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나 -교수가 되고

재가의 선수행

2007-09-13     관리자


불교 개혁에 도움이 될까 해서 지난 호에 이어 한마디만 더 하고 다시 ‘오늘의 나’를 다루기로 하겠다.

이번에는 지난번 조계종 사태를 통해 내가 겪은 한 사례를 들어 몇마디(건전한 비판)하고자 한다. 종단의 사태에 대해 불교방송국으로부터 지난 4월 12일 화요일 오전 10:00에 방송된 특집 [한국불교의 새로운 탄생을 기원한다]를 진행해 달라고 방송나가기 이틀 전에 요청이 와서 한번도 방송을 진행해 본 경험이 없었지만 허락했다.
방송국 측에서 꽤 급박하게 특집방송을 마련하는 것 같아서 승낙을 했으나 하루 전날 오후에 방송원고를 보내주기로 한 약속이 바쁜(?) 방송작가의 사정으로 방송국에 가서 방송나가기 한 시간 전에야 빠듯하게 짜여진 원고를 접하게 되었다.
이때 문득 정부 여당의 비호를 받고 있는(?) 치밀하고 조직적인 구 총무원 집행부에 비해 개혁에 관한 의욕은 앞섰으나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한 개혁모임이 전개하고 있는 상황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정리하고 신속히 원고를 살폈다. 그런데 방송 도중에 새로운 원고가 더 끼어들여져 원고 순서가 뒤죽박죽이 되면서 누가 보아도 진행이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아마 때가 때였던 만큼 불교방송국 측에서는 참신한 진행자를 물색하다 나를 선정한 것 같으나 나의 경우 방송을 진행해 본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점도 충분히 고려하여 방송을 준비했었어야 했는데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따라서 다음에는 보다 바람직한 불교방송의 진행을 위해 진행자를 선정하면 방송작가와 충분히 의견을 교환한 후 이를 바탕으로 원고가 정리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불교방송의 경영진들도 충분한 방송인력을 확보하여 진행자의 개인 능력에만 의존하는 주먹구구식이 아닌 보다 수준높은 방송이 되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도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이런 마음자세로 잘못된 점은 신속하게 고치고 장점은 잘 살리며 서로 화합한다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일이 뭐 있겠는가? 보기를 들면 지난 종단 사태에 대한 정부의 태도에 대행 정부는 불교계의 뜻을 제대로 수용하고 진심에서 우러난 정중한 사과와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하루 빨리 매듭지음으로써 지난날의 아픔을 하루 빨리 치유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번 조계종 사태와 더불어 드러난 구 총무원측의 영향력으로 인해 끝까지 침묵한 불교신문과 대세가 기울기 시작하자 뒤늦게 개혁을 외치기 시작하자 불교방송 등을 몸소 겪으면서 의식있는 불교인이라면 종단의 어려운 일들을 사부대중이 모두 알 수 있도록 자유로이 비판할 수 있는 언로(言路)는 항상 열려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현 개혁회의를 이끌고 계신 스님들께서는 개혁과정에서 잘못된 점이 있다면 더 발못된 방향으로 흐르기 전에 비판을 받고 이를 시정할 수 있게 비록 불교방송, 법보신문 및 불교신문 등이 비록 종단의 지원을 받고 있지만 완전히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하셔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렇게만 운영된다면 불교계가 지난 날과 같이 선거때마다 정부여당의 시녀 노릇을 하지 않게 될 것이며 오히려 중립적인 위치에서 공정한 선거를 치룰 수 있도록 국민들을 계몽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의 나 Ⅲ : 강원대학교 재직시절 1983년 2월 서강대에서 이학박사(물리학과 박사 1호) 학위를 받자마자 1983년 3월 공채를 통해 춘천에 있는 강원대학교 물리학과에 조교수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만 해도 이공계통의 경우 박사학위 소지자가 적었기 때문에 국내든 국외든 어디에서 박사학위를 했느냐에 관계없이, 그리고 그렇게 연줄이 없어도 연구업적만 조금 좋으면 바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참고로 지금은 아주 뛰어난 연구업적이 없이는 국립대학교나 이름 있는 사립대학교에 자리잡기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나 한편으로는 능력 있는 사람이 제대로 자리를 잡고 활동할 수 있는 이런 상황이 우리 나라의 학문발전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아무튼 나는 이 당시 아직 종달(宗達)노사밑에서 『무문관(無門關)』에 있는 화두들을 들고 참선수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지금와 돌이켜보면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국립대인 강원대학교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 다 부처님 뜻이라 생각된다.
또한 매주 서울에 종달노사께 입실지도를 받으러 왔다가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세미나에도 꾸준히 참석할 수 있어서 최신 연구의 흐름도 계속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학위를 받은 후에도 국제학술지에 연구논문을 꾸준히 발표하면서 연구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다 1987년 4월 부교수(선진국에서는 5년 정도의 조교수 재직기간 동안 좋은 연구 업적을 내어야 부교수로 승진할 수 있으나 한국은 아직 대부분 법적 연한만 차고 최소한의 자격요건만 갖추면 자동적으로 승진됨)기 됐으며 1987년 9월 미국 뉴욕 주립대 부설 이론물리연구소의 연구원으로 1년간 연구활동을 하였다.
이때 사실 국내에서만 공부를 했었기 때문에 국제경험이 없어서 영어를 잘 못했지만 그 동안 참선을 통해 기른 아랫배의 힘으로 잘 버텼다. 특히 미국에 도착해서 한달 만에 미국의 중진 물리학자들 앞에서 참선수행을 통해 기른 똥배짱을 가지고 영어로 1시간 짜리 세미나를 무사히 마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게 느껴질 뿐이다. 1988년 9월 귀국하여 1년간 강원대에 근무하다 모교의 부름을 받고 박사학위 취득 후 6년 반만에 1989년 9월부터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로 근무하게 되었다.
한편 이런 참선수행과 꾸준한 연구활동 외에 강원대에서의 좋은 벗[善友]들과의 만남은 나의 값진 체험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분인 강원대 역사교육과의 신종원 교수님과의 만남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그냥 좋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참선수행을 통한 만남이다. 강원대에 부임 후 당시 강원대 철학과에 계시던 김지견 교수(지금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연구실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불자교수 몇 분이 모여 공부를 했었는데 그러다 신교수께서 참선에 관심이 있으신 것을 알고 내 연구실로 오시라고 하여 돗자리를 깔고 일 주일에 한번씩 참선을 했었다.
그리고 내가 서강대로 자리를 옮긴 후에도 서울 오실 때마다 바쁜 가운데에서도 나에게 입실(入室)을 하러 서강대에 꾸준히 들르시고 계시며 이제는 참선공부가 본 궤도에 접어들어 지등(智登)이란 거사호(居士號)도 받으시고 『무문관『에 있는 화두들과 열심히 씨름하고 계신데 앞으로 춘천지역의 참선지도 법사로 활약하실 날이 밀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참고로 일본의 경우 학문의 정체성을 우려해 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0년 정도 다른 연구기관에서 뛰어난 연구업적을 쌓아야 모교 교수로 초빙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는데 나의 경우는 그다지 뛰어나지도 않았으나 옮길 당시 모교에 동문교수가 한 분도 없었고 뚜렷한 후보자도 없어서 어부지리로 가게 된 것을 지금도 송구스럽데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종달 노사께서 세상을 뜨시게 될 무렵이 되어 서울로 올라와 노사의 후임으로 선도회(禪道會)의 재가수행자들을 이끌어가라는 부처님의 뜻이라고 느껴질 때가 가끔 있다.
오늘의 나 Ⅳ : 현재 서강대학교 재직 1989년 9월 모교인 서강대학교로 돌아와 이론물리학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며 아울러 꾸준히 선(禪) 수행도 계속하고 있던 중 1990년 6월 7일 종달노사(宗達老師)께서 세상을 떠나심으로 해서 노사께서 하시던 일을 법(法)을 이어 받아서가 아니라 참선에 뜻을 둔 분들을 돕는다는 심부름꾼의 입장에서 형식상 선도회 제2대 지도법사가 되어 선수행을 원하는 분들의 입실지도를 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오늘의 나’라는 제목아래 내 자랑만 늘어 놓은 것 같지만(사실 그렇기도 하고) 한편 누구나 선 수행과 더불어 열심히 살아간다면 자기가 종사하는 분야에서 자기 힘 닿는데까지 전문가적인 기질을 유감없이 나투기도 하고 삶의 뜻을 확실히 하며 남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한 것이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 불사에 동참하신 문미호 불자님께서 입력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