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적하다'와 '나무아미타불'

빛의 샘·마음이 울적할 때면

2007-09-14     관리자


"3월 6일이 무슨 날이야?"고 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것이다. 내 생일, 아버지의 제삿날, 혹시 첫 데이트 한 날을 기억해내는 신통한 사람도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3월 6일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엉뚱하게 '마음이 울적해지는 날'이 된 것이다.
1475년 3월 6일은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의 조각가이며 건축가며 화가며 시인인 미켈란젤로가 탄생한 날이다. 그리고 520년이 지난 오늘날(아마 '94년부터) 그 미켈란젤로의 생일이 컴퓨터를 쓰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며 그만큼 '울적해지는 날'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미켈란젤로 바이러스' 때문이다.
미켈란젤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컴퓨터는 3월 6일이면 입력된 자료와 하드디스크 속에 들어 있는 프로그램들이 모두 파괴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미 그 예방·퇴치용 백신 프로그램이 개발되었다. 다만 초보자가 미켈란젤로 바이러스의 수난을 당하지 않는 간단한 방법은 그 날 하루 컴퓨터를 켜지 않는 것이다.
몇 해 전부터 나는 거의 날마다 일과처럼, 일요일도 공휴일도 컴퓨터의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쓴다. 원고를 쓰거나 또는 정리를 한다. 그러나 '94년부터 3월 6일 하루동안은 미켈란젤로 바이러스의 예방을 위해서 컴퓨터를 쓰지 않기로 했다. 집에 있는 데스크탑도 사무실에 있는 노트북도 하루동안 켜지 않는 것이다. 그만큼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다. 그것은 컴퓨터 바이러스라는 현대적인 메커니즘의 구속을 어쩔 수 없이 받게 되는 그만큼 '울적해지는 일'이다.
하루 일을 못한다는 개인적인 '울적'과 함께, 현대 메커니즘을 악용해서 그 따위 바이러스나 만들어내는 생쥐 같은(생쥐가 화를 내겠지만) 범인이 있다는 생각으로 사회적이며 공적인 '울적'까지가 겹쳐진다.
그런데 막상 하루동안 컴퓨터 앞에 앉지 않기로 한 결과, 나는 하루를 완전히 컴퓨터에서 해방되었다는 자유를 느꼈다. 할 일이 없는 자유이다. 나는 비교적 자율적인 일을 한다.
컴퓨터 바이러스가 아니라도 하루를 그냥 쉴 수도 있다. 컴퓨터 이외의 다른 일을 찾아서 쉴 수도 있다. 하지만, 컴퓨터 바이러스가 컴퓨터 앞에서 나를 해방시킬 수 있는 구실과 말미로 준 자유의 맛은 한결 달랐다. 아무런 부담도 없이 인사동 쪽으로 걸어나가 을지로로, 명동으로, 충무로를 돌고 안국동으로 다시 걸어 돌아다닌다. 전시회도 보고 전파상도 들여다보고, CD가게에도 들른다. 복잡한 서울 거리를 어느 상쾌한 산길이라도 가는 듯이 가볍게 걷는다. 현대 메커니즘에 의한 구속이 나의 하루를 현대 메커니즘에서 해방시키고, 울적하던 심사가 어느새 상쾌한 심정으로 전환된다.
1950년대에 한 잡지사에서 일을 하다가 한낮에 사장실에 불려가 느닷없는 파면통고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것은 울적 이상으로 울화가 치밀고 분통이 터지고 쏟아지는 일이었다. 파면 통고를 받은 직후, 나는 가져갔던 도시락을 꼭꼭 씹어 먹으면서 울적한 마음을 달랬는데, 그 후 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사장이 자신의 파면처분의 정당화를 위해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내 비난을 계속하는 일이었다.
나는 '남의 죽음이 자신의 고뿔보다도 못한' '수전노'라는 생각을 하며 그를 경멸했다,. 그래도 울적한 마음은 삭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울적해 해도 일단 파면을 당한 상황이 변화될 수도 없는 일이고, 울적해 하면 할수록 나만 손해가 아니냐는 논리를 짐짓 세워 보기도 했다.
당시 파면을 한 사장이나, 파면을 당한 나나 100년이 지나면 그냥 똑같은 백골이 될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내용의 시를 한편 써서 발표했다. 하루의 울적에 100년의 세월을 대입하는 물타기〔稀釋化〕작전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제 40년이 지나 그때의 사장도, 울적도 이미 소멸화·희석화·공무화 한 지 오래다.
마음이 울적해질 때면, 미켈란젤로 바이러스의 수난처럼 발상의 전환을 하거나, 하루를 100년에 대입시키며 울적을 희석화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안 되면 차라리 "울적하다"는 말을 자꾸 하며 "울적" 속으로 깊숙이 빠져 들어가 본다. "울적하다" "울적하다" "울적하다"…"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독치독(以毒治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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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우 님은 '28년 인천 생으로 조선일보 논설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시집 『한국의 가을』,『나비야 청산간다』, 산문집『공성의 피안행(경허선사 평전)』 등이 있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배지숙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