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판(坐板)

스님의 그늘 3, 성철 스님

2007-09-14     관리자


성철 스님을 괴각(乖角)이라고 한, 한송 스님의 설명은 대강 이러했다. 괴각이란 본래 상대방에게 무리하고 어려운 문제나 질문을 던져서 상대방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리한 난제(難題)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곤경을겪게 하므로 그 점을 취하여 괴각을 괴팍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지만 이것은 속화(俗化)된 뜻이고 잘못 쓰이는 것이다. 도리어 선가(禪家)에서는 후학(後學)이나 학인(學人)을 지도하는 방법과 수단이 뛰어난 선사(禪師)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어려운 문제와 질문을 던져서 상대방을 움츠리고 뛸 수 없는, 단애(斷崖)의 끝과 같은 경지로 몰아 넣고 그 곳에서 다시 한 걸음 더 뛰쳐 나아갈 것을 간발(間髮)의 차를두지 않고 몰아세우며 요구하므로써 선(禪)의 독특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는 일대전환(一大轉換)을 촉구하는 방법과 수단을 선사들은 즐겨 쓰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사의 괴각 노릇, 즉 수단과 방법 여하에 따라서 선사가 펴논 좌판 위의 물목(物目), 요즘의 흔한 말로 메뉴 가 각양각색으로 나타난다.
조주(趙州) 선사의 주된 메뉴는 무(無) 이고 덕산(悳山) 화상은 몽둥이질(棒) 이고 임제(臨濟) 스님은 고함지르는 할(喝) 이며 성철 스님이 나에게 팔고자 한 것은 속지 말라 엿다. 1950년대 말, 성철 스님의 좌판에는 꽤 다양한 메뉴가 있었다. 우선 철조망이다. 철조망을 치고 사람의 접근을 막는 것, 그것이 그 중 하나였다. 암자의 대문은 늘 굳게 잠겨 있으므로 대문 옆의 철조망을 제치고서 드나들면 니 머하러 왔노 하신다. 그러면 나는 철조망 거두러 왔습니다. 한다. 니 눈에는 안 보이나 삼계가 온통 철조망인기. 하신다. 스님이 성전을 아주 떠나 지나가는 길에 도선사에 잠시 머물고 계실 때, 도선사로 스님을 찾아갔다. 한 일자(一)로 된 요사의 윗방에 청담 스님과 성철 스님 두 분이 계시다가 나를 그 방으로 올라오라 하시기에 방에 들어가자 마자 철조망을 거두러 갈 일이 없어졌습니다. 하니 여전히 니 눈에는 안 보이나 삼계가 온통 철조망인기. 하셨다.

백팔참회(百八懺悔)
철조망을 친 성전에 스님이 주석(住錫)할 때, 메뉴 중 하나는 백팔참회와 대능엄주(大楞嚴呪)가 있다.
백팔참회는 백 여덟 번 절을 하면서 참회하는 것으로서 백팔배(百八拜)라고도 한다. 스님은 전생과 금생의 업장(業灑?을 없애기 위해서는 백팔참회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업장이소면되어야 지혜의 눈이 열려 수행이 제대로 된다고 하였다. 1950년대 중반 무렵부터 정화의 기운을 타고 선이 크게 번지고 있을 때, 선방(禪房)에서 결제(結製)를 마친 수좌(首座:그때는 참선하는 스님을 이렇게 불렀다)들은 여러 곳으로 눈 밝은 선사를 찾아가 자신이 닦은 수행의 경지를 점검받는 관습이 성행하였다. 그것을 흔히 법(法)을 묻는다고 한다. 성철 스님은 당신에게 법을 물으러 찾아오는 수좌에게 이 백팔참회를 요구했다. 여기에는 업장의 소멸을 장려하고자 하는 뜻도 있지만 법을 묻는 수좌는 당신에 대한 믿음의 표시를 백팔참회를 통하여 확인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농담삼아 달마를 찾아간 신수(神秀)가 팔을 잘라 믿음을 보인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싸다고도 하셨다. 그러나 그 농담 속에는 잡인(雜人)을 금하는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자연히 이 백팔참회를 하기 싫은 수좌는 성철 스님을 꺼려하고 찾아가지 않았다. 사람이 찾아오는 것을 막는 철조망이나 백팔참회는 그 점에서 스님의 뜻과 부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백팔참회는 수좌들의 세계와는 다른 곳에서 파장(波長)이 자라고 있었다. 스님을 신(信)하는 신도들, 주로 여신도 사이에서 행해지던 백팔참회가 전국적으로 번지면서 1천배를 하는 신도들이 생기고 더 나아가 3천 배를 하기에 이르렀으며 급기야는 3천 배를 하지 않으면 스님이 만나주지 않는 메뉴가 하나 더 생기게 되었다. 스님은 곧잘 불공을 들이기 위해 절에 온 신도들에게 진정한 불공은 마을에 내려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밥과 옷을 주는 것이라고 하고, 절은 절을 하는 곳이며 불공보다도 참회하는 절을 하는 곳이 절이라고 가르쳐 절하는 풍토가 자리 잡히게 되었다.

대능엄주(大楞嚴呪)
대능엄주란 숙세(宿世)의 습기(習氣)를 없애는 진언(眞言)으로서 능엄경(楞嚴經)에서 설하고 있다. 그리고 이 능엄경은 한국 전통불교, 특히 선종(禪宗)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선가에서는 능엄경에서 설하고 있는 대능엄주를 외우지 않고 예부터 해인사에 따로 전해오는 판본(板本)의 대능엄주를 외워왔다. 이 판본의 대능엄주는 능엄경의 대능엄주와는 내용이 다르고 우리나라 소리로 되어 있으며 5백 10구(句)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성철 스님은 이 대능엄주의 소리가 잘못 음사(音寫)되어 있고 전체의 내용에 있어서도 결함이 많다고 주장하고서 부족한 부분의 내용을 채우고 소리를 바르게 음사하는 일에 수년 동안 몰두하였다.
1950년대의 이 시기는 외국으로부터 필요한 자료와 도서를 구입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스님은 손이 닿는 온갖 경로를 통하여 대능엄주에 관한 자료와 도서를 국내외에서 수집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자료수집을 도운 사람 중에는 벽안의 독일인 의사도 있었다. 그는 독일 병원에 파견된 의사로서 6 25동란 때 부산에 나와 있던 병명도 알 수 없는 스님의 병을 치료하면서 스님과 인연이 맺어졌고, 스님의 병력을 독일 의학계에 보고하여 이상한 체질의 투병하는 선사 에 관심을 갖게 하였다.
독일로 돌아가서도 스님과 서신을 교화하고 있던 그 의사는 인도와 독인 뮨헨 대학에 있는 자료를 보내 주어 크게 도움이 되었다는 술회를 들을 적이 있다. 특히 뮨헨 대학의 자료 중에는 한자와 범어와 서장어(西藏語)와 독일어의 4개 국어를 대조한 것이 있어서 우리 소리로 다라니를 음사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이 일에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스님은 인도 현지에 가서 범어를 배워 올 사람이 있으면 학비를 대겠다고도 했고 실제로 여러 사람에게 인도에 가서 공부하기를 권하기도 하였다.
있는 힘을 기울여 완성한 대능엄주는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을 낳았다. 새로 음사한 대능엄주를 외우기를 주장하는 편과 그와는 반대되는 입장이다. 반대하는 입장은 옛부터 전해 오는 것을 뒷사람이 함부로 버릴 수 없고 예부터 전해 온 대능엄주가 잘못되었다면 대능엄주만이 아닌 지금까지 한국 불교에서 외워온 다른 모든 다라니들도 잘못 외워왔을 것이므로 그 영향은 다라니에 그치지 않고 의식(儀式) 전체에 미쳐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지금까지 행해 온 으식과 다라니의 공덕을 뿌리채 흔들고 부정하는 결과가 따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하면 불교진흥원 황산덕 이사장의 말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수년 전, 불교진흥원에서 우리말로 번역한 의식집(儀式集)을 만들 때, 이때도 그와 같은 이유로 해서 다라니의 음사가 문제되었다. 이때 황산덕 이사장은 다라니를 새롭게 음사해서 외우는 것은 루터의 종교개혁보다도 더 큰 일이라고 했다. 이 말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은영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