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랑 하나 달랑 메고

물처럼 구름처럼

2007-09-13     관리자


인간의 삶이란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한 순간도 영원할 수 없으며 또한 정해진 모양도 없이 떠다니는 구름과 같아서 성급히 결단할 것은 더욱 못 된다.
이런 삶의 본질 때문에 우린 전생의 업이 주춧돌로 이루어진 인생무대에 서 있으면서도 항상 깨달음을 통해 대자유인이 되고자 몸부림치는 것이며, 늘 새롭게 전개되는 시간과 공간의 주인공이 되고자 출가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의 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곧 진리의 세계를 향한 옹골찬 첫 걸음이며, 스스로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되고 강물이 되어 머무름 없는 우주의 한 부분이 되려는 것이리라.
한 평생 수좌(首座)의 길을 걸으신 노스님께서 나에게 늘 운수행각(雲水行脚)하며 이름 없는 중으로 살기를 권하셨고 나 또한 "한 웅덩이에 고인 물, 한 철 이상 계속은 마시지 않겠다."고 한 약속드리고 철마다 걸망을 챙겨본다.
숲이 아무리 빽빽해도 물 흐르는 것은 멈추게 할 수 없고 산이 아무리 높아도 구름 가는 것은 막을 수 없듯이 아직도 내겐 세상의 부귀영화와 종단의 시비장단이 마음과 발길을 멈출 만큼 그 어떤 가치로 와 닿지는 않는다.
호랑이는 깊은 산에 살아야 위엄이 있고, 물고기는 큰물에 살아야 편안하듯 난 언제나 노스님들이 많이 계신 산중에서 가풍(家風)을 익히며 정진하는 것이 제일 좋다.
아직도 자신과 숱한 생명을 자비심 하나로 대할 진솔한 수행자가 못된 나로서는 맑은 차 한잔에 산그늘을 담아 홀로 마시는 것이 편안하고, 어리석은 눈으로 세상을 토막내느니 산천을 벗삼고 떠다니며 자연의 순리를 배우며 느낀다.
조촐한 행색에 비해 산승의 살림은 참으로 걸림 없고 넉넉한 멋이 있다.
봄날 따스한 햇살을 온 몸으로 받으며 이름 모를 새 소리와 꽃향기에 절로 취해 잠시 넙적 바위에 올라앉아 게송이라도 한 수 읊노라면 연화대(蓮花臺)가 따로 없고, 지루한 장마비 끝에서는 무지개는 백 리 길을 걸어온 지친 발걸음조차도 가볍게 끌어들인다.
가을날 살오른 보름달 아래서 먼 산을 바라보면서 빈 뜰을 걷는 기분은 또 얼마나 신비로우며, 눈 덮인 가파른 산길을 반듯반듯하게 발자국 내며 걷다 돌아보면 한 줄로 잘 따라오는 흔적이 지난날들 같아서 공연히 신이 난다.
많고 많은 기쁨 중에 운수행각의 멋이란 역시 마음만 정하면 언제고 저승사자 만나러 가는 것처럼 세상에서 뽐내는 온갖 권력과 재물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고 자그마한 인연의 사슬이라도 다 지워버리고 떠날 줄 아는 당당함과 작은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은 자유로움과 통쾌함 그 자체인 것이다.
보잘것없는 행각이지만 난 십여 년 전부터 성지순례와 육신불(肉身佛)을 친견해야겠다고 원을 세우고 용기를 내어 마음엔 부처님을 안고 등뒤에 걸망 하나 달랑 메고 가까운 일본을 시작으로 인도, 중국, 베트남, 미얀마 등 세계 이십여 개 나라를 샅샅이 헤집고 다녔다. 그런데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보다는 늘 큰 감동과 깨달음이 있고 편협하고 작은 나의 껍질이 한 겹씩 벗겨지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부처님의 생애를 길과 연관하여 살펴보면 네팔 룸비니 동산 무우수 아래서 태어나시고, 백성의 삶을 살피던 길에서 발심하시고, 길에서 고행하시다 보리수 아래서 성도하시고, 끊임없이 다니시며 전법하시다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하였으니 팔십 생애를 길에서 시작하시어 길에서 거두셨다?
나 또한 부처님의 제자이니 길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음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외국어에 무지한 내가 두려움 없이 다니는 것은 타고난 낙천성도 있지만 또 혼자 위안을 삼는 것은 세계 어느 민족에게도 농아자(聾啞者)와 문맹자(文盲者)는 있으며 초보자도 있다는 사실이니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천진한 마음으로 태평하게 웃으며 새 인연을 맺고 천천히 흉내내며 따라다니면 뜻밖에 일이 잘 풀리는 때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비구는 걸사(乞士)라 하여 밖으로는 밥을 빌고 안으로는 법을 빌라 하셨으니 불교 나라 중에서 반연이 있고 넉넉한 일본에서 받은 시주금을 가끔 각 나라에서 망명생활에 고달픈 티벳스님을 만나면 나누어 쓰고, 어려운 인도에서 천민을 만나면 옷까지 벗어주고 되돌아 오면서 한푼 없는 주머니를 털며 부설 거사의 시 한편을 왼다.

此竹皮竹化去竹 風吹之竹浪打竹
粥粥飯飯生此竹 是是非非看彼竹
賓客接對家勢竹 市場賣買時勢竹
萬事不如吾心竹 然然然世過然竹

이대로 저대로 되어 가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생기는 이대로,
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른 보는 저대로,
손님 접대는 집안 형편대로,
시장 물건 매매는 시세대로,
만사가 내 맘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그렇고 그런 세상 지나는 그런 대로.

나 자신의 생과 사는 물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어느 것도 어느 곳도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는데 왜 우린 자신과 상대와 세상이 변하는 것을 멈추게 하려 하고 집착에 멍든 자신의 생각에만 안착하려고 하는 것일까.
이제 돌고 돌며 늘 변화하는 이 세상에서 흐르는 물과 흩어지는 구름을 바라보며 생의 무대에 영원히 머물고 싶어하는 바람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헤아려 보자.
동안거 해제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수행자들이여! 가슴 가슴마다 깨달음을 지니고 해제를 맞아 혼탁한 저잣거리로 나와 갖가지 방편으로 자신의 그림자에 놀라고 지친 중생들을 위로하는 참으로 향기롭고 멋진 운수행각을 시작해 보자.
살림이 넉넉하다면 육도만행(六道萬行)까지도.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배지숙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