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의 물이 썩으면

빛의 샘·마음이 울적할 때면

2007-09-14     관리자


마음이 울적해 질 때라면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회색 빛 하늘과 떨어지는 낙엽, 그리고 커다란 유리창이 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쉽게 떠올릴 것이다. 물론 나도 이런 범주에서 결코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막상 정말이지 울적하도록 마음이 울적할 때를 생각해 보니 조금 달라 보이고 싶은, 약간은 허황된 욕구가 솟구치는 걸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얼마 전 성황리에 막을 내린 TV 드라마 '모래시계'는 날 굉장히 울적하게 만들었다. 허탈감 비슷하게 다가왔지만 드라마가 끝난 후 몇 일 동안 나는 심하게 울적해야만 했다. '재희'의 한 여자에 대한 헌신적인 사랑이 왜 내겐 없을까 라든지, 태수처럼 멋있는 사람에 대한 동경 따위는 결코 아니었다.
태수가 포승줄에 묶인 채 하얀 수의를 입고 형장으로 향할 때 그의 머리 위엔 새떼가 푸드덕거리며 푸른 창공을 갈랐고, 눈부신 햇살이 그의 눈을 짓눌렀다. 움푹 패인 눈과 새하얗게 질린 얼굴은 삶에 대한 절규였다. 태수가 교수대 위에 올라 친구에게 묻는다. "내가 지금 떨고 있냐"고. 그러자 친구가 대답을 한다. "아니야, 태수야 조금만 참아 금방 끝날 거야." 전두환과 노태우씨의 5·6공 이·취임식이 수천의 사람이 모이고 수만의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는 장면이 화면에 스치는 게 그 즈음일 게다.
태수는 그 둘의 원만한 정권이양을 보장하는 막대한 정치 자금을 만들어내는 카지노에 목숨을 걸었고, 우석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했고, 결국은 친구를 죽여야 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의 울적함은 그러한 결론에서 온다기보다는 모래시계의 밋밋한 마무리와 더불어 그렇게 마무리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무력감에서 오는 것이다. 세상이 변했고 문민정부니, 세계화니 하는 현란한 구호 속에 그들은 여전히 튼튼한 성 위에 앉아 있고, 재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다.
어항의 물이 썩으면 그 속에서 살아가는 물고기들도 온전히 살아남기가 힘든 것이다. 때론 물고기들도 자신의 삶을 비관해 보기도 하고 울분에 차서 어항이라는 한계와 썩은 물에 대한 분노도 터뜨려 보지만 늘 굴절되고 꺾여 온 우리네 역사가 아니던가. 썩은 물에 사는 작은 물고기로서의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어항이 정의가 넘쳐흐르고, 즐거움과 풍족의 노래로 가득 찬 안락한 삶의 터전이 되어주는 것이다.
힘들고 지치고 쪼들리는 나 같은 셀러리맨들에게 희망은 일한 만큼의 대가와 권선징악의 실현에 있다. 이것을 바랄 수밖에 없는 초라한 나의 모습에 더더욱 울적해지고 마는 것이다. 태수의 절규에 시린 처절한 눈빛이 눈앞에 어른거렸고, 우석이 죽음을 앞둔 친구를 바라보는 눈빛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들의 눈빛에 나는 앞으로도 한동안은 울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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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희 님은 '68년 생으로 '90년 이화여대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홍익미디어 광보부에서 일하고 있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배지숙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