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부처님 품에 깃든 동물들

2017-04-19     권중서

부처님 품에 깃든 동물들

여유로운 마음으로 사찰을 참배하다보면 호랑이, 토끼, 용, 원숭이, 사자, 코끼리, 사슴, 소, 돼지, 게, 물고기 등등 온갖 동물들의 형상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동물들은 대부분 부처님이 수많은 생을 거듭하는 동안 여러 가지 동물의 몸을 받아 선행善行과 공덕功德을 쌓은 전생 이야기인 『본생경本生經』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불보살님과 불자들을 보호하거나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성취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또한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중생들에게 복을 짓도록 권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부처님은 중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을까? 양산 통도사 명부전 벽화에 나타난 거북이와 토끼, 용은 『잡보장경』 ‘큰 거북의 인연’ 편의 이야기로 부처님의 중생사랑을 느끼게 한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라가 토끼 간을 빼 먹으려 용궁으로 데려가는 장면이라 말하지만, 살생과 남을 속이는 일을 금하는 불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 벽화는 은혜를 원수로 갚은 제바달다提婆達多의 이야기로 자신을 해치려는 모든 무리들까지 자비로 감싸 안는 부처님의 중생사랑을 보여준다. 경전 내용에서 큰 거북이인 부처님은 자신을 해친 불식은不識恩, 즉 토끼로 표현된 중생을 업고 용왕의 길 안내를 받으며 피안의 세계로 힘차게 나아간다. 천년을 산다는 거북이는 부처님의 중생사랑이 영원하심을 표현하고, 등에 태운 토끼는 어리석은 사람들에 비유한 이 벽화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명부전에서 참회하면 극락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특별한 동물 벽화이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동물들은 얼마만큼 존경하는 마음을 내었을까? 이번엔 부처님께 끝없는 존경심을 나타낸 원숭이에 대하여 알아보자. 강화 전등사 대웅전 추녀 밑 네 귀퉁이에 있는 4마리의 원숭이가 바로 그들이다.

 

『육도집경』에서는 “원숭이 왕이셨던 부처님은 500마리의 원숭이 무리들을 구하고자 국왕에게 ‘벌레 같은 몸뚱이의 썩어질 살이오나 가히 국왕에게 바치면 하루 아침의 반찬이 될까 한다.’ 말하여 국왕을 감동시킨 결과 국왕은 과일 밭을 원숭이들에게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원숭이들은 전생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이생에까지 대웅전 지붕을 받들어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원숭이 조각을 “도편수의 돈을 떼어먹고 줄행랑을 친 술집 작부의 벌거벗은 모습”이라 말한다. 대웅전을 짓는 일은 모든 정성을 기울여야 하는데 벌을 받아야 하는 대상을 조각한다는 것은 불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얄팍한 생각이 만들어 낸 그런 말을 재미있게 듣는 사람들이 있어 안타깝다.  

또한 경북 경산 환성사 보단寶壇에도 원숭이가 여의주를 머리에 이고 부처님께 공양하는 모습이 있다. 다른 면에는 원숭이가 온갖 과일을 공양하기 위하여 머리에 이고 있는 조각이 있다. 원숭이의 정성은 그릇 주변을 광채로 빛나게 한다. 원숭이들이 부처님께 꿀과 과일을 공양하여 다음 생에 천상의 세계에 태어났다는 경전 이야기에서는 미물도 정성들여 공양을 올린다. 아마 인간들은 그 여의주를 자기 자신에게 줄 것을 바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환성사 보단의 원숭이 모습은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질책하려는 듯 해학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찰 입구 금강문에서 만나는 동물이 사자와 코끼리이다. 사자는 부처님의 지혜를 상징하는 동물로 『신화엄경론』에 “문수가 사자獅子를 타는 것은 미혹을 끊어 빼어난 경지에 도달하였음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보살이 처음 내는 금강과 같은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일체의 모든 법을 분별하여 분명하게 깨닫는 것이며, 항상 정진을 더하여 남은 번뇌가 없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또 금강문에는 부처님의 실천행을 나타내는 코끼리가 있다. 『신화엄경론』에 “보현이 향상왕(香象王, 코끼리)을 타는 것은 행行에 질서가 있어 위덕威德이 됨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금강문에 있는 사자와 코끼리는 불자들이 사찰에서 번뇌를 끊고 지혜를 배운 후 집으로 돌아갈 때는 중생을 다 건지고 불도를 이루겠다는 사홍서원을 잊지 않도록 해준다.

수많은 용들이 부처님을 지키고 사부대중들을 보호하겠다고 나름대로의 각오가 굳건한데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보단의 용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청룡·황룡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끌어안고 몸을 꼬며 살갑게 지내는 모습은 사람들도 서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피카소의 그림인가? 아니면 초등학생의 그림인가? 용의 위엄이 사라지니 더욱 친근하다. 동그랗게 뜬 눈은 무슨 사고라도 칠 듯 장난기가 흐르고, 점박이 무늬 비늘로 아예 단장을 하였다. “그래도 나는 부처님을 지키는 용”이라며 흰 뿔을 자랑한다. 용이 이 정도 되면 동네 아이들과 함께 노는 이웃집 강아지 같아 장난치는 여유가 있어 좋다. 이처럼 부처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늘 중생들을 편하게 해주셨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중생들은 차이는 있어도 차별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재미난 그림이 있다. 영주 부석사 야단법석 불화는 뱀의 신 마후라가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참으로 해학적이다. 모든 대중이 부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가운데 어쩐 일인지 마후라가만은 얼굴을 반대로 돌리고 다른 곳을 바라본다. 아뿔싸! 이걸 어쩌나? 입안의 용도 부처님 말씀을 듣겠노라며 마후라가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용은 몸을 뒤틀고 마후라가에게 원망이라도 하듯 화난 얼굴로 쳐다본다. 갑자기 당한 마후라가는 놀란 눈빛으로 얼굴을 돌려 용을 바라본다. “야! 입안으로 다시 들어가! 여기는 네가 끼일 자리가 아니야.” “왜요, 저는 부처님 말씀을 들으면 안 되나요?” 막무가내로 따지듯 대드는 용과 전전긍긍하는 마후라가의 모습이 참으로 재미있다. 부처님의 말씀은 누구라도 차별 없이 들어야 한다는 용의 당찬 모습은 순간 긴장을 풀어주고 해학을 전한다. 

양산 신흥사 대광전 포벽 설산수도상은 부처님의 머리 위에 까치가 집을 지어 새끼를 품고 있는 벽화가 있다. 다른 새들도 많은데 왜 하필 까치일까? 예로부터 ‘까치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알려져 왔다. 『서경잡기西京雜記』에 “까치가 울면 길 떠난 사람이 돌아오고, 거미가 집을 지으면 모든 일이 잘 풀린다.”는 말이 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향한 마지막 치열한 구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머리 위 까치는 부처님의 성도를 미리 알려준다. “깨달음을 이루실 것”과 “중생 곁으로 돌아오실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어 재미있다. 

이처럼 사찰의 구석구석에는 불교 교리에 의거해서 불보살님을 외호하고 사람들에게 복과 지혜를 주는 다양한 동물들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동물의 행복과 안락을 위해서 무엇을 해 주었는가.    

권중서

조계종 전문포교사.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서 불교미술 전공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부터 ‘문화사랑 걸망 메고’를 운영하여 우리문화 알리기에 주력하는 한편, 현재 법무부 교정위원, 경기불교문화원 이사, 경기문화연대 운영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불교미술의 해학』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