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인터뷰]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 선원장 월암 스님

무문관으로부터 온 중진 수좌의 소식

2017-04-19     김성동

무문관으로부터 온 중진 수좌의 소식
문경 한산사 용성선원 선원장 월암 스님

동안거 해제를 앞둔 날, 문자가 왔다. 백담사 무금선원無今禪院 무문관無門關에서 월암(62) 스님이 주변의 스님과 ‘불자 도반’에게 보낸 것이다. “… 지난 삼동에 좁은 3평 방안에서 반조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보내며, ‘매 순간 깨어 있어라. 그리고 모든 생명을 나와 같이 사랑하고 섬겨라.’는 경구로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아직도 아득하기만 합니다. …” 무문관. 스스로 들어간 감옥監獄이다. 중학교 2학년에 출가, 승납이 47년에 이른 납자衲子의 반조反照다. 익숙한 경구지만, 조계종 중진 수좌인 월암 스님이 꺼냈기에 다르게 다가왔다. 문학과 철학, 불교에 빠져 있던 열다섯 소년이 은사의 게송을 듣고 마음에 격발이 일어나 출가했고, 전국 제방에서 정진하며 뒤늦게 공부에 마음을 일으켜 중국 북경대학교에서 ‘돈오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귀국, 참선과 강의로 20년을 이어온 이력이 그러했다. 

 

|    세상 모든 인연을 섬겨야겠구나

스님을 만난 때는 동안거 해제 후 6일째인 지난 2월 17일 오후 1시. 스님은 해제 후 법주사에서 100여 명의 수좌가 참석한 담선법회를 3일간 이끌었고, 서울 강남 참불선원 ‘부처님 점안 대법회’에 참석차 올라왔다. 은마아파트 앞 카페에서 만난 스님은 무문관을 나올 때 모습 그대로 장삼과 걸망 차림이었다. 

- 절에는 들르지 못하셨나봅니다.

“예. 아직 못 갔습니다. 해제 후에도 계속 밖으로 돌았네요.(웃음)”

- 무문관을 처음 들어가셨는데, 왜 무문관이죠?

“오래전부터 들어가고자 했는데, 많은 인연들 때문에 쉽지 않았습니다. 이번에 마음 단단히 먹고 들어갔습니다. 나를 반조하고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 어떠셨나요?

“편했습니다. 바깥으로 향한 것을 다 접었으니까요. 여기가 무문관이 아니고, 저 바깥이 무문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구 없는 삶에서 탈출할 수 없으니까요. 여긴 공간의 제약도 무문이니까 자유롭죠. 오히려 무문의 낙을 즐기니까 미안했습니다.”

- 왜 미안하죠?

“내가 이렇게 무문의 낙을 만끽하고 있는 것은 수많은 인연의 공덕 때문입니다. 그동안 미워했던 많은 이들에게 다 미안했습니다. 감사만 남았고, 은혜만 남았습니다. 하루에 한 끼, 오전 10시 50분에 나오는데, 하루는 눈이 아주 많이 왔습니다. 공양간에서 무문관이 6백 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데 후배들이 그 눈길을 새벽부터 치우면서 공양을 갖고 왔는데, 정말 대단히 미안하고 죄송스러웠습니다. 내가 뭔 공부를 한다고 …. 허투루 시간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두 가지가 생각났습니다. 내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이 은혜를 사랑으로 갚아야겠구나. 모든 세상의 인연을 사랑과 자비로 섬겨야겠구나. 또 하나는 내가 공부해온 것으로 철두철미하게 깨어 있어야겠다는 마음이 사무쳤습니다. 이제야 철든 것입니다.(웃음)”

- 많은 공부를 해 오신 스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새삼스럽게 들립니다.

“그동안 불교 안에서 자비와 사랑을 말했는데, 그것이 허물어졌습니다. 불교라는 것조차도 경계가 없습니다.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라고 했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도 그렇습니다. 거기에 무슨 허물이 있겠어요. 부처와 부처가 만나면 무슨 담이 있고, 허물이 있고, 어떤 경계가 있겠어요. 그럼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본래 부처로 대하는 것이 진짜 불공이 아닌가, 이론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생겨났습니다.”

- 이전에는 그런 마음이 없었다는 뜻인가요?

“전에는 경계에 부딪치곤 했는데, 지금은 경계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어느 정도 세상을 품을 정도가 조금은 된 것 같습니다.”

- 무문관 규칙 중 하나가 묵언默言입니다. 

“제가 평상시에 법문과 강의를 많이 했습니다. 묵언으로 2개월 지난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꿈속에서 벙어리가 되어 있더군요. 퍼뜩 놀라서 깨 ‘아, 아’ 하기도 했습니다.(웃음) 그래서 옆방에 들리지 않게 아주 작게 염불했습니다. 고요한 곳에서 아미타불 정근하니 마음속에서 염불이 저절로 일어나더군요. ‘염불자시수念佛者是誰. 염불하는 자가 누구인가.’ 염불선의 화두인데, 5분, 10분만 아미타불을 불러도 3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그 소리가 너무 아름답고, 여기가 극락세계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주 너무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    경계와 독대하다

- 하루 일과는 어떠한가요?

“그동안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는데, 저에게 3개월 안거는 쉬는 것입니다. 3개월 동안 열심히 활동하다가 안거에서 3개월 정진하면 아주 편안합니다. 그렇게 계속 안거를 해왔습니다. 이번 무문관에서는 어떤 계획도 없이 들어갔습니다. ‘휴헐休歇’이라고 하죠. 쉬고 쉰다. 몸과 마음을 다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밥 먹고, 자고, 참선하고, 108배하고. 망상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놔두고. 이렇게 열흘간 지냈습니다. 습習이란 것이 무섭습니다. 또 하루에 8시간, 10시간을 앉게 됩니다. 평소 습관이 나오죠.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제약이 없으니 편했습니다.”

- 혹, 책은 갖고 들어가셨나요?

“딱 한 권 갖고 갔습니다. 사조四祖 도신(道信, 580~651) 스님이 쓴 『입도안심요방편법문入道安心要方便法門』입니다. 근데 안 봤습니다.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 이런 말하기가 건방지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다 경전이었습니다. 눈이 내리고, 새가 날아다니고, 해가 뜨고, 달이 뜨고, 별이 반짝거리고. 방안에 있는 것조차 『화엄경』이었습니다. 글자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굳이 책을 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 무문관에서 기억나는 일이 있었는가요?

“바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경계를 대합니다. 밖에서는 경계와 독대가 잘 안됩니다. 무문관에서는 경계와 독대가 됩니다.”

- 경계와 독대가 된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요?

“바깥에서는 일상이 바쁘게 돌아가니까, 경계를 깊이 천착하기 어렵습니다. 무문관 안에서는 더 선명하게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내가 일상 속의 경계를 독대할 수 있습니다. 장애가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경전과 마음, 화두 공부가 순일하게 될 때가 있고, 안될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길이 확연히 보입니다. 여유가 생기고 편안해졌습니다.” 

- 스님은 10년 전 사석에서 신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늘 일대사의 중압감이 떠나질 않았는데, 오십이 넘어가면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일이 많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한결 편해졌으니까 벌떡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제가 공부가 다 되지 않았으니까, 건방진 소리를 하지는 못하겠지만, 이제는 제가 부처님 품 안에 있다는 것을 확연히 알았으니, 편해졌습니다.”

- 스님 말씀을 들으니, 불자들이 무문관에 들어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무문은 문이 없으니 세상이 하나인 것입니다. 육근六根이 자유자재한 것이 무문입니다. 무문관에서 번뇌망상과 오욕락에 빠져 있으면 무문관이 아니겠죠. 갇혀 있다고 무문이 아닙니다. 곰이 겨울잠 자는 것과 같죠.”

 

|    중국에서 공부한 선불교

스님은 20대에 용성(龍城, 1864~1940) 스님의 제자인 동헌(東軒, 1896~1983) 노스님을 시봉했다. 30대 초반까지 제방 선원에서 정진하면서 얼굴 전체가 마비되는 병고가 2번이나 찾아왔다. 몸은 바짝 말라갔다. 중국으로 넘어가 몸을 치료하고 중국 내 선방을 돌아다녔다. 내친 김에 북경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밟았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 교재를 통째로 외웠다. 스님의 표현으로 “머리가 돌기 직전까지 가봤다.” 지금도 스님이 “중국철학, 노자, 장자, 공자, 선불교는 원고 없이 3년은 강의할 수 있다.”고 한 것은 그때 중국에서 공부한 경험 때문이다. 중국의 불학원에서 강의도 하고, 선원에서 정진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60대 이상의 스님들이 없다. 대부분 젊은 스님들이다. 

- 중국에서 선을 이해하는 수준은 어떠한가요?

“20년 전에는 아주 낮았습니다. 지금은 참선 붐이 일어나서 선방에 젊은 수좌들이 많습니다.”

- 중국의 근대 고승인 허운 스님이나 태허 스님은 어떤 분으로 인식하고 있는가요?

“대단합니다. 거의 생불生佛 수준이죠. 중국에서는 활불活佛이라고 합니다. 그분들의 제자들도 선지禪旨가 있습니다. 그분들은 백장청규 영향이 남아서 농사를 짓습니다. 지금 이름 있는 스님들은 대부분 그분들의 제자입니다. 선방에서 묵묵히 정진하는 젊은 수좌들이 앞으로 중국불교를 크게 일으킬 겁니다. 중국 정부에서도 지금 이 시대의 나란다 대학을 만든다고 준비 중이고, 신도를 5억 명, 스님을 1백만 명으로 끌어올리려고 하니까요. 출가 연령도 33세까지입니다. 중국불교는 희망적입니다.” 

- 우리 선방과 중국의 선방을 비교하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요?

“우리는 정형화되어 있고 형식적입니다. 또 여법하고 세련되어 있습니다. 중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은 계율정신이 살아 있습니다. 철저히 계율정신에 입각해 수행하고 교화합니다.  

- 스님께서는 우리나라 선원이 선과 교를 함께 참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또 실제 지리산 벽송사에서 벽송선회碧松禪會를 열어 많은 수좌스님들이 거쳐 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선회를 멈춘 상태입니다. 한산사에서 선회를 열 계획은 없는가요?

“아직 한산사는 도량 정비가 갖춰지지 않았습니다. 선회가 되려면 최소한 50~100명의 대중이 모여 이론과 실참을 겸비하는 수행을 해야 하는데, 아직 도량이 정비되지 못했습니다. 제가 불사에는 숙맥이어요. 다른 도량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겠죠.”

- 참선 3개월 했으면, 1주일은 봉사해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선의 종지를 보면 마땅히 해야 합니다. ‘견성성불 요익중생見性成佛 饒益衆生’이 선의 종지입니다. 참선하는 것이 견성성불이라면 요익중생이 있어야 합니다. 대중들의 공덕으로 선방에서 정진하니까, 수행하는 공덕을 세상에 회향해야 합니다. 불교 본래의 모습이고, 선의 모습입니다.”

- 스님의 말씀을 수좌스님들께서 공감하고 계신가요?

“많이 공감하죠. 그런데 아직 실천에 옮기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제 법주사 담선 법회에서도 행동으로 옮기자는 강의를 했는데요. 한국불교가 수행이 부족해서 쇠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제 후에 불교 신도가 3백만이 줄었다고 들었습니다.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생에게 회향을 어떻게 하는가,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섬기는가, 안도현 시인의 시에 나옵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우리가 이름 없는 사람, 인연 없는 어려운 사람을 위해 뜨거운 적이 있었는가, 한국불교가 감동이 없습니다. 고고하고 신비한 모습을 말하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나옹(懶翁, 1320~1376) 스님의 행선축원行禪祝願도 그렇습니다. 내 이름을 듣는 모든 이가 삼악도를 면하고, 내 모양을 보는 모든 사람이 해탈을 얻어지이다.(聞我名者免三途 見我形者得解脫) 이런 바라밀행이 한국 선불교의 특징입니다.”  

 

|    참선했으면 봉사해야

- 수좌스님들이 많은 반성을 하겠습니다. 

“2천여 명의 스님들이 산문에서 참선 수행을 하는 것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마존이 지구의 허파가 되려면 아마존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과연 우리 2천 명이 수행하는 향기가 한국사회에 미치고 있는지 반성해보자고 했습니다. 나옹 스님은 서민 출신이어서 애민愛民 정신이 살아 있습니다. 옛날에 참선하기 전에는 행선축원을 했습니다. 지금 선방에서는 안 하죠.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수좌스님들이 고개를 끄덕하지만, 머리에서 가슴과 손발로 옮기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겁니다. 이제까지 주는 것 받아먹고 하는 것이 습이 되었으니까요. 앞으로 많이 달라져야 하겠죠.”

- 스님은 수좌스님들께 법문하면서 “꿈에서 깨라.”는 말을 자주 하십니다. 일반 신도들은 꿈이 잘 깨지지 않습니다. 그런 재가자들에게는 어떤 말씀을 해주어야 법의 안목이 넓어질 수 있을까요?

“그 부분이 딜레마입니다. 신도들에게도 법문하고 강의를 많이 하지만, 어떤 때는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면 일반 신도들은 생사해탈이 간절하지 않아요. 너무 먼 이야기입니다. 생사해탈이 꿈 깨는 것인데요. 악몽을 꾸지만 단꿈에 젖어 있습니다. 칼끝에 꿀이 발려 있지만, 혀에서 피가 흘러도 그 꿀의 달콤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금 시대가 오욕락五欲樂이 넘치기 때문에 부처님 법이 전해지기 어렵습니다. 전에는 교화敎化하면 가르칠 교敎가 중심이었는데, 지금은 화할 화化가 중심이어야 합니다. 우리 스님들이 토굴에서 빈민굴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대만의 증엄 스님(대만 자제공덕회 회주)처럼 세상을 섬기는 자비로운 불교가 되어야 합니다. 증엄 스님은 태풍으로 교회와 성당과 이슬람 사원이 사라지자 다시 세워줬죠. 대만 불교의 저력이 이겁니다.”

- 불교 안의 자비에서 불교 안팎의 자비로 변화해야겠습니다.

“그렇죠. 경계가 허물어진 자비를 행동으로 보여줄 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교화입니다. 우리 수좌들이 해제한 후에는 여행을 갈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로 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스님들도 신도들도 이상은 높지만, 실천행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폐해가 심해도 발전하는 것은 30% 정도가 그리스도 정신으로 희생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불교는 부처님의 철저한 자비정신으로 살아가는 그 1%가 없는 겁니다.”   

- 1%가 없다. 

“예. 출가자가 없다, 신도가 줄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부처님의 철저한 자비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종단의 어른스님들도 주장자 들고 뜬구름 잡는 법문 하지 말고, 이 시대에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로수가 되는 법문을 해야 합니다. 종단 지도부 스님들도 사부대중에게 존경을 받고, 국민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 무엇보다 종단 지도부 스님들이 역할을 잘 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합니다. 임진왜란 때 서산(西山, 1520~1604) 스님이 그 많은 스님들의 비판을 무릅쓰고 승병을 일으켜서 국난에 동참했습니다. 그때 반대파가 많았습니다. ‘수행자들이 순수하게 수행해야지 왜 살생하면서 전쟁터에 나가는가.’ 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나간 것은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입니다. 역설적으로 자비를 위해 칼을 들었습니다. 서산 스님의 격문檄文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이판은 가부좌를 풀고 붓을 던지고, 사판은 목탁과 호미를 놓고 국가와 민족과 백성의 고통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요익중생에 동참하라.’ 지금이야말로 한국불교는 대내외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선방에 있는 분들은 가부좌를 풀고, 행정을 맡고 있는 분은 볼펜을 던지고 나서야 합니다. 그래야 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종단 지도자들이 먼저 해야 합니다. 이제 저도 책임질 위치에 있습니다.”  

 

|    현장선을 하라

-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니 한국선의 가까운 미래를 긍정적으로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경책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경책을 하는 자가 경책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받는 자는 그 경책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합니다.”

- 경책이 사라졌다면, 그 경책을 다시 일으키거나, 경책을 대체할 시스템이 있어야 한국선의 중흥과 재도약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과도기인지, 경책하는 이도, 시스템도 부족합니다. 좀 어중간한 상태입니다.”

- 가까운 미래가 그렇다면, 스님의 후배들이 중진이 될 때는 어떤 모습일까요?

“물극반본物極反本이라고 합니다. 요즘말로 바닥을 쳐야 올라갑니다. 궁해야 통합니다. 거의 바닥에 왔습니다. 바닥 치고 올라가야죠. 부처님도 그러셨죠. 자주 모여 법을 논하라. 공부 분위기가 살아나야죠.”

- 한국사회에 많은 사람들이 일하느라 바쁩니다. 이런 일하는 사람이 선禪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낼 때 스님께서는 어떻게 말씀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현장선現場禪을 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현장선은 있는 그 자리, 집이나 직장이나,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선을 하는 겁니다. 요즘은 선의 기초는 관심만 있으면 배우기 쉽습니다. 참선 명상하는 것은 인터넷을 통해서 혼자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잘 안 되는 이유는 시간이나 분위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 날 때 하는 것입니다. 먼저 5분 명상을 해보세요. 바쁘지만 5분 정도 시간을 내지 못하겠어요? 처음 ‘다섯 오五’로 시작하지만, 점차 ‘깨달을 오悟’가 됩니다. 선은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默動靜’입니다. 장소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5분으로 습을 익히면 점차 늘어나게 됩니다. 책상에 앉아도 되고, 가부좌도 됩니다. 처음부터 갖춰서 참선하려면 하세월何歲月입니다. 내가 마음 내었을 때 기초적인 것을 배우고, 현장에서 곧바로 5분 정도 스스로 실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하루에 5분 참선하면 정말 달라집니다. 내가 하면 좋으니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합니다. 그때 그는 비로소 참선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분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 스님께서 불교사 속에서 영향을 받으신 분이 있다면 어떤 분이고, 어떤 점이 영향을 끼쳤는가요. 

“(잠시 생각에 잠기면서) 너무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시간과 공간으로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만, 도신 스님의 ‘수일불이守一不移’ 법문이 있습니다. 하나를 지켜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 법문에 거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법문을 듣고 내 근심걱정이 사라졌습니다. 『서장』을 쓴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 스님입니다. 10년간 귀양 속에서 재가수행자를 위한 신심과 열정, 눈물겹죠. 감산덕청(憨山德清, 1546~1623) 선사. 이분도 귀양을 가셨습니다.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승가 대중을 일깨우고, 민중들에게 끊임없는 사랑과 애정을 보내는 애민정신. 또 우리나라의 함허득통(涵虛得通, 1376~1433) 선사. 억불의 시대에 맞서 활달자재한 법문는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용성 스님. 선교율을 아우르는 회통법문과 승가를 개혁하고 불교를 중흥해야겠다는 그 몸부림. 이런 분들께 주로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 보조(普照, 1158~1210) 스님께도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제 ‘월암月庵’이라는 호가 보조 스님에게 따왔습니다. 보조 스님이 정혜결사를 하면서 암자를 두 개 지었는데, 불일암과 조월암입니다. 훗날 늙으면 조월암을 지어서 기거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