 소리

2017-05-30     김우남
어둠 속의 죽비 소리

그것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빛이 100% 차단된 상태. 내 손가락을 바로 눈앞에서 흔들어도 움직임은커녕 그 모양과 형태도 알아차릴 수 없었다. “눈이 무언가를 보려고 애를 쓰기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 있습니다. 눈을 감으나 뜨나 마찬가지니까 아예 눈을 감으십시오.” 길 안내를 도와주는 로드마스터의 목소리였다. 그렇게 ‘어둠 속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어둠 속의 대화’는 1988년 독일에서 시작된 이후 유럽, 아시아, 미국 등 전 세계에서 950만 명 이상이 참여한 국제적인 프로젝트다. 완전한 어둠 속 세상에서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을 이용하여 100분 동안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한 팀에 8명 정원이며, 두세 명씩 짝을 이루어 하얀 지팡이를 짚은 채 로드마스터의 안내를 받아 이동해야 한다. 서울 전시장은 북촌마을, 가회동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는 겨우 서너 발짝을 떼는 데도 용기가 필요했다. 바로 앞에 있어야 할 동료가 손끝에 잡히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웠다. “무슨 소리가 들리나요? 어떤 냄새가 나나요?” 새소리와 물소리,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의 결, 크고 작은 나무와 마른 꽃 냄새. 세상의 온갖 보이는 것들에 집중하느라 놓쳐버린 다른 감각들이 명료하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러나 비닐봉지 속 물건을 손으로 만져 알아맞히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징어나 말린 채소일 거라고 추측한 것은 마른 당면이었고, 매우 경쾌한 소리를 내는 동그랗고 딱딱한 물체는 바싹 마른 호두였다. 캔 음료를 마시고도 우리는 포도나 석류, 망고처럼 전혀 다른 맛을 구별하지 못했다. 그리 달지도 시지도 않은 맛이었다. 그러자 어쩌면 우리가 음식을 맛보기 전에 모양이나 색깔 혹은 적힌 글씨를 먼저 보고 우리가 갖고 있는 맛의 기억에 의지해서 어떤 맛을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싶었다. 본래의 맛이 아닌 개개인이 형상화시킨 맛. 

어둠 속의 죽비 소리
어둠 속의 죽비 소리

문득 작년 겨울, 열흘 동안 경험한 묵언수행의 순간이 오버랩 되었다. 묵언수행 중에 우리가 알게 모르게 짓는 구업口業이 얼마나 많았는지 새삼 깨달았던 것처럼, ‘어둠 속의 대화’는 우리가 제대로 보고 제대로 판단했다고 믿는 것들이 편견과 잘못된 시각에 사로잡힌 허상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했다.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능가경』에는 ‘유有로 인해 무無가 성립하고 무無로 인해 유有가 된다. 마음에 보이는 것은 없는 것이며 오직 마음에 의지하여 생긴 것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어느 하나의 상相에 사로잡히지 않을 때 분별심이 끊어진 자리에 설 수 있다는 말일까. 

“오른쪽 벽과 나무를 손으로 만져보세요. 두세 발짝만 앞으로 나오세요.” 100분 동안 밝은 목소리로 서 있는 위치를 알려주고 잘못 든 길을 바로잡아주던 우리들의 로드마스터. 우리는 그녀가 적외선 안경을 낀 안내원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녀는 선천적인 맹인이었다. 그동안 우리들은 맹인의 도움을 받아 길을 찾아냈던 것이다. 빛의 세계에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이었다. 그러자 레이몬드 커버의 소설 『대성당』의 의미가 새롭게 느껴졌다. 

오래 전 아내와 함께 일했던 맹인 사내가 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남자는 맹인 남자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불편하기만 하다. 그때 TV에서 대성당에 대한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맹인이 주인한테 대성당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한다. ‘지붕이 뾰족하다고 말하면 알까? 세모와 네모의 차이는 알 수 있을까? 저곳에 어떤 조각과 그림이 새겨져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하지?’ 난처해하고 있는 주인한테 맹인이 함께 대성당 그림을 그려보자고 제안한다. 처음에는 주인의 손 위에 맹인이 손을 얹었고, 나중에는 맹인의 손 위에 주인이 손을 얹은 채 그림을 그린다. “자, 여기서 이쪽으로 조금 길게 나아가면 되는 거지요?” 그것은 서로 소통하지 못하던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이 세상에 부처 아닌 것이 없다는 말씀처럼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 아닌가. 그러니 서로 돕고 의지하면 헤쳐 나가지 못할 것이 없다는 가르침이렷다. 

관세음觀世音의 뜻풀이는 ‘세상의 소리를 보는 자’이다. 소리를 듣는 게 아니라 본다고? 그렇다. 이 의미야말로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믿는 중생의 무지에 대한 경종이자 그래도 존재하는 진리에 대한 웅변이 아닐까 싶다. 2017년 새해 벽두에 만난 ‘어둠 속의 대화’는 깨달음을 멀리하고 어둠 속에서 헤매는, 무지몽매한 중생의 등짝을 후려치는 죽비 소리와도 같았다.        

      

어둠속의 대화
어둠속의 대화

사진제공. 어둠속의 대화

           

김우남
소설가.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실천문학 소설문학상 및 직지 소설문학상 수상. 소설집 『엘리베이터 타는 여자』 『굿바이 굿바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