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차의 멋스러움 올바로 알기

오늘을 밝히는 등불들, 한국 차와 차문화를 지키는 석용운 스님

2007-09-14     관리자


"어처 구니없는 실수를 한 게 차와의 처음 인연이라면 인연이었지요.
그 당시는 차라는 말도 제대로 통용되지 않았고 차문화도 완전히 끊겨 있었다고 해야 할 시대였습니다. 겨우 차라고 해야 야생차가 자라던 대흥사라든가, 선운사, 화엄사 정도에서 노장님네들이 아무런 격식 없이 만들어 마시는 정도였으니까요.
대흥사에서 노장님을 모시고 시봉을 할 때였습니다. 저도 처음엔 밥지어 먹던 공양 솥에 이른 새벽에 나가 따온 찻잎을 넣고 콩볶듯 볶아 한지로 만든 봉지에 담아두었지요.
어느 날 노장 스님께 손님이 오셔서 처음 차를 끓여 오라고 하셨을 때 그저 주전자에 차를 한 주먹 넣고 보리차를 끓이듯, 약 달이듯 끓여 내었습니다. 누르스름한 게 소태같이 썼는데 나중에야 노장님께 한 말씀을 듣고 차 끓이는 법 등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연구해야 할 것을 찾던 중 차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초의 선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오늘날 한국의 다경(茶經)이라 할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찾게 되었지요."
'80년대 중반 『초의 선사 전집』을 펴낸 바 있는 용운(龍雲) 스님은 차와의 첫 인연에 대해 여러 차례 강의를 진행해온 터라 특유의 편안함으로 차분히 이야기해주신다.
어쩌면 참 인연이 닿았으리라. 1972년 2월 뒤늦게 대흥사 운기 스님을 통해 출가를 하셨고 거기엔 잊혀져 가던 차에 대한 기억들이 야생차와 다산초당과 초의 선사의 유적들로 남아 있었으므로.
초의 선사(1786∼1866)는 서산 대사 이후 13대 강사와 종사가 배출된 해남 대흥사의 13대 종사로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등과 교우하면서 선과 유학과 도교 등을 논하며 여러 교학에도 통달했다. 대흥사 동쪽 일지암에서 40여 년 간 지관(止觀)에 전념, 불이선(不二禪)의 오의(奧義)를 찾아 정진했으며 다선삼매(茶禪三昧)에 들기도 하였다.
차와 선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데서 시작하는 그의 다선일미 사상은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 즉, 한 잔의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을 맛본다는 것이다.
또한 초의 선사의 다도는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며 그 잘 끓인 물과 좋은 차를 적절히 조합하여 마시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차와 선이 별개의 둘이 아니라고 하는 그의 법이 월여 범인 스님, 선기 스님을 통해 그리고 상운 응혜, 벽담 스님을 통해 용운 스님으로 그 맥을 이어오게 된 것이다.
"스님들이 부처님의 법을 배우고 공부하고 전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요. 그 일 외에 요즘 같은 현대 세계에서 스님들 역시 무언가 하나 전문적으로 연구해서 그 분야에 있어 일인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우리들이 구제해야 할 중생세계 사람들이 연구하는 학문과 분야에 대해서 우리 스님 네들은 너무 등한시 해온 게 아닌가, 그래서 백지상태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현실적으로 여타 종교에 비해서 중생교화에 불교가 뒤져있다 하겠습니다.
스님 한 분 한 분이 한 분야를 연구해 그 분야의 최고가 되어 모임을 갖는다면 아마 세계적인 이목이 집중될 것입니다. 그래 공부할 것을 찾다보니 버림받은 문화를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선인들이 유배를 당해 유배지에 와서 연구하고 발전시킨 학문을 유배문화라 할 수 있겠지요. 이제 학계에도 통용어가 되다시피 했는데 그 한 분야라 할 차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무런 소임도 맡지 않고 공부에 전념하던 스님이 차를 처음 알게 된 후, 차를 좀더 깊이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찾아본 책만도 3,000여 종이었다. 그런 연구를 거듭해오면서 『한국 다예』등 두 권의 책을 펴냈고 지금도 원고지 몇 만 매에 달하는 스무 권 분량의 차에 대한 글들이 스님의 방 한쪽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다.
"과거에 스님들이 차문화를 정립하고 차정신을 완성하고 차를 선과 같은 경지에 끌어올려 선다일여의 정신세계를 완성하고 수행 차 시대를 개막시켜 차를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삼았습니다. 이런 것들을 많은 문헌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 차의 대중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차인구의 10% 정도는 수행 차의 전통을 지켰으면 하는 스님은 애초에 '차문화 운동'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 당시 차를 좋아하시던 노장 스님 몇 분께 손수 재배해 만든 두 가마 정도의 차를 조금씩 선물로 드리고, 오는 손님들에게 차를 끓여내는 정도였고 처음 듣는 차 이야기에 신기해하며 듣던 불교학생회의 학생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강의를 하는 정도였다.
1974년 9월, 스님은 초의 선사가 기거하던 일지암 복원계획을 마련하고 여러 다인들과 함께 우여곡절 끝에 1980년 완전히 일지암을 복원하였다. 그리고 다인들이 흩어지는 게 아쉬워 그 다인들을 연계 한국차인회와 이어 한국차인연합회 등 한국차문화와 그 운동의 밑거름이 될 각 단체들을 이끌어냈을 뿐이었다.
차공부를 계속하면서 자연스레 차 좋아하는 사람들과 만나게 됐다는 스님은 또한 5년 정도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에게 정신 문화와 차에 대해 강의를 하게 되었고 그 인연들이 닿아 차문화 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다.
이때 인연으로 태평양의 서성완 회장이 차사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지금은 한 해 차 생산량의 70∼80%를 태평양이 생산하게 되었다.
스님은 이런 저런 이유로 『다원(茶園)』지에서 이어진 국내 유일의 차 전문잡지라 할 『다담(茶談)』지의 어려운 발행을 떠맡다시피 맡아하게 되었고 '초의선원'을 개원했다. 그리고 도서출판 초의, 초의 장학회, 국제무아차회 등이 속해있는 '초의문화재단'을 설립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일반인들을 위해 일인용 찻잔을 고안해 내기도 한 스님은 요즘도 수요일은 일반인들에게, 금요일은 성직자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서울과 지방, 그리고 중국 등을 자주 오가며 강연과 연구, 단체의 연대에 쉼 없는 힘을 보태고 있다. 그래서 스님 자신 건강은 돌볼 겨를이 없다.
요즘 스님은 당송의 백화문(白話文)을 공부하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초의 선사 헌양 사업을 마치면 다시 산으로 들어가 오역이 많은 역대 조사 스님들의 어록을 올바로 공부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올해 추진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 차문화의 생활화, 대중화, 산업화를 통해서 차문화를 흔들림 없는 우리의 문화를 정착시키고자 합니다. 또한 차인구의 확대와 관심증대 속에 공공연히 퍼져 있는 왜색다도를 고쳐나가야 하겠습니다.
차를 끓이는 법과 마시는 절차와 형식을 중요시하는 일본 다도에 비해 우리는 차를 마시면서 사업얘기, 안 좋은 얘기보다는 덕담이나 청담 등을 하는 것이 우리차의 분위기입니다. 그런 멋스러움이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자기들의 건강과 생활을 위한 문화고, 일본은 보여주기 위한 문화, 우리는 정신과 멋스러움,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하고자는 것입니다."
올 여름 차문화연수는 부산의 한 수도회 분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그만큼 타 종교인들의 관심이 커져 있다. 스님은 이제 좀더 불교계와 스님들의 관심이 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좀더 많은 스님들이 우리차를 바로 알아야만 또 많은 신도들에게 우리차를, 우리차의 멋스러움을 올바로 알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배지숙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