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순수파동과 직결되는 기쁨

이남덕 칼럼

2007-09-13     관리자


어떤 다른 종교보다도 불교는 정진(精進)에 있어서 그 방법의 다양성과 철저함에 특색이 있다고 하겠다. 정진생활을 오랫동안 하여온 구참보살들이라도 언제나 스스로 신참 초발심자처럼 느껴진다는 이유는, 불교에서 알게되는 실로 부사의(不思議)한 부처님의 세계가 너무나 방대한 데 비해서 자기가 체험하고 아는 범위가 극히 제한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날이 갈수록 더 깨닫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설사 다소의 종교적 체험을 가지고 자기 나름대로는 신앙생활을 토대로 삼고 있는 경우라도 이것을 발설만 하면 그 자리에서 몇 방망이든지 얻어맞아야 하는 것이 가풍처럼 되어 있어서 입도 뻥끗 못하는 것이 상례이다. 반야공(般若空) 도리를 이해한다면 현상계에 나타나는 가상가명(假相假名)의 묘사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언어로써의 표현도 진실을 전달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원칙이 세워진 것이리라.
절에서 행해지는 모든 생활도 이 정신에 입각해서 진행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불필요한 군더더기는 하나도 없다. 우선 말(言語)의 낭비가 없다. 서로 말없이 마음을 통하는 공부인지라(以心傳心),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를 않는다. 수행인들은 대부분 묵언(默言)표를 가슴에 달았건 안 달았건 묵언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잔잔한 수면(水面)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파문을 일으킬까봐 일파재동 만파수(一派 動 萬波水)라, 이 고요한 절 분위기에서는 한 마디의 말을 여간 조심하는 게 아니다.
다음은 물질(物質)에 대한 알뜰함이다. 밥풀 한 알 안 나가게 공양할 때 조심하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일이다. 요즘은 워낙 세태가 물질만능에 물질 흔전만전 시대라 절에도 오염이 되어 들어오는데 그것은 외부인들이 처음 절에 찾아와서 자기가 먹은 음식찌꺼기를 남기는 실수에서부터 시작된다. 절에 오래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먹을 만큼만 집어오는데 초참자일수록 알뜰한 습관이 안 박힌 데다가 식탐(食貪) 그것도 욕심의 일종인데 그것이 조정이 안 되어서 자기한계 이상의 것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절에서 지내는 하루의 일과도 실로 간단명료한 것이니 하루 네 번 참선과 세 번 공양시간만 표시된 일과표가 선방 벽에 다음과 같이 나붙어 있다.

정진 시간표
03시 起床 禮佛入禪 □
05시 放禪 □
06시 朝粥 □
08시 午前 精進入禪 □
10시 放禪 □
11시 巳時供養 □
14시 午後 精進入禪 □
16시 放禪 淸掃 □
17시 藥石 □
19시 禮佛入禪 □
21시 放禪 就寢 □

일과표 시간대로 한치의 어김없이 진행되는 것은 군대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이 참선정진시간표 외에 개인적인 정진은 공양을 전후한 방선 후·입선 전(위의 표에서 □로 표시된 부분) 시간에 이루어지는데 이는 각각 사람마다 자기 방식에 따라 다르지만 단 5분·10분의 시간도 헛되게 흘리는 일은 없다.
정진방식은 염불·주력(呪力)·절〔拜〕·독경·포행 등 다양하다?
왜 이렇게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 삼업(三業)을 함봉하는 삼함(三緘)의 엄격한 규칙정진 속에 하루 24시간을 메꾸는가? 지금 나의 첫 단계 수행자 주제로는 어림도 할 수 없는 어려운 물음이다. 정진이 철저하면 할수록 거기에는 반대급부적으로 정진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공덕이 말할 수 없이 크든가, 또는 정진하지 않으므로 해서 잃어지는 손실이 막대하든가 그렇게 봐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은 세 번째 삭발일이니 안거(安居) 반살림을 지낸 것이다. 지난 달 팔다리 쑤신다고 우는 소리 한 때에다 대면 지금은 용된 셈이다. 여드레 지나면(1月 8日) 부처님 성도재일(成道齋日)이라 용맹정진 기간이 그 전에 있다. 한자리에 2시간씩 하던 참선 정진을 3시간으로 늘리고 끝날 무렵에는 철야정진을 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제 그 마음준비가 되어 있으니 참으로 감사할 뿐이다. 그동안 정진이랍시고 애쓰는 내 정경을 부처님이 가엾이 보아주신 덕분이다.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말이 있다. 참선 입정 중에 등뼈를 위시해서 뼈마디마디에서 우둑우둑 소리가 나면서 온 전신이 부드럽게 개조가 되는 것을 그렇게 표현했는가 싶다. 이때에도 내가 그렇게 하겠다는 유위심(有爲心)으로는 절대로 안 된다. 오로지 부처님〔眞如佛性〕을 향한 찬탄심과 환희심만이 우리를 변조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참선정진이 가장 최상승(最上乘) 정진방법이지만 그 참선을 도와주는 방편들이 위에 든 여러 정진방식들이다. 나의 경우는 포행하는 것이 다른 노보살과는 다른 나의 방식이 되었다. 나이를 생각하고 또 수족이 아프다면서 포행하는 것을 주위에서는 처음엔 과로라거니 무리라거니 염려하였으나 지난 달포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포행을 계속하여 그 성과를 인정하였음인지 지금은 도리어 건강하다고 부러워들 한다.
포행을 하는 나의 방식은 태안사 앞에 있는 연못가에 내려가서 연못 중앙에 세워진 사리탑을 도는 '탑돌이'와 낮 공양 뒤의 긴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태안사 뒷산을 한바퀴 돌아오는 것인데 '나무아미타불'을 칭명염불(稱名念佛) 하면서 걷는 것이다. 이것은 염불선(念佛禪)과 직결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은 천태종(天台宗)의 개조(開祖)인 천태 대사의 행적이다. "몸은 항상 행선(行旋)하여 쉼이 없고, 입은 항상 아미타를 칭하여 쉼이 없고, 창(唱)과 염(念)을 구운(俱運)하고 상념상계(常念相繼)하여 쉼이 없었다."고 한다. 그의 게송(偈頌) "보보성성념념(步步聲聲念念) 유재아미타불(唯在阿彌陀佛)", 걸음걸이, 소리소리마다, 생각생각이 오직 아미타불만 염불한다는 것이니 그의 열성(熱誠)을 느낄 수가 있다. 나도 탑돌이를 할 때나 산행을 할 때 '나무아미타불' 4박자 4걸음으로 리듬을 잡는다(느릴 때는 6걸음이다).
걸음을 걷는 일이나 소리를 내는 일은 우리들의 자율신경(自律神經) 훈련이나 의식의 맨 심층(深層)의 정화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된다.
어쨌든 포행정진뿐 아니라 모든 정진의 핵심에는 정진시의 의식(意識) 상태가 성도(成道)에 대한 뜨거운 원력(願力)과 환희심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는 정진에는 일관성(一貫性)과 반복성(反覆性)이 그 생명이다. 무슨 행동이든지 하다가 말다가 하면 김이 새버린다. 열이 식으니 성취가 더디든가 아무 한 보람이 없게 된다. 반복성이란 똑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는 데서 심신의 개조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것을 나는 '리듬'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 개념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내가 왜 포행을 소중한 정진방법으로 삼고 있느냐 하면 유일하게 대자연과 접촉하면서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전생부터의 습이 붙었는지 친자연(親自然)은 불교의 무아·무소유(無我·無所有)와는 동전 안팎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물 흐르는 소리·빗방울 소리·솔바람 소리·새 소리·풀벌레 소리… 내가 두메산골에서 느끼는 모든 소리는 대자연에는 리듬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그것은 내 안에 박동하는 리듬과 우주에 가득 찬 진여불성인 생명의 순수파동과 직결되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내게 경이(驚異)요, 환희의 체험이다.
새벽 5시 방선 후에 하는 첫 탑돌이?
그 시간은 내게는 금강석 같은 시간이다. 선방 문을 나오자마자 동쪽 하늘을 본다. 샛별〔金星〕이 뜨는 시간이다. 아직 안 떴다.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며 탑돌이를 하기 위해 어두운 연못가로 내려온다. 연못 한복판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 사리탑이 모셔져 있다. 사리탑 앞에서 삼보께 예경하는데 밤하늘의 별과 천지신명과 함께 모시는 것 같은 신령스러움과 광활함을 느낀다. 예경을 마치고 탑돌이를 하며 연못 저편 동쪽 산 능선을 바라볼 때 그때 샛별이 떠오르는 것을 발견한다.
달빛이 만월일 때는 저녁 방선 후의 탑돌이가 첨가되지만, 요즘같이 달빛이 그믐달 될 때는 샛별과 그믐달과의 뜨는 시간이 가까워지는 걸 바라볼 수 있다.
음력 스무 이렛날(바로 그저께) 새벽 동쪽 하늘에 달과 샛별이 쌍나란히 떠오를 때는 신기하기 짝이 없다. 지난달에도 똑같은 날이었으니 대자연은 어김이 없다. 사리탑 탑신의 상륜부(相輪部)와 별빛이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지점에서 나는 언제나 부처님이 깨치신 부다가야의 그 순간을 생각하며 샛별을 쳐다본다.
억만년 지나도 꼭 같은 그 별이다! 샛별게송을 부르고 금생제도를 기구(祈求)하는 간절한 서원을 올린다. 어떤 때는 구름이 오락가락하고 별은 보일락말락할 때가 있다. 나의 간절한 기구를 알아나 주듯이 살짝 별빛이 보이고 보통 때보다도 더 강한 빛이 보일 때 부처님께서 보살도 성불의 서원을 들어주시는 것처럼 기쁨은 한량없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배지숙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