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삶의 반려에서 수행의 도반이 된 동물

2017-04-19     서재영

삶의 반려에서 수행의 도반이 된 동물

“이런 짐승만도 못한 인간!” 흔히 나쁜 사람을 향해 내뱉는 말이다. 여기에는 동물은 인간보다 못한 존재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무심코 내뱉은 이 말에는 동물에 대한 전통적 형이상학의 관점이 배어 있다. 그렇다면 동물보다 인간이 우월하다고 보는 근거는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어능력을 꼽았다. 언어능력 때문에 인간은 도덕·정의·선악 등을 사유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    삶의 반려伴侶로서의 동물

인간과 동물을 구별 짓는 이런 사유는 서양의 철학과 종교전통에서 더욱 공고화된다. 한 예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동물은 영혼이 없으므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데카르트 역시 동물은 불멸의 영혼이 없다는 이런 입장을 수용한다. 심지어 그는 동물은 기계적 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충격적 인식을 하고 있었다.

동물은 이성과 언어능력이 없고, 영혼이 없다는 인식은 동물과 인간의 차별을 공고히 하고, 동물 학대나 살상을 정당화한다. 따라서 동물권이나 동물의 도덕적 지위를 논할 때 동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생태철학자들이 모든 생명체는 인간과 같이 생존하고 번성할 권리가 있다는 ‘생물 평등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이 평등하다는 것은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물론 불교에서도 동물은 나쁜 업 때문에 떨어지는 축생도畜生道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것은 몸의 형태와 업業에 따른 현상적 차이일 뿐 근원적이고 불가역적 차별은 아니다. 불교에서 보면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으며, 인간과 똑같이 육도六道를 윤회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이런 동물관은 수행자들의 삶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선종은 교종과 달리 산간벽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자연히 수행자들은 동물들과 접촉이 빈번해졌고, 동물과 얽힌 내용도 풍부해졌다. 예를 들어 위산潙山 선사는 사람의 발길이 없는 대위산에 산문을 개창했다. 『전등록』에 따르면 위산 선사는 나무 열매를 먹고, 원숭이를 벗 삼아 수행했다고 한다.

심지어 조과鳥窠 화상은 나무 위에 둥지를 틀고 까치와 함께 살았다. ‘조과’라는 호는 그의 이런 삶에서 유래했다. 행인行因 선사도 동물과 공존이라는 이력을 가지고 있다. 석굴에서 혼자 수행했던 그의 곁에는 항상 사슴과 금낭조들이 머물고 있었다. 우두종의 개조였던 법융法融 역시 베옷 한 벌만 걸치고 산에서 혼자 살았다. 어느 날 도신 선사가 찾아오자 자신의 암자로 스님을 안내했는데, 『조당집』에 따르면 “호랑이와 이리가 앞뒤로 둘러서 있고, 사슴 떼가 사방에서 뛰어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내용으로 볼 때 수행자들은 동물을 삶의 애환을 함께 나누는 반려伴侶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수행자들은 깊은 산속에서 자연환경에 동화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때로 수행자들은 동물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사는 단계를 넘어 동물로부터 도움을 받거나 동물을 도와주는 대목도 있다.

예를 들어 신라의 범일梵日 국사는 중국에서 구법여행을 하다가 회창의 파불을 만났다. 관군을 피해 숨어다니던 국사는 기력이 쇠진해 움직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동물들이 가져다준 음식으로 위기를 넘겼다고 한다. 무정설법으로 유명한 혜충慧忠 국사도 평생 옷 한 벌, 그릇 하나로 검소하게 생활했다. 그런 선사를 흠모한 사람들이 올린 공양미를 도둑들이 훔쳐가려 했지만 호랑이가 이를 지켜 주었다고 한다.

|    수행의 도반道伴으로서의 동물

선 문헌에서 동물은 수행자를 돕고 외호外護하는 반려로 그려지고 있다. 이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주목할 대목은 수행자들은 동물들을 단순한 삶의 반려로 보지 않고 종교적 영역을 공유하는 존재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혜충 국사는 동물을 함께 수행하는 도반道伴이나 제자로 생각했다.

어느 날 장손長遜이라는 관리가 찾아와 제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때 국사가 선상을 탁탁 치자 호랑이 세 마리가 나타났다. 혜충의 제자는 호랑들이었던 셈이다. 선각善覺 선사도 호랑이를 제자로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동물을 제자로 생각했다는 것은 동물도 진리를 아는 존재로 인식했음을 의미한다. 동물은 삶의 반려를 넘어 정신적 관계로까지 승화되고 있는 셈이다.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는 『무문관』 제1측으로 수록된 유명한 화두이다. 수행자는 ‘무無’ 자에 의지해 의심을 일으키고, 깨달음의 문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개에게 불성이 없다는 것이 화두가 되는 까닭은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는데 왜 없다고 했을까?”라는 절박한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자 화두는 오히려 동물의 불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마조의 법을 이은 동사東寺 화상이 배휴와 함께 불전에 들어갔는데 참새가 불상에 앉아 똥을 누고 있었다. 배휴가 저 참새에게도 불성이 있냐고 묻자 동사는 있다고 했다.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녔다는 불성론에서 보면 인간과 동물의 차별성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동물을 미물로 보지 않고 도道의 삶을 사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다.

당대唐代의 문장가 황노직은 유정惟淸에게 보낸 시에서 “흰 암소와 살쾡이도 마음이야 그대로 부처[心卽佛]”라고 했다.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마조의 ‘즉심즉불卽心卽佛’이 인간을 넘어 동물에게로 확대되는 대목이다. 동물은 비록 그 형상이 인간과 다르지만 본성은 인간, 나아가 부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과 동물이라는 위계적 차별은 해체되고 만다.

수행자에게 동물은 때로 인간을 능가하는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남전南泉은 대중을 향해 ‘삼세의 제불은 모르지만 살쾡이나 암소는 안다.’고 했다. 동물들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살아가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수행자들은 동물의 이와 같은 자연적 삶을 높이 평가한다. 이를테면 게리 스나이더가 ‘야성(Wildness)’이라고 부르는 자연의 본성을 동물을 통해 본 것이다.

연수延壽 선사가 하루 한 끼만 먹고 60일 만에 『법화경』을 모두 암송하자 염소들이 감동해 무릎 꿇고 들었다는 대목도 흥미롭다. 동물이 법을 알아듣는다는 인식은 그들을 위한 설법도 가능케 한다. 위산은 “오늘은 까마귀를 위해 상당하여 설법하리라.”고 했고, 사비師備는 제비 소리를 듣고 “실상을 깊이 논하고 법요를 훌륭하게 설한다.”고 했다. 동물도 도道를 아는 존재이며, 그들도 법을 설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만약 진리가 언어와 사유의 영역 속에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가 그랬던 것처럼 동물은 진리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은 진리란 언어와 인위적 사유를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세계에 있다고 본다. 진리를 감싸고 있던 이성과 언어적 울타리가 해체되는 순간 동물도 진리의 지평에 서게 됨은 물론이다.

전통적 형이상학에서는 인간만이 불멸의 영혼을 가졌다고 보았다. 영혼이 없다는 것은 사후 세계를 박탈하는 것이며, 일회적 삶으로 끝나면 가혹한 폭력이 가해져도 되갚을 기회가 사라진다. 이런 사유 속에서 동물에 대한 폭력은 거리낌 없이 행해졌다. 그러나 불교의 윤회관은 동물에게도 인간과 동일한 사후 세계가 부여되며, 업력에 따라 인간과 동물은 상호 전환된다. 동물은 전생의 나의 부모이기도 하며, 반대로 인간이 전생의 동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다른 생명을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 태도는 이런 인식을 통해 확립된다.

수행자가 동물과 함께 살았다거나, 불성을 지니고 있고, 법을 설한다는 기록은 과장이나 신화적 내용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생태적 함의를 읽어내면 상황은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선의 대표적 문헌을 통해 이런 내용들이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설사 신화적 내용일지라도 중심 텍스트로 수용되면서 동물도 불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유는 성문화成文化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이런 내용은 수행자들의 정신세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수행전통 속에 담겨 있는 동물에 대한 내용이 주는 행간의 의미일 것이다.     

서재영
동국대에서 『선의 생태철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KARA에서 펴낸 『동물, 아는 만큼 보인다』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현재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조계종 환경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