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太師)

연재소설, 원효대사

2007-09-14     관리자


무녕은 다 들이키고 나서 다시 원효에게로 올린다.
"아니오. 내가 하는 대로 따르시오."
원효는 잔을 무영의 다음 사람에게로 건넨다. 그도 역시 무릎을 꿇으며 사양하는 것을 굳이 권하며 말했다.
"우리 불자는 모두 한형제간이요, 내 한때는 여러분의 스승 노릇을 하기는 하였지만, 지금 여러분은 나라를 위해 큰 사명을 띠고 일하는 충신들이오. 그러므로 여러분과 나는 똑같이 상감마마의 신하로서 평등한 처지이니 너무 어려워 말고 함께 즐깁시다.
옛날부터 술좌석은 스승과 제자의 구별을 두지 않고 즐기기도 하였으니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거나 저렇게 생각하거나 간에 마음을 탁 풀어 놓고 함께 마시며 이국의 정을 씻습시다."
"스승님께서 기왕 이렇게 너그러이 하명하시니 어려워 말고 잔을 받으오."
부하들은 일제히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황송하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더욱 밝은 안색이 되어 차례로 원효의 잔을 받는 것이었다. 원효는 매우 흡족했다. 여기가 백제국이 아니고 신라의 한곳이라면 함께 춤을 추며 노래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그는 꾹 참았다.
"여러분, 여러분이 대임을 완수하고 귀국하게 되면 내 서라벌 복판 유곽 중에 가장 규모가 큰 술집에서 꼭 한턱을 내리다. 그때에는 여러분과 함께 춤도 추고 노래도 하기로 하고 오늘은 조용히 쉬기로 합시다."
원래 신라 사람들은 춤 잘 추고 노래 잘 하기로 삼국 중에 으뜸이었다.
한편 원효를 보낸 보덕 화상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 이제 할 일이 없어졌구나."
이렇게 독백하듯 말하고는 원효를 보낸 서운함보다 오히려 기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스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시봉인 개심(開心)이 물었다.
"내 법은 동녘으로 갔으니 장차 크게 빛날 것이고…."
"예…."
제자들은 스스의 말을 충분히 수긍할 수 잇었다.
"배달민족의 장래도 우려할 필요가 없느니라…."
"원효 스님과 논의하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논의해서 아는 것은 하지하근(下之下根)의 그릇이니라."
"상세히 말씀하여 주십시오."
"오래지 않아 원효 대사가 다시 이쪽 서녘 땅에 오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나는 만나지 못할 것이니 너희는 나를 대하듯 예의를 다하여라."
"…."
"원효 대사는 나로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성사(聖師)이시니라. 불법의 진수(眞髓)를 깨친 가히 해동(海東)의 석가(釋迦)라 존숭할 만하니라."
"…."
"제경(諸經)의 이치를 모두 꿰뚫었음은 말할 나위 없고 화엄(華嚴)의 오의(奧義)를 철저히 증득한 데에도 오직 경의를 표해 마지 않는 바이니라.
너희는 국경이나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말고 원효 대사를 스승으로 섬겨라."
이 말은 보덕 화상으로서는 아직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이른바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스승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원효와 접해본 제자들은 원효가 과연 당대 제일의 스승이라는 심증이 섰던 만큼 스승의 말을 가슴 속 깊이 새겨 두기를 다짐하는 것이었다.
"예, 스님의 가르침을 명심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아뢰며 허리를 굽혔다.
원효가 고대산을 다녀감으로 해서 보덕 화상과 그의 제자들은 앞으로 필연적으로 닥쳐올 대혈전에 엄정히 중립을 지킬 것을 각자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것이었다.
원효의 이번 고대산 예방은 고대산 대중들에게 깊은 이해와 신뢰감을 심어 주었으므로 여러 면으로 수확이 큰 것이었다.

통일과업(統一課業)

태사(太師)
황룡사에서의 원효의 생활은 항상 바쁘기만 했다.
나라에서는 백제, 고구려와의 대전을 앞두고 전쟁 준비에 총력을 기울였으며 원효는 나라의 중요한 정책 수립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 무렵의 신라 정치 체제는 상감인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대각간(大角干)이자 군(軍)의 총수(總帥)인 유신 장군, 그리고 원효 세 사람이 결속한 이른바 삼두체제(三頭體制)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원효는 정책 수립에 참여하긴 하여도 어떤 직위를 갖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백제 공략의 작전계획이 확정되어 무열왕과 유신 장군이 출정하게 되자 유신 장군은 상감에게 말했다.
"우리가 출정하게 되면 여기 서라벌은 원효 대사에게 맡겨야 하는 만큼 대사에게 어떤 직위를 정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할 듯 하오."
"거, 참으로 좋은 생각이오. 직위가 있어야만 위계질서가 확립될 거고, 또 대사도 책임을 절감하여 정사에 전념할 것이오."
왕이 적극적으로 동의하자,
"그럼 대사에게 대각간(大角干)의 자리를 드립시다."
"그런 지위를 대사가 받을지 모르겠구료."
"글쎄요, 한번 의논해 보지요."
그 날로 유신 장군은 황룡사로 가서 원효를 만나 의사를 타진했다.
"저는 만인이 알다시피 출가한 사문이요, 사문이 벼슬자리에 앉는다면 따를 백성이 없을 것이요."
원효는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유신 장군이 대궐로 돌아가 상감에게 이 말을 전했다.
"내 그럴 줄 알았소, 마침 자장승통(慈藏僧統)께서 입적하셨으니 대사를 승통으로 모시는 것이 어떻겠소?"
유신 장군은 곧 찬동한다.
"아주 합당한 분부시오. 하지만 승통은 승가(僧家)의 어른이니 국사(國事)를 위임하자면 이름을 달리 하는 것이 좋을 듯 하오."
"그럼 뭐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태사(太師)라 하면 어떨지요?"
"태사라…."
상감도 입 속으로 뇌이며 생각에 잠긴다.
"태사(太師)라는 뜻은 온 나라의 스승이라는 뜻이 아니겠소? 이는 국통(國統)이나 국사(國師)란 뜻에 맞먹을 터인즉 대사에 대한 예우로 적당할 것이오."
상감은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대각간의 깊은 사려에 새삼 탄복하오. 그럼 태사로 봉하기로 합시다."
이리하여 만조백관 앞에 상감은 원효를 태사로 봉한다는 것을 선포하고 황룡사로 사람을 보내어 원효 태사를 입궐토록 하였다.
태사라는 직위는 나라의 스승이자 임금의 스승이다. 상감은 원효가 등단하자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원효에게 오체투지하고 세 번 절하였다. 그리고 이어, "오늘날과 같이 다사다난한 시기에 나라의 스승이 안 계시면 아니 되겠기에 큰스님의 존의를 살필 겨를이 없이 태사(太師)로 모시는 바이니 이 점 양찰하여 주시오. 과인 이하 조정의 제신들이 우매하기 이를 데 없으니 항상 숭고한 불법 지혜로 일깨워 주시고 자비 원력으로 보살펴 주시오."
상감의 간절한 청에 원효은 달리 사양할 도리가 없었다.
" 수행이 부족한 원효를 나라의 스승이라는 지고한 자리에 앉히시는 것은 이 원효더러 부지런히 수행하라는 경책으로 알고 더욱 정진할 것을 서원하는 바이오.
나라 안팎의 정세가 바야흐로 우리에게 많은 시련과 노력을 강요하고 있는 만큼, 우리도 상감마마를 중심하여 일치단결하고 일로 매진하여 대망의 통일과업을 이루도록 합시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불보살의 가호가 나리시리니 하루속히 대업을 성취하여 불국토를 건설하도록 중지(衆智)를 모으고 중력(衆力)을 합치기를 부탁드리는 바이오."
원효는 감격에 차서 더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원효는 주로 왕궁에서 기거하는 몸이 되었다. 상감은 원효를 위하여 왕궁의 동쪽 후원에 있는 장락전(長樂殿)을 수리하도록 하고 원효의 거처를 삼았다.
원효가 왕궁으로 이주한 지 열흘 뒤에 요석 공주는 설총을 데리고 사라사(裟羅寺)에서 서라벌로 돌아왔다.
두 해만에 보는 설총은 여섯 살 난 의젓한 동자로 성장해 있었다.
"아버지 문안이옵니다."
설총은 고사리손을 모으고 오체투지 하였다.
"오냐, 우리 총이가 많이 자랐구나."
원효는 설총을 안아주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는 곧 오신다 하시고는 어이 안 오셨사옵니까?"
"서라벌 일이 미진하여 못갔다."
"저는 어머님에게 글을 배웠습니다."
"오! 그랬느냐? 참 장하다. 어머니 말씀 잘 들었느냐?"
"예, 어머님 뜻을 따랐습니다. 하오나…."
"응? 하오나 어떻단 말이냐?"
"어머님은 날마다 어버지 기다리시느라 잠도 안 주무셨습니다."
"응?"
또박 또박 말하는 설총을 무릎에 앉히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다가 설총의 이 말에 원효는 말문이 막혔다.
석양이 되자 요석이 왔다는 기별을 받고 지조 공주도 왔고 군사조련을 참관하러 갔던 상감과 유신 장군도 돌아와서 왕궁에는 다시 경사가 벌어진 듯 했다.
설총은 외조부인 상감과 이숙인 유신 장군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두 해 동안에 우리 총이가 이렇게 성장하다니…."
상감의 말에,
"도인의 자제에다 요석 공주의 아들이니 어련하겠소?"
유신 장군도 유쾌히 웃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딸 요석의 절을 받고 상감은 물었다.
"전원의 생활이 어떻더냐?"
"두터우신 은총 입사와 늘 너무 편히 지냈습니다."
"총이가 있으니 심심하지는 않았겠구나."
"예, 말벗이 되었나이다."
"음…."
-계속-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배지숙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