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인터뷰] 인드라망 생협 이정호 이사장

귀농운동에서 생명평화운동으로 이어온 20년

2017-05-30     김성동

귀농운동에서 생명평화운동으로 이어온 20년

그는 1999년 조계사 옆, 지금은 허물어진 5층 건물(현 안심당 자리) 내 작은 사무실에서 ‘불교도농공동체운동본부’를 준비하고 있었다. 비슷한 가치를 갖고 있던 우리는 동갑내기로 자주 만났다. 그는 1년 전에 ‘제1기 불교귀농학교’를 마치고, 2기를 실무 준비 중이었다. 불교계는 1998년과 1999년 조계종단 사태로 어수선했다. 그는 승ㆍ재가 개혁모임인 ‘범불교연대회의’에서도 활동하면서 ‘사부대중공동체’를 고민했다. 불교귀농학교 체험프로그램이 실상사에서 진행되었기에 그는 이따금 서울과 실상사를 오가며 도시와 농촌을 연계하는 공동체 운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 자주 밤을 지새우며 일을 했기에 마른 몸이 더 말라 보였다. 당시 불교계뿐 아니라 사회에서 ‘귀농학교’와 ‘도농공동체’는 아주 낯선 단어였다. 가톨릭과 시민사회에서 일부 운영하고 있었기에 불교계의 이런 움직임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드라망 이정호 이사장/ 사진 : 최배문

 작은 건물 속 커다란 공동체

불교도농공동체운동본부는 그해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이하 인드라망)로 명칭을 변경해 불교의 세계관과 새로운 문명의 요구인 생명과 평화를 역사화하기 위한 닻을 올린다. 인드라망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 이정호(49) 이사장. 제1기 불교귀농학교가 1998년 3월 27일 처음으로 열렸으니, 그의 활동은 벌써 20년에 이른다. 불교계에서 시민사회 활동으로 한길을 20년 동안 흔들림 없이 걸어간 이가 몇 명이나 될까. 얼핏 수많은 이름과 얼굴이 떠올랐지만,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의 존재가 불교계 안팎으로 귀한 까닭이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 자리 잡고 있는 인드라망 사무실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던 그를 만났다. 기타 소모임이 막 끝났기에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인드라망에서 기타 소모임도 하는가?

“재밌다. 몇몇 회원들이 제안해서 시작했다. 나도 조금씩 배워 이제 코드를 보면서 웬만한 곡을 칠 수 있다.(웃음)”

그는 자주 웃는다.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그의 웃음이 뜬금없다고 생각할 정도다. 오래 전 그에게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매일 웃느냐?”고 묻자 “어? 그랬어?” 하고 또 웃었다. 그는 글도 많이 쓴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가 조직을 확장해나갈 때 200자 원고지 100매를 하룻밤에 다 쓴 적도 있다. 그만큼 그의 머릿속에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세계관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인드라망 건물 내부의 벽과 계단 곳곳에는 회원들의 활동이 드러난 사진들과 알림 글들이 보인다. 먼지가 없는 것으로 보면, 활동의 지속성을 알 수 있다. 열 명의 실무자들이 함께 공양하는 공양간도 있고, 방 곳곳에는 사무 공간과 회의실, 세미나실, 공부방 등이 있다. 1층 생협 매장과 카페에서부터 4층 공양간까지 빈 틈 없이 공동의 공간으로 채워져 있다. 처음 이곳을 찾는 이들은 작은 건물 속에 커다란 공동체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 여전히 활발하다. 인드라망이 이제는 뿌리내린 것 같다. 최근에는 어떤 생각을 많이 하는가?

“2009년 11월에 이곳 양천구 신정동에 왔을 때 건물을 매입했다. 아직도 빚이 있다.(웃음) 그때 양천구에 우리 회원이 몇 명이 있을까 살펴봤더니 5명이었다. 반성했다. 공동체 운동을 한다면서 지역사회에 회원이 없는 것이다. 생협 매장을 운영하면서 마을 장터를 열고, 가을에는 마을한마당 행사도 열었다. 지금은 생협 회원 중 양천구 주민들이 800여 명이다. 큰 변화다. 지금도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지역 주민과 친하게 지내자.(웃음)”

- 인드라망이 양천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조직인가? 회원들은 전국에 걸쳐 있지 않은가? 중심도량도 실상사에 있고, 광주에도 있다.

“승가공동체는 사방승가四方僧伽와 현전승가現前僧伽다. 마찬가지로 인드라망의 이념적인 연대는 전국적으로 형성이 되어 있는데, 각 지역 속에서 귀농하면서 형성된 것은 약하다. 실상사 주변은 활발하지만. 제대로 된 공동체가 되려면 농촌만 해서는 안 된다. 도시에서도 공동체가 있고, 나아가 도시와 농촌이 함께 어울리는 도농공동체가 활발하게 형성되어야 생명공동체로서 지향을 가져갈 수 있다. 그동안 인드라망은 농촌공동체를 중심으로 사업을 이어왔는데, 지금은 생활 속에서 귀농자를 지원하는 도시인들의 존재가 필요하다. 이념적 공동체가 갖고 있는 한계가 있다. 도시와 농촌의 활발한 교류가 이어지고 지속해야 바람직한 공동체가 될 수 있다.”

- 지금 인드라망이 조직의 지향으로 가장 고민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그동안 인드라망이 귀농 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해왔지만, 지금은 생명평화다. 이 가치를 가지고 귀농과 공동체, 협동조합 등을 엮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안하는 과정이다. 생협도 지난 몇 년간 별도로 ‘화요장터’를 열고 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불교귀농학교 출신 귀농자들의 생산물을 이 장터에서 판매한다. 지금 대부분 생협은 물류센터를 통해 생산물을 공급하는데, 초기 생협의 역동성인 귀농자인 생산자와 도시의 소비자가 직접 만나는 일이 드물게 되었다. 그래서 장터를 만들었다. 지금은 아주 북적하다.(웃음)”

 

인드라망 이정호 이사장/ 사진 : 최배문

| 불자 농부가 더 필요하다

- 생협 이사장이니, 생협 이야기를 해보자. 현재 생협 조합원들이 몇 명이며 이 중에 불자들은 어느 정도인가?

“생협 조합원은 1,800여 명이다. 불자들은 구체적으로 조사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70% 정도는 불자라고 보고 있다.”

- 인드라망 회원보다 생협 회원이 더 많다.

“그렇다. 인드라망 회원은 매월 회비를 납부한다. 1천여 명이다. 생협은 매월 납부하지 않고 조합비(가입비)를 낸다. 인드라망보다 더 대중과 가깝다. 특히 지역주민과 가깝다.”

- 불교생협운동본부를 2003년 창립했다. 2006년에는 인드라망생협으로 명칭 변경을 했고. 불교계 밖의 다른 생협에 비하면 인드라망생협의 규모는 어떤가?

“아직 작은 편이다. 가톨릭 생협은 2만 명이 넘는다. 70년대부터 이어온 역사가 있다. 생협이 성장하려면 각 지역마다 유기농을 생산하는 농부와 도시의 소비자가 있어야 하는데, 불교는 이제 막 발걸음을 내딛은 셈이다.”

- 10년이 넘었지만, 이제 출발한 셈이다?

“그렇다. 생협이 발전하려면 유기농 생산자들이 많아야 하고, 우리 불교에는 이 생산자들이 부족하다. 가톨릭은 오래전부터 귀농 운동과 생명공동체 운동을 시작했다. 그 핵심에는 가톨릭농민회가 기반이었다. 우리밀살리기 등 사회 활동을 하면서 크게 성장했다. 가톨릭에서 농사를 배운 이들이 지역에서 농부가 되어 우리 땅에서 유기농을 생산했다. 지금도 가톨릭농민회는 가톨릭 교단 내에 공식 기구이다. 가톨릭농민회가 중심이 되어 생협이 중앙에서부터 각 지역까지 뿌리내렸다. 불교계는 2000년 이후부터 농부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셈이다. 한 사람이 귀농해서 정착하려면 적어도 10년이 지나야 한다. 불교귀농학교 이전에는 불자로서 유기농교육을 받는 사람이 없었다.”

- 불교귀농학교를 설립한 지 20년이 다가오고, 2천여 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이 정도면 유기농 생산자들이 충분하지 않을까?

“욕심이다. 한 30년은 해야 한다. 내가 처음 불교귀농학교를 시작할 때 한 세대 정도가 지나면 불교계에 귀농 운동이 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이제 20년이니, 절반 이상은 온 셈이다. 불교귀농학교 출신들도 각 지역에서 이제 막 유기농을 생산하고 있는 단계다. 2천여 명의 졸업생들 중에 귀농한 불자는 15% 내외다. 불교의 정체성을 가진 농부가 더 많아야 한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

- 지금 불교귀농학교의 성과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지금 한국사회에서 ‘귀농’이란 단어를 많이 쓰고 있다. 잘 쓰이지 않았던 단어가 이제 누구나 다 쓰고 있는 단어가 됐다. 언어혁명인 셈이다. 국가와 지자체에서도 자체 귀농 운동이 정책화되었다. 불교귀농학교가 처음 시작할 때,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오면서 한국사회에 ‘귀농’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일어난 것이다. 인드라망이 이를 만들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본다. 이건 귀농 운동하는 사람들도 인정한다.(웃음) 또 불교계로 본다면 불자로서 정체성을 갖고 있는 귀농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 가톨릭은 가톨릭농민회가 있는데, 불교는 불교농민회가 없다.

“사람들이 놀란다. 불교에 농민회가 없다고 하면.”

- 왜 없을까?

“첫째는 농촌에 있는 사찰이 지역 주민들보다 도시 중심으로 포교를 하는 경향 때문이다. 둘째는 포교를 노보살님을 중심으로 하다 보니 지역 농민들이 갖고 있는 문제를 반영시키지 못했고, 비껴갔기 때문이다.”

- 지금이라도 하면 되지 않을까?

“이미 사찰의 신행 문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또 사찰의 토지를 관리 대상으로 취급하지 농사를 짓는 활용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 불교계에 생협이 부족한 이유

- 불교귀농학교가 불교계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 미약한 것 같다. 각 사찰에서 귀농 운동이나 생협 활동은 잘 보이지 않는다.

“생협 초기에는 전국의 10여 개 사찰에 생협 매장이 설립되면서 비교적 활발했다. 친환경 공양미를 법당에 올리는 일부터 유기농을 사찰의 신도들에게 공급했다. 그런데 주지스님이 바뀌면 생협 매장이 문을 닫는 사례가 발생한다. 생협은 좀 비싸도 먹는 문제를 바꿔야 하는 만큼 의식이 따라주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 불교계가 생협에 관한 인식이 부족한 편이다.”

- 가톨릭은 활발한가?

“거기는 생협이라고 하지 않고, ‘우리농촌살리기’라고 부른다. 가톨릭은 공식 기구라서 우리보다는 활발하지만, 거기도 작은 매장은 신부님이 바뀌면 없어지는 사례가 많다.”

- 지금 사찰에서 생협 매장은 어느 정도인가?

“서울에는 석왕사와 불광사, 화계사 정도다. 지방에는 광주 증심사와 안동 연미사가 있고, 거제에는 (사)좋은벗이 있다.”

- 생협은 지역 주민과 연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각 지역의 사찰에서 생협 매장을 설치하는 것이 어려운가?

“지금은 어려운 편이다. 노력은 하지만 사찰의 주지스님들이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현실은 그렇다. 우리 역량이 부족하다. 현재 우리 생각은 이렇다. 사찰 안에서 어렵다면 사찰 밖으로 가자. 지금 우리 생협 활동이 사찰보다 사찰 밖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도 그렇다. 사찰 내 생협을 만들어내는 것은 앞으로도 중요한 과제다. 불자들도 아직 생협을 낯설어 한다.”

- 사찰에서 생협 매장이 성공하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생협 매장의 물품이 유기농이기에 좀 비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찰 구성원들이 의지를 가져야 한다. 비싸지만 해야 한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거기서 계속 밀고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직 사찰에서 벽이 높고, 우리는 이를 넘어설 역량이 못 미친다.”

- 인드라망 생협 전체 조합원들 중에 지역인 양천구의 비율은 어떤가?

“양천구 지역민들도 꽤 많은데, 다행스러운 것은 주변 목동 선센터와 법안정사 신도님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조계종 화쟁위원장 도법 스님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를 불교귀농학교에서부터 인드라망생명공동체까지 이끌어 준 사상의 은사가 바로 도법 스님이다. 그의 표현처럼 “인드라망생명공동체가 이처럼 확장된 것의 중심에는 도법 스님이 있다.” 도법 스님과는 90년대 스님들의 수행결사 모임인 ‘선우도량’ 간사로 인연을 맺은 후 지금까지 이어왔다. 단순한 인연이 아니라, 도법 스님의 사상을 현실 속에 실현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그의 법명인 효원曉園도 도법 스님이 주었다. 새벽동산처럼 늘 부지런히 살라는 뜻이다. 때문에 도법 스님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오랫동안 봤다. 그에게 도법 스님을 묻지 않을 수 없다.

 

| 도시와 농촌이 모두 사는 길

- 인드라망의 역사는 도법 스님과 함께 했다. 인드라망 활동이 사찰 속으로 확장하기 쉽지 않은 것은 도법 스님이 종단에서 차지하는 역할 때문이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웃음) 별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며) 그분은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늘 한결같이 대화했다. 인드라망 활동 초기에 내가 도법 스님을 모시고 전국의 교구본사 주지스님들을 모두 만났다. 귀농과 생협 활동을 이야기했다. 생명평화 이야기도 하고. 주지스님들이 관심 없다는 것은 표정에서 드러난다. 도법 스님이 왔으니 가라고 할 수 없고.(웃음) 그래도 주지스님들께 세세하게 설명하면서 꿋꿋하게 대화하고 말씀하신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분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당신이 필요하다면 진정성을 가지고 말씀하는 것을 많이 봤다. 우리 욕심만큼 확장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다. 불교계가 갖고 있는 기반이 너무 약하다. 시대를 뛰어넘을 수 없다. 가톨릭과 단순 비교를 하면, (가톨릭처럼 하자는 것은) 시대를 뛰어넘자는 이야긴데, 욕심이다. 50년 역사의 가톨릭농민회는 절박함을 갖고 전국을 돌아다녔던 경험이 있다. 교단의 조직적인 지원도 있었고.”

그는 도법 스님의 종단 활동에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정확하게는 그의 관심은 귀농과 생협, 도농공동체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그 외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지금 인드라망생명공동체는 귀농운동, 생활협동조합운동, 대안교육운동, 생명환경운동, 생태공동체운동 등으로 나누어 활동하고 있다. 이를 위해 1백여 명(상근 50여 명, 비상근 50여 명)의 실무자가 근본도량 실상사, 수련원 귀정사, (사)한생명, 실상사 작은학교, 인드라망생활협동조합, 우리옷인드라망, 인드라망대학, 인드라망 광주도량 선덕사, 남원귀농귀촌학교, 서울교육도량 등에서 인드라망 세계관을 실현하고 있다. 인드라망생명공동체가 인드라망으로 연결된 것이다.

- 이곳에서 다양한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소모임도 많고.

“아주 많다. 인드라망이 3~4년 전부터 서울도 그렇고, 광주, 실상사에서도 지역 주민과 함께 하는 일을 많이 하고 있다. 서울에는 책 읽기, 기타, 손바느질, 요가, 커피와 인문학, 코바느질, 녹색평론 읽기, 시 읽기 등이 진행된다. 사람과 나를 알기 위해 ‘심심尋心학교’를 지금 5기째 운영하고 있다. 모두 지역에서 인드라망이 뿌리를 내리기 위한 활동이다. 앞으로 인드라망은 지역사회와 지역의 주민들과 함께 도시와 농촌이 모두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할 것이다.”

- 개인적으로 20년을 한길로 걸어왔다. 앞으로 10년 후에는 어떤 모습일까?

“서울을 떠나 농부가 되어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도시를 오가는 농부가 될 것이다. 도시에 사람들이 많다.(웃음)”

- 이정호에게 불교는 뭔가?

“삶의 도반이다. 내가 흔들릴 때 나를 지탱해준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