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과 함께 한 식물 그리고 동물들] 쿠샤 풀과 사슴

2017-04-20     심재관

 

쿠샤Kūśa 풀

스승께서 완전한 깨달음을 위해 명상에 들기 전, 농부로부터 한 다발의 풀을 받았다는 것을 대부분의 불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스승은 그 풀을 받아 보리수 밑에 깔고 동쪽을 향해 앉아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그 풀을 보시한 사람은 소티야Sottiya였다. 그는 아마도 풀을 잘라 팔던 농부였거나, 그 풀을 필요로 했던 바라문으로 보인다. 그의 이름은 그가 단순한 농사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자신의 이름대로 ‘(베다) 경전을 공부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스승은 그 한 단의 풀을 받아 보리수 밑에 깔고 몸을 꼿꼿이 세워 가부좌를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자리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결심했다. 스승이 깨달음 직전에 앉았던 그 결의에 찬 자리를 우리는 후에 ‘금강좌’라고 부른다. 

이 장면은 경전뿐만 아니라 조각을 통해서 여러 번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부처님이 풀을 받아 자리를 만드는 장면을 왜 고대 불교인들이 여러 번 반복해 말하고 있는가는 별로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스승의 앉을 자리가 딱딱한 맨땅이라 부드러운 풀을 깔아 편안한 자리를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단순한 일이었다면 굳이 그 풀을 보시 받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며, 고대 불교인들도 이 장면을 경전에 남기거나 돌에 새겨 기념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장면이 반복되는 이유는 고대 힌두교나 불교의 전통 속에서 풀을 받아 자리를 만드는 일이 의미있고 상징적인 행위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때 등장하는 풀은 잘 알려진 바대로 길상초吉祥草라 불리는데 이는 쿠샤Kūśa 풀을 지칭하는 것이다. 쿠샤는 다르바Darbha라고도 부르는데 인도의 여러 종교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가장 성스러운 풀 가운데 하나다. 한문으로는 음사하여 구시矩尸나 구서俱舒 등으로 옮겼고, 길상초나 묘초妙草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 풀을 신성시 여겼던 고대 인도의 전통은 베다문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기 힌두교에서 사제들은 이 풀 위에 앉아 제사를 지내거나 신에게 바치는 공양물을 이 풀 위에 올려놓기도 했다. 수행자들은 이 풀로 엮은 돗자리 위에 앉아 명상에 들기도 하는데, 의식을 집중할 때 외부의 산란한 기운을 차단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명상을 위한 이상적인 자리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현재 인도와 네팔 등지에서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데, 특히 요가수행자들은 이 풀로 만든 자리에 앉기를 원한다. 북인도와 네팔 테라이 지역에서 많이 자생하는데, 부처님의 열반지였던 쿠시나가르라는 지명이 여기서 유래했다는 견해도 있다. ‘쿠샤 풀(쿠시)이 많이 자라는 도시(나가르)’라는 의미로 말이다.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그럴듯한 설명이다. 이 풀로 만든 돗자리는 일반 볏짚으로 만든 것보다 비싼 가격에 팔리며, 이 풀의 종교적 가치를 아는 서양의 수행자들을 위해 현재 인도와 네팔에서는 이 풀로 짠 작은 돗자리를 수출하고 있을 정도다. 

이렇듯 현재까지도 이 풀의 종교적 유용성을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는 이 풀이 갖는 특성에서 기인할 것이다. 이 풀은 번식이 빠를 뿐만 아니라 땅속 깊이 단단히 뿌리를 내려 쉽게 뽑히지 않는 특성이 있다. 따라서 고대 인도 문헌에서 이 풀은 크샤트리야의 단호한 결단력과 강한 의지를 의미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 풀의 성분은 분노를 가라앉히고 몸과 마음을 가라앉히는 진정 효과가 있어서 약용으로도 사용했다. 이러한 약성 때문에 이 풀은 오래전부터 정신적인 견고함과 집중이 요구될 때 필요한 풀로 여겨졌다.  

따라서 석가모니께서 보리수 아래에 쿠샤 풀을 깔고 무상정각을 이룰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결단을 보였던 것은 그 풀이 당시에 가졌던 기능과 의미를 그대로 보여준다. 스승의 착좌는 쿠샤 풀과 같은 강인한 결단과 의지를 상징한다. 또한 그의 집중된 마음이 어떠한 외부의 영향에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스승은 마침내 그것을 이루어냈다. 

 

사슴

쿠샤 풀 위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스승은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전할 대상을 떠올린다. 그는 다섯 명의 도반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을 찾아 이시파타나로 간다. 이시파타나는 스승께서 과거의 도반들에게 처음 설법을 하신 장소, 즉 지금의 바라나시 근처에 있는 녹야원이다. 녹야원은 므리가 바나mr.ga vana, 또는 므리가 다바mr.ga dava 등으로 부른다. 녹야원은 사슴이 뛰노는 동산이라고 미화할 수 있지만, 실은 그렇게 단순한 의미를 갖는 곳은 아니다.

오히려 이곳은 사실 사슴 사냥터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가 사슴이라고 부르는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므리가mr.ga라고 하지만, 이것은 사실 사슴뿐 아니라 영양이나 가젤 등의 동물을 포괄적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어떤 때는 네발 달린 동물을 통칭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 므리가는 사슴과 같이 ‘사냥’의 대상이 되는 동물들, 즉 사냥감을 뜻하면서 죽음의 놀잇감을 의미하기도 한다. 더구나 ‘므리가 바나mr.ga vana’는 단순히 ‘사슴이 사는 숲’이라기보다, 왕이나 귀족들이 사냥놀이를 하는 사냥터를 가리킨다. 따라서 녹야원은 본래 사냥터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스승이 이 곳을 최초의 설법장소로 택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사슴은 고대 인도의 종교적 서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어떤 극적인 사건의 발생은 많은 경우 사슴이 계기가 된다. 예를 들어, 라마야나에서 다샤라타 왕은 사슴 사냥을 나갔다가 젊은 청년을 사슴으로 오인해 활을 쏴서 죽이게 된다. 그 대가로 다샤라타는 그 청년의 부모로부터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죽어갈 것이라는 저주를 받게 되고 실제로 그렇게 죽는다. 또한 라마가 시타를 잃게 되는 직접적 계기는 라바나의 속임수로 인해 황금 사슴을 사냥하기 위해 시타를 집에 두고 숲속으로 들어가면서 일어난다.  

불교에서도 이러한 사례는 예외가 아니다. 불교의 성지 녹야원은 그 기원을 사슴에 두고 있다. 중국 구법승 현장(602~664)은 녹야원의 기원을 자타카(본생담)에서 찾는다. 그에 따르면 녹야원은 부처님이 전생에 사슴이었던 시절의 일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승께서 사슴이었을 전생 당시, 사슴 고기와 사냥을 좋아하던 왕이 있었는데, 백성들은 왕의 사슴 사냥에 빈번히 동원되었다. 그러자 백성들은 사슴들을 한 숲에 몰아놓고 왕이 사슴 사냥을 할 수 있게 했다. 어쩔 수 없이 그 사슴의 무리들은 차례로 죽음의 순서를 정하고 왕의 사냥감이 되기로 결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암사슴의 차례가 되었다. 그 암사슴은 새끼를 잉태하고 있었기에 죽음의 순서를 바꾸어주기를 바랬으나 사슴들은 이를 거부한다. 사슴이었던 스승은 이를 알게 되자, 그 암사슴을 대신해 자신이 왕의 사냥감이 되기로 결정하고 왕에게 가서 암사슴과 자신이 순서를 바꾸었노라고 전한다. 왕은 이 말에 감동하게 되고 곧 사슴 사냥과 사슴 고기를 금지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 숲 속에서는 사슴들이 어떠한 피해도 입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배려하게 된다.  

이러한 기원으로 인해, 스승의 초전법륜을 의미하는 조각을 표현할 때 대개 불상의 단좌 아래는 사슴으로 장식한다. 이 사슴 장식은 초전법륜의 장소인 녹야원을 의미한다. 두 마리의 사슴이나 영양이 가운데 법륜을 마주보도록 조각된다. 니그로다미가 자타카Nigrodhamiga Jātaka에 나오는 위의 전생 이야기는 생존을 위한 전투로부터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는 장소를 말하고 있지만, 더 넓게는 삶과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암시한다. 

앞에 말한 바처럼, 므리가mr.ga는 단순한 사슴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사냥의 대상, 죽음을 기다리는 대상 전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므리가는 인간을 포함한 다리 달린 짐승 전체를 의미한다. 인간도 시간의 사냥으로부터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스승께서 이 죽음의 공간인 녹야원을 최초의 설법 장소로 선택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스승은 시간의 사냥놀이를 폐쇄하고 죽음과의 평화와 공존, 즉 해탈을 추구했던 것이다. 불교 역사의 극적인 서사는 바로 이 장소, 사슴 사냥터에서 시작한다.                       

심재관

동국대학교에서 고대 인도의 의례와 신화에 대한 연구로 석·박사를 마쳤으며, 산스크리트어와 고대 인도의 뿌라나 문헌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필사본과 금석문 연구를 포함해 인도 건축과 미술에도 관심을 확장하고 있으며, 2006년부터 오스트리아, 파키스탄의 대학과 국제 필사본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인도 뿌네의 반다르카 동양학연구소 회원이기도 하다. 저서 및 역서로는 『탈식민시대 우리의 불교학』, 『세계의 창조 신화』, 『세계의 영웅 신화』, 『힌두 사원』, 『인도 사본학 개론』 등이 있다. 금강대학교 HK 연구교수, 상지대학교 연구교수로 재직했으며, 동국대학교와 상지대학교 등에서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