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두, 마음을 사르는 칼] 이중구속

2017-05-30     박재현
화두 이중구속

이중구속, 벗어날 수 있겠는가

공안 혹은 선문답에서 자주 이용되는 상황설정 가운데 이중구속 상황(double-bind situation)이 있다. 이중구속은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서로 모순된다고 느껴질 때, 당사자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심리적 상태다. 간단한 사례로, 윗사람이 “편하게 해.”라고 말하면서 근엄한 표정을 지으면 아랫사람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또 애인이 싸늘한 목소리로 “자기 맘대로 해.”라고 말해도, 듣고 있는 사람은 진짜 맘대로 해도 된다는 것인지 어쩐지 혼란스럽다.

이렇게 서로 모순된 두 가지 메시지를 한 사람이 동시에 전할 때,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은 이중구속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거나 심해지면, 그 당사자는 정신이 피폐해지고 정신분열증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이 때문에 특히 어린아이를 돌보거나 교육하는 사람은, 아이가 이중구속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말과 행동을 지극히 조심해야 한다. 의도, 말, 표정(태도), 이 세 가지가 일관되지 않은 채로 아이들과 의사소통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종교에서는 세속적이고 상식적인 생각을 전환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모순된 상황이나 이론을 일부러 연출하기도 한다. 특히 선禪에서는 수행자의 의식을 전환시키기 위해 방편으로 이러한 상황을 조장하곤 한다. 끽다거喫茶去로 유명한 중국 당나라 시절의 조주(趙州, 778~897) 선사의 일화를 보자.

 

조주가 어느 암주庵主가 있는 곳에 당도해서 물었다
- 있는가, 있는가(有麼有麼)?
그러자 암주가 주먹을 들어 보였다(豎起拳頭).
조주가 말했다.
- 물이 얕아서 배를 댈 만하지 못 하구만.
그리고 (조주는) 곧 떠났다(便行).
(조주가) 또 다른 암주가 있는 곳에 도착해서 물었다.
- 있는가? 있는가?
그 암주도 역시 주먹을 들어 보였다.
조주가 말했다.
- 놓아줄 수도 있고, 빼앗을 수도 있으며,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구만(能縱能奪能殺能活).
그리고 (조주는) 곧 절하며 예를 갖추었다

 

이 이야기는 『무문관無門關』 제11칙으로 올라 있는 『주감암주州勘庵主』라는 제목의 공안이다. 조주 선사가 암주를 감별한다는 뜻이다. 암주는 암자의 주인이라는 뜻인데, 주지스님이라는 뜻은 아니고 그냥 암자에서 수행하고 있는 수행자를 가리킨다. 있는가(有麼)에서 마麼는 어기조사로 의미 없이 그냥 의문형을 나타낸다. 수기豎起는 세운다는 뜻이다. 주먹에 해당되는 말은 권두拳頭인데, 여기서 두頭는 명사에 붙는 접미사로 별다른 의미는 없다. 편행便行의 편便은 ‘즉시’ 혹은 ‘얼른’이란 뜻의 부사다.

대화 말미의 종縱ㆍ탈奪ㆍ살殺ㆍ활活은 딱 부러지게 번역하기가 쉽지 않은 선가禪家의 전문용어다. 설명하자면 말이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읽고 말면 그 또한 무책임한 일이다. 이 용어는 선가의 교육법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각각의 의미를 거칠게나마 정리해 보면 이렇다. 종縱은 상대방을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 탈奪은 상대방을 다잡는 것, 살殺은 상대방을 주눅 들게 하는 것, 활活은 상대방의 기를 살려주는 교육법이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한 용어는 이쯤에서 정리하고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이 이야기가 독자를 이중구속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만난 암주에 대한 조주의 평가는 부정적인 인상을 주고 있다. 얕은 사람이라고 대놓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만난 암주에 대한 조주의 평가는 충분히 긍정적인 태도로 나타난다. 절하며 예를 표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조주 선사는 똑같은 질문을 던졌고 두 암주의 반응도 역시 똑같았다. 그런데 조주의 평가는 전혀 상반되게 나타난다. 그래서 독자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황당하고 모순된 상황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무문관』의 저자인 무문혜개(無門慧開, 1183~1246) 선사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주먹을 들어 보였는데, 왜 한쪽은 긍정하고 다른 쪽은 부정했는가. 자, 얘기해보라, 이 기묘한 일의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무문 선사의 질문은 우리가 이중구속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렇게 이중구속에 빠지게 하는 것이 이 공안이 본래 의도하고 있는 지점이라는 것도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모순된 상황에서 도대체 어찌해야 하는가. 이런 황당한 상황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어떻게든 탈출해 보려고 애쓴다. 처음에는 해결책을 찾아보다가 이도 저도 안 되면 그냥 무작정 발버둥 친다.

무문 선사는 우리가 어떻게 버둥거리게 될지 뻔히 알고 있다는 듯이 미리 경고한다. “만약 두 사람의 암주에게 우열이 있다고 하면, 아직 공부하는 눈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만약 우열이 없다고 해도 그 또한 공부하는 눈을 갖추고 있지 못한 것이다.” 앞의 공안 이야기를 두고, 조주 선사가 두 암주의 우열을 평가한 것처럼 받아들이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일침이다.

무문 선사의 이런 경고는 공안에 대한 애초의 이해를 모조리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조주가 두 암주에 대해 긍정 혹은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라진다. 그리고 이야기는 본래 처음부터 이야기되지 않았던 지점으로 회귀한다. 이중구속에 빠졌던 독자는 이제, 아무것도 구속하지 않는데도 구속 상태에 빠진 꼴이 되고 만다. 참 황망한 노릇이다. 이 공안을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일까.

동아시아 비교종교학을 연구하는 영국인 하이네(Steven Heine, 1950~) 박사는, 이 공안에서는 조주 선사와 두 수행자 사이의 관계가 핵심이라고 봤다. 그는 두 암주가 듣도 보도 못한 외도外道나 이교도異敎徒 종교인이 아니라, 선종의 법맥에도 포함되는 정통 선 수행자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앞의 공안을 보면 대개 두 암주의 수행력이 어떻게 다른지를 궁금해하거나 밝혀내려고 하는데, 두 암주가 아니라 조주 선사에게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다.

앞의 공안 이야기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평가의 칼자루를 조주 선사가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주가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인물이라는 사실, 그리고 두 암주에 대한 조주의 평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보여주려는 것이 이 공안의 의도라고 그는 설명한다. 이런 설명에 기대어보면, 이중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얼핏 보인다.

두 암주의 수행력에 모종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연막전술이다. 조주는 일부러 자가당착에 빠진 사람처럼 행동해서 연막 뒤에 숨는다. 이 연막전술에 말려들면 이중구속에 빠진다. 이야기를 다 읽은 우리는, 주먹을 들어 보여도 안 되고 가만 있어도 안 되는 이중구속 상황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연막 뒤의 조주를 찾아내면 상황은 반전된다. 이중구속 상황을 연출한 장본인과 그 의도가 백일하에 드러난다. 그러고 나면 저절로 구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말과 행동이 모순되어 사람들을 황망하게 만드는 세월이 너무 오래 지속되고 있다. 헌법을 준수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유린하고, 국민 행복을 말하면서 자기 행복만 챙기고, 바르게 살라고 가르치면서 뒤로는 못된 짓을 일삼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한때는 왼쪽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한다는 소리를 듣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세월이 하도 오래 지속되다 보니 온 나라의 백성들이 이중구속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삶의 기준도 가치의 기준도 모두 상실한 채 다들 발버둥 치고 있다.

이중구속에서 벗어나려면, 연막 뒤에 숨어 있는 자를 찾아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연막 뒤에 숨어서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을 그들을 눈 똑바로 뜨고 찾아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린 다 죽는다.

 

박재현
서울대학교 철학박사. 저술로 한국 근대불교의 타자들』, 깨달음의 신화』, 만해, 그날들』 등이 있고, 「한국불교의 간화선 전통과 정통성 형성에 관한 연구」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다. 현재 부산 동명대학교 불교문화콘텐츠학과에서 겨우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