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갑산 품에 안긴 문화재보고-장곡사

바라밀국토를 찾아서, 청양균 지역

2007-09-13     관리자


장곡사는 신라 문성왕 12년(850년) 보조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보조 스님은 웅진에서 태어나 설악산 억성사에서 염거 화상에게서 선지를 이어받고 우리나라 선불교의 비조인 도의 스님의 법맥을 이은 분이시다.
신라불교가 화엄사상에 기반을 둔 정토 불교라 한다면 이 보조 스님을 비롯하여 신라 말 중국에 유학을 갔다 돌아온 스님들은 선진적이고 가히 혁명적인 선불교 사상으로 지방호족이었던 왕건이나 궁예, 견훤 등에게 개국의 이념을 제공했다. 선불교의 무애한 기풍과 누구나 본래의 성품을 보면 바로 성불한다는 혁신적인 슬로건은, 지방호족들에게는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얘기로 들렸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중국에서 달마 대사가 양무제의 이해를 얻지 못하고 소림굴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듯이 신라시대의 선사들도 대부분 중앙인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장곡사도 그런 절 중의 하나였으리라. 그래서 그런지 가만 살펴보면 첩첩이 쌓인 산 속에 선방의 분위기가 더 절실하게 풍겨 나오는 듯하다.
칠갑산 자락이 앞을 여미듯 첩첩 산중을 이룬 장곡사를 가는 겨울 길은 한산했다. 청양읍에서 공주 쪽으로 향하는 길을 접어들어 약 7킬로미터. '청정지역 청양 장곡사'라고 쓰여있는 푯말이 있는 곳에서 오던 방향으로 우산 손잡이처럼 구부러진 진입도로를 접어들어 약 시오리 길을 더 올라가면 청정지역답게 유원지도 아니고 상가도 두어 집 밖에 없는 넓은 주차장을 만난다. 여기서 산길로 5분 남짓 호젓한 산자락을 헤치면 아담하게 정돈되어 있는 대여섯 채의 고운 맞배지붕들이 오는 손을 맞는다.
장곡사의 대웅전 두 채는 각각 보물 162호, 181호로 지정된 문화재들이다.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면서 몇 차례에 걸친 중수로 인해 조선 중, 후기의 양식들이 첨가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중 상대웅전은 뚜렷한 주심포계의 건물양식인데 조선 중기 이후에나 보이는 보아지(梁奉) 기법 등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중간에 변형되었다고 판단된다. 여기에는 신라말기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는 국보 제58호인 철조약사여래좌상과 그 석조대좌, 그리고 보물 제174호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석조대좌가 그보다 조성시기가 훨씬 늦은 또 한 분의 부처님과 함께 모셔져 있다. 이 부처님들 때문인지 장곡사는 기도도량으로 이름이 높다. 구한말의 경허 선사도 신병치료를 위해 이곳을 찾아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때마침 대학입시를 앞둔 학부모인 듯한 사람이 학생을 데리고 하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이고 이내 소형 스피커를 타고 기도소리가 들려왔다. "약사여래불, 약사여래불…." 상대웅전까지 들려오는 기도소리를 들으며 하대웅전으로 내려와 보았다.
하대웅전은 역시 금동약사여래불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상대웅전의 부처님들은 상호에 회칠이 되어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되었지만 이 부처님은 고려 말의 기법을 그대로 간직한 수려한 상호를 보여주고 계신다. 이도 또한 보물로서 제337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달걀형 상호에 전체적인 균형미가 돋보이고,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하대웅전의 건축기법은 원래가 팔작지붕인 것을 중간에 맞배집으로 개량한 듯하다. 충량(衝樑)이 놓였고 추녀를 얹었던 흔적이 보인다는 점에서 그런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건물의 전후에 공포를 짜 올린 양식이 달라서 가령 전면에는 쇠서〔牛舌〕가 이중으로 돌출되어 있으나 후면에는 내부에만 보이고 외부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원칙이 무너진 채 지어진 우리 목조건축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몇 번에 걸친 중수의 과정을 어렴풋이 나마 읽을 수 있는 자료가 된다고 생각하니 그대로의 가치가 있다.
장곡사에는 이밖에도 설선당, 응진전, 운학루 등의 건축물이 있다. 이중 설선당(設禪堂)은 단청을 하지 않은 고촐한 모습으로 하대웅전 좌측에 자리잡고 있는데 '장곡사'라고 쓴 유신시대 국무총리였던 사람의 친필현판을 이마에 달고 있어 그 멋을 덜고 있다. 응진전에는 108나한상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조성되어 있고, 운학루에는 언제 제작되었는지 모를 커다란 코끼리 가죽 법고가 보관되어 있다.
결코 크지는 않지만 종교적, 문화적 무게가 여느 사찰보다 적게 나가지 않는 장곡사. 겨울날 매서운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중에도 등뒤로 두 분 약사여래부처님의 따뜻한 배웅을 느끼며 청양읍으로 향한다. 절 어귀까지 걸어나가는 발걸음이 그리 간단치 않을 만큼 긴 골짜기였기에 장곡(長谷)인지도 모르겠다.
청양은 백제가 부여에 도읍을 정하고 왕국에서 먹을 물을 길어다 먹던 곳이라고 전해질 만큼 맑고 청정한 지역이다. 실제로 남양면 금정리에 가면 그곳이 부여 왕궁에 물을 길어다 주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렇듯 일찍부터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던 곳에 백제불교의 유적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정산면과 목면에 걸쳐 있는 계봉산에는 계봉사라는 절과 산성이 있다. 백제가 망하고 그 유민들이 부흥군을 결성하고 끝까지 싸운 유서 깊은 곳들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이렇다할 유적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서정리에는 9층 석탑(보물 제18호)이 있으나 이것은 백제의 양식이라기보다는 신라탑의 영향을 받은 고려 초기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
청양 읍내리 우성산에 자리한 봉안사에는 그나마 백제의 온화한 미소상을 갖춘 석조삼본불입상이 모셔져 있다. 원래 이 삼존불은 읍내의 폐사지에 뉘어져 있었는데 지금의 봉안사를 창건한 성호 스님께서 해방 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모시고 절도 창건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장비가 없어서 이 거대한 불상을 옮길 방법을 모색하다 불행하게도 세 분 모두 왼쪽 어깨에서부터 오른쪽 허리까지를 절단하여 옮겨 모셨다고 하니 그나마 한적한 곳으로 옮겨 모시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지 아니면 절단을 탓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청양 근방은 산림이 울창했던 지역이었다고 한다. 아직도 주변에 조성된 산림의 영향으로 생산되는 이 지방의 특용작물들이 많아 외지로 내보내고 있다. 그중 청양 구기자는 전국 생산량의 7∼80%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양이 생산된다고 한다.
특히 약 5년 전까지만 해도 장곡사를 지켜왔던 비구니 스님들은 장곡사 자체를 구기자 산지로 가꾸어 오셨다고 한다. 그래서 청양 구기자 중에서도 장곡사 구기자를 알아준다.
청양에는 이외에도 운장암 철보살좌상과 도림사지3층석탑 등의 불교문화재가 있다. 또한 민속으로는 청양에서만 볼 수 있는 동제가 네 군데 리 단위에서 치뤄지고 있는데 매년 정월 열 나흩 날 지내는 동화제가 바로 그것이다. 집집마다에서 땔감나무를 날아와 동화대(洞火臺)를 쌓고 불을 지른 다음 한 해 동안 마을의 풍년과 안정을 기원하는 의식이다.
첩첩산중에 위치한 청양이어서 이런 민속자료들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민속뿐만이 아니라 해맑은 자연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자연에 거스르지 않는 사람들의 심성도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이 청정지역 청양이다.
아무리 삶의 때가 온몸에 묻어난 사람이라도 한번 다녀가면서 깨끗한 마음이 되는 곳, 그런 곳이 여기 청양이 아닌가 생각해보며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는 찌푸린 하늘도 왠지 맑게 보이는 착각 속에 청양을 벗어난다.

청양의 신행단체/청양불교청년회
"산 사람을 위한 불교가 되어야지요."
청양에서는 1984년 창립하여 어려움 속에서도 지역불교 터전을 모범적으로 일구고 있는 청양불교청년회(회장 조성원, 43세)를 찾아보았다. 창립회원인 이재숙(전 대불청 충남지부장) 씨와 전임회장이었던 차재일 씨가 인터뷰에 응했다.
우선 청양불교청년회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예, 저희 청양불청은 지금으로부터 꼭 11년 전, 서너 명의 인원이 '법우회'라는 모임을 만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의 활동이라면 매주 불교회관에서 법회를 보는 일상활동과 일년에 두 차례 가는 순례법회, 그리고 어린이 여름불교학교, 큰스님 초청 법회, 문화공연 등이 있습니다.
그동안 활동을 해오시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있다면…
불교활동이란 것이 재가자들만의 힘만으로 할 때는 한 열 배가 더 힘든 겁니다. 지도해 주실 스님 한 분 없이 하다보니 활성화되었던 학생법회, 어린이법회가 그 명맥을 끊기고 청년회도 매주 법회를 보는 정도에 머물고 있습니다.
포교와 신도교육에 뜻 있는 스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여기 우리의 현실이고 이런 사실은 우리뿐 아니라 전국의 신도조직이 다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회원은 얼마나 되며, 그 동안 벌였던 포교사업은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현재는 마흔 일곱 명의 회원이 있고 그 중 반수 정도가 매주 법회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91년에 처음 어린이 여름 불교학교 열었더니 약 150여 명의 어린이가 모여들어서 어린이 법회가 없어졌어도 여름불교학교는 계속 지속하고 있습니다. 여름불교학교에 참가했던 어린이들은 읍내에서 만나면 꼭 합장하고 인사를 합니다. 그 인사는 안 받아본 사람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를 거예요. 또, 인근의 마을 이장님들과 협의하여 마을기원법회를 순회하며 연 적도 있는데 숨어있는 불자들의 발굴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들께서 쌀을 한 됫박씩 들고 나오셔서 시주를 해주시기도 했지요.
스님들께서 하실 일을 대신한다고 보면 되겠군요.
그렇지요. 우리 지역에는 대처스님들이 많고 또 조계종 사찰에서도 포교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죽은 사람들을 위한 49재 불교라고 우스개 말을 하기도 합니다. 요즘 개혁회의를 거치면서 종단에서도 포교에 역점을 둔다고 하니 여기에 정말 뜻이 있는 스님께서 내려와 주시기만 한다면 저희가 도움이 되어서 청양불교를 정말 한번 크게 일으켜 볼 겁니다. 〈香山〉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배지숙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