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벽화이야기] 충남 마곡사 대광보전 벽화

우리는 모두 기독교인이다

2017-05-30     강호진
마곡사 대광보전 벽화 | 사진 : 최배문

불교는 애초부터 분할이나 위계位階로 나와 남을 가르고 밀어내는 일에 서툰 편이다. 세상의 구분과 배제의 경계를 허물고 지우는 방식으로 불교사상과 교단이 태동했음은 석가모니가 제자들을 받아들인 간략한 방식이나 제자들의 다양한 출신계급을 보아도 잘 드러난다. 불교사상의 전개도 마찬가지다. 인도 초기불교부터 아비달마, 중관, 유식, 여래장, 중국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란 이름으로 하나로 묶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상충하거나 대립하는 사상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그렇기에 불교가 원융과 화합의 상징으로, 다시 말해 종교적 도그마가 희미한 미래지향적 종교로 높이 인식되어 왔다.

마곡사 대광보전 벽화 | 사진 : 최배문

마곡사 대광보전에 그려진 벽화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불교의 포용력과 넘나듦을 초월한다. 명부전의 시왕이나 칠성각의 별자리들은 도교의 신앙이 지장보살과 치성광여래의 권속이라는 변용 속에서 불교에 포섭된 것이지만, 비로자나를 모신 주불전에 그려진 여섯 명의 도교 신선 벽화는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다. 불자들에겐 이름도 낯선 이비체李鼻涕, 철괴선생, 하마선인 등의 여섯 신선들이 불전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데, 누군가 도교사원이냐고 물어보더라도 별달리 대꾸할 말을 찾기 어렵다. 그중 가장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불단 옆 세 신선들 가운데 중앙에 그려진 ‘하마선인도’이다. 남루한 옷을 걸친 봉두난발의 맨발 사내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는 듯 양팔을 벌리고 줄에 꿴 엽전 꾸러미를 이리저리 흔들며 다리가 셋인 두꺼비를 희롱하는 모습은 점잖게 앉아 중생을 굽어보는 비로자나불상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하마선인은 늘 두꺼비(하마, 蝦蟆)와 함께 등장하는 신선을 지칭하는데, ‘유해섬劉海蟾’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며 10세기 무렵인 중국 오대五代시절 북경에 살았던 실존인물이라고 하나 그 진위를 판별하긴 어렵다. 다만 명明나라 때부터 민간에 널리 알려져 행운과 재물을 불러오는 길상화로 많이 그려졌는데, 조선시대 심사정이 그린 ‘하마선인도’만 보아도 우리나라에서도 꽤 인기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마선인이 쥐고 있는 동전 꾸러미는 부富를 직접 나타내는 것 같고, 세 발 두꺼비는 재복을 부르는 영험한 동물이니 그림이 전달하는 상징성이 단순하고 명징한 것을 선호하는 대중들의 기호에 딱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마곡사 대광보전 벽화 | 사진 : 최배문

그러나 하마선인이 동전 꾸러미로 두꺼비를 희롱하는 모습은 재복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이는 툭하면 사라져버리는 두꺼비를 동전으로 꾀어내기 위한 것으로 그 이면에는 불교와 도교의 치열한 싸움이 숨겨져 있음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하마선인이 우물가에 사는 석나한石羅漢이란 요괴와 싸워서 그가 지닌 일곱 닢의 동전과 보주를 회수하고 두꺼비로 만들어버렸다고 한다. ‘석나한’이란 이름의 ‘석石’은 승려들이 성性으로 삼는 석가모니의 ‘석釋’과 중국어 발음상 ‘shi’로 동일하고, 나한은 아라한의 줄임말이니, 석나한과 싸워 이겼다고 함은 도교가 불교와 싸워서 이겼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도교 측에서 꾸며낸 것이지만, 내용으로 보았을 때 불전에 하마선인이 그려지는 것은 이순신을 기리는 현충원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초상을 모신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불교의 진정성과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당장 신선들을 지워버려야 하는 것일까? 만약 이 생각에 동의한다면 마곡사의 하마선인도가 지닌 역사성, 더 나아가 불교의 진의를 제대로 간취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곡사의 하마선인도는 대광보전 내부의 네 점의 벽화를 묶어서 읽어낼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먼저 지팡이에 올라탄 이철괴와 중앙의 하마선인, 그리고 화양건을 쓴 서생풍의 신선(하마선인의 스승인 여동빈으로 추정된다.)은 별개로 그려진 듯하지만, 실은 한 꾸러미로 이어진 그림이다. 세 그림의 연속성을 부여하는 장치는 그림 하단의 바닷물이다. 흰 포말을 일으키며 그림들 사이를 넘나드는 바닷물은 분할된 벽을 한 폭의 거대한 캔버스로 통일시키는 시각적 효과를 발휘한다. 바닷물은 여덟 명의 신선이 모여 바다를 건너는 도교 그림인 ‘팔선과해도八仙過海圖’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며 세 인물 모두 팔선의 높은 도력을 지녔음을 알려준다. 분할된 화면을 넘어 각 그림 간의 스밈과 어우러짐을 표현하려는 화사의 모험은 하마선인의 손과 펄럭이는 바짓단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액자처럼 그림을 나누고 있는 나무 부재 위로 튀어나온 선인의 왼손과 바지 자락은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려는 예술가의 분투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 명의 신선을 함께 그린 경우는 마곡사가 예외적이고, 대부분 사찰벽화에선 이철괴와 하마선인이 쌍으로 나란히 그려지는데 그 내력은 원元나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원나라 초기 도교는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불상을 파괴하고 승려를 내쫓아 절을 도교사원으로 바꾸거나 사전寺田을 약탈했다. 지금이야 불교와 도교가 상호친화적 종교라 생각하기 쉽지만, 중국에서 불교와 도교의 악연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중국 역사상 삼무일종三武一宗의 폐불사건 가운데 세 번이 도교와 엮여 일어난 일이다. 원나라 때 일어난 도교의 불교 공격은 결국 도사들이 승려가 되는 도교의 참담한 패배로 마무리되면서 점차 도교의 인물화들은 자연스럽게 선종 선화禪畵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때 유행한 도교의 인물화는 이철괴와 하마선인을 묶어서 그리는 ‘철괴하마도’인데, 실은 선종의 ‘한산습득도’에 등장하는 한산과 습득이란 두 인물에 상응하는 신선의 조합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후 한산과 습득, 철괴와 하마를 휘몰아치는 바닷물 위에 함께 그린 ‘사선공수도 ’가 등장하는데, 네 명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봉두난발에 누더기를 걸친 천진한 모습이란 점에서 이들의 친연성을 찾을 수 있다. 예상할 수 있듯 마곡사 대광보전에도 한산습득도가 불단 맞은편 벽에 보란 듯 자리 잡고 있다. 불전에 그려진 한산습득도와 철괴하마도는 말 그대로 한 세트인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의 불교가 분별과 배척의 좁은 길을 선택하는 대신 역사와 민중을 품은 도저한 문명의 흐름이 되고자 했음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이철괴와 하마선인을 불교에서 지워내기 위해서는 한산습득도도 함께 지워야 하고, 불교가 쌓아온 문명사적 의미를 송두리째 폐기해야 함을 의미한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 또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안중근, 사상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죽은 뒤 부활이나 천당에서의 영생과 같은 약속이 없었는데도 큰 고통과 고문을 견디면서 떳떳이 죽음 앞에 섰다. 불교인들에게는 예수의 죽음은 거의 아무런 감동도 주지 않는다. 감히 말한다면 오히려 평범하고 유치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위의 글은 불교학계에서 이름난 한 스님이 ‘종교간의 대화’란 세미나에서 발표한 글의 부분이다. 오래된 글이지만 아직까지도 인터넷이나 불자들 사이를 떠돌며 기독교에 대항하기 위한 불교인의 금과옥조로 신봉되는 형편이다. 자종의 보호와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해 타종교에 대해 비하와 폭력에 가까운 언설들을 행사하는 일은 한반도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비로소 생겨난 폐단은 아니다. 정도전은 『불씨잡변』에서 석가모니와 승려들을 인간의 기본적 도리를 저버린 자, 구차하게 생계를 이어가는 자로 폄하했다. 중국의 도교인들은 『노자화호경老子化胡經』을 지어 노자老子가 부처가 되어 인도 사람들을 제도했다는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노자가 인도인들을 교화한 이유는 놀랍게도 인도 인들은 개선의 여지가 없는 민족이라 남녀 모두를 승려로 만들어 대를 끊어버리기 위해서였다. 불교가 늘 겸양한 수사로 방어만 한 것은 아니다. 북주北周의 폐불사건 직전에 견란甄鸞은 『소도론笑道論』을 지어 노자화호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신 견란은 아래와 같이 비웃습니다. (중략) 관세음은 지위가 매우 높은 대사大士이지만, 노자는 대현大賢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마곡사 대광보전 벽화 | 사진 : 최배문

우리는 여기서 예수가 성인聖人은커녕 의사義士나 민주화 투사鬪士에도 미치지 못하는 한낱 범부에 불과하다는 모 승려의 주장의 시원始原을 발견할 수 있다. 만약 6세기에 살았던 견란이 환생해 마곡사 대광보전에 그려진 이철괴나 유해섬 같은 도교의 신선들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나는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불교는 도교로 인해 중국에서 세 번씩이나 폐불의 아픔을 겪었지만, 끝내 도교를 끌어안음으로써 종교를 넘어선 동아시아의 문명으로 자리매김했다. 거대한 문명으로서 불교의 포용력과 친화력이야말로 2,600여 년간 진리의 등불이 끊어지지 않은 비결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불교는 기독교인이 극성이라는 이유로 예수를 한낱 범부에 불과하다며 노골적으로 폄훼하고, 종단에 비판적인 기사를 실었다는 이유로 몇몇 교계 언론의 취재와 출입을 금하는 ‘해종언론’이란 해괴한 딱지를 발명해냈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세간의 합리는 불교의 가르침일 수도, 나아갈 방향이 될 수도 없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철리야말로 석가모니가 깨우친 연기법의 핵심이다. 우리는 모두 불자이자, 유자儒子이고, 도교인이자, 기독교인이어야 한다. 배타성의 좁은 울타리에 갇힌 범부중생으로 남을 것인지, 도저한 불교의 역사 속에서 인류와 더불어 살아갈 보살이 될 것인지 마곡사의 ‘하마선인도’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강호진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에서 불교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중학생 때 어머니를 따라 해인사 백련암에 올라가 삼천 배를 하고 성철 스님에게 일각 一角이란 불명을 받았다. ‘오직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라’는 성철 스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지금껏 별달리 일체중생을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 좋은 스승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대로 살지 못한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는 심정으로 『10대와 통하는 불교』,『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이야기』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