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 스님의 수행도량 -대승사

바라밀국토를 찾아서,문경군

2007-09-13     관리자


문경군 에는 역사있는 사찰들이 즐비하다. 희양산 봉암사는 초파일날을 제외하고는 모든 관광객의 입산을 허용치 않는 선객들의 참선도량으로 이미 그 이름이 높거니와 운달산 김룡사는 6?25때도 손상을 입지 않은 당우(堂宇)들이 옛색을 내뿜고 있어 많은 순례객을 운집케 한다.
10여년 전에 김룡사를 참배하고 점촌에서부터 비포장도로 먼지길을 2시간 가량 깊숙히 들어가면서 시달린 피곤함이 대단하였지만 김룡사에 당도하여 큰절과 운달산 깊은 골에 여기저기 자리한 암자들을 참배하면서부터는 몰려왔던 피로가 한번에 가셔지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김룡사를 십 리 남짓 남겨두고 갈라져 들어가는 대승사는 길도 길이려니와 오르막 산길 오리를 걸어가야 한다는 소리에 지레 겁을 먹고 참방할 염을 내지 못하였다. 그래도 언젠가 대승사를 순례하리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서 항상 염두에 두어왔으나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이제까지 그 기회를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십 년을 기다리며 찾아오는 절이니 아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예사롭지 않은데 큰 길에서 갈라져 대승사로 오르는 산비탈에서 보면 산세가 그리 빼어나 보이지도 않고 숲도 그렇게 울창한 느낌이 없다.
이곳 저속 답사를 다니다 보니 어떤 절이나 사지에 대한 자료나 글이 제아무리 좋아도 미리 기대감을 가지고 그곳에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어느새 나의 신조처럼 되어서 속을 들여다 볼 때까지는 모든 판단을 유보해 둔다. 점차 사찰경내로 접어 들어가자 울창한 숲길 중앙에 해묵은 일주문이 올곧게 서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곳 하나 빗나감이 없다. 이렇게 높은 곳에 이렇듯 넓은 터를 골라 가람을 세웠으니 어찌 대승이란 이름에 헛됨이 있으랴.
대승사의 주산은 사불산(四佛山)이다. 「삼국유사」권3 사불산조에 ‘진평왕 9년(587년)에 문경의 한 산위로 붉은 비단에 쌓인 사면석불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왕이 와서 예배하고 이 바위 아랫쪽에 대승사를 창건한 후 이름 없는 스님에게 절을 맡겨 사면석불을 공양케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사불산이라고 불렀으리라 여겨진다.
이 기록이 기록으로만 남아있다면 별다른 의미가 없겠지만 사불산에는 아직도 이 사면석불이 산정에 그대로 남아있어 뭇 신도들의 예경을 받고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방불의 양식은 8세기 이후의 특징을 갖고 있어 진평왕 때에 이 사방불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조성 연대를 믿을 수 없는 석불이라고 하여 불자들의 신심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온갖 어려움을 마다 않고 산정에 홀로 서서 바위와 씨름하며 몇 달 몇일을 망치와 정을 휘두르면서 불심을 불태웠을 석공의 모습이 저릿저릿하게 마음을 적셔온다.
자기의 신심을 표현할 적당한 돌을 만나고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는 석공의 땀방울을 생각할 때 어찌 오체투지의 예경이 조금인들 아까우랴.
대승사를 창건할 때 이 절을 맡았던 이름 없는 비구[亡名比丘]도 대단했던 인물이다. 일찍이 상주고을의 어느 신도가 돌아가신 부모님의 천도재를 지내기 위해 고승대덕을 모시는 자리에 우연히 초대되어 하룻밤을 유숙케 되었다. 한밤중 잠자리에서 코를 골며 자는 스님의 입에서 상서로운 광명이 뻗치니 사람들이 모두 놀라 스님을 깨운 후 연유를 물었다. 스님의 대답이 “평소 수행이 부족하여 법화경을 외웠을 뿐”이라고 대답하였고 이 소문은 서라벌까지 퍼지게 되었다.
진평왕이 이곳에 왔을 때 대승사 인근에서 가장 고명한 스님을 주지로 모시기를 원했을 거이고 스님을 첫 대면한 자리에서는 틀림없이 이름이나 법명을 물었을 터이건만 끝까지 이름 없는 비구를 자처한 스님이야말로 세간을 훌훌 벗어난 출격대장부의 걸림 없는 모습이 아닐까 한다. 또한 이름 없음을 주장하는 스님을 대승사의 주지로 모신 진평왕도 그 근기가 하나도 뒤지지 않으니 글자대로 진평(眞平)이요 망명(亡名)이다.
대승사를 거쳐간 고승들을 다 열거하자면 지면의 좁음을 탓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추려 뽑는다면 나옹 스님과 함허 스님, 근세의 대석학이셨던 퇴경 권상로 박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나옹 스님은 20세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대승사의 산내 암자인 묘적암에 머물고 있던 요연(了然)선사에게로 출가하였다.
요연 선사는 “여기에 온 것은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고 나옹 스님은 “말하고 듣고 하는 것이 왔습니다만 보려하여도 볼 수 없고 찾으려 하여도 찾을 길이 없나이다. 어떻게 닦으오리까?”하였다. 요연 선사는 다시 “나도 너와 같이 알 수 없노라. 다른 스님을 찾아 물어 보라.”고 말하였다. 나옹 스님은 중국에서 지공 스님의 인가를 받은 후 다시 묘적암에 돌아와 요연 선사의 곁에서 수행정진하였다. 이 때에 42그루의 괴목나무를 심은 것이 바탕이 되어 지금도 대승사 근처에 괴목나무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전한다.
대승사 대웅전에는 보물 제575호인 목각탱이 있다. 조선시대의 목각탱인 이 아미타 목각탱은 그림으로 그려서 불상 뒤에 모시는 탱화와는 달리 모두 나무로 조각하여 그 위에 개금을 하였기에 셈세함과 정연함에 들인 공력이 대단한 성보이다.
원래 이 목각탱은 영주 부석사에 있었던 것으로 1862년(철종 13)에 화재로 인하여 법당이 불에 타 없어지자 새로 법당을 지은 후 그 당시 폐사로 있던 부석사에서 모셔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석사에서 이 목각탱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양 사찰간에 시비가 일어나게 되었고 결국 1876년에 대승사에서 부석사 조사전의 수리비용을 부담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러한 시비에 관련된 문서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목각탱화와 같이 보물로 묶여 있다.
이 목각탱화는 하루쯤 법당 안에 앉아 예경?찬탄?기도하며 보내어도 환희심이 다할 듯한 보물 중의 보물인데 어찌해서 국보로 지정되지 않았는지 의아스럽기만 하다.
대승사 뜨락을 거닐다 보면 한 쌍의 노주석을 만나게 된다. 옹정년간에 만들어 진 것으로 벌써 270여 년이 지난 문화유산이다. 어둔 밤에 법회를 열 때 기둥 위의 넓은 돌 위에 관솔불을 피워 마당을 밝혔던 이 노주석은 이 지역의 사찰들-봉암사, 김룡사-에 특징으로 한 쌍씩 남아있어 그 당시 법회의 융성했음을 밝혀주고 있다. 평지가람이 아닌 계단식 가람에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옛색을 피워 울리는 대승사. 산색과 어우러져 지나온 역사만큼이나 앞으로도 부처님의 향화를 끊이지 않게 할 사찰이라 생각하며 산문을 나선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 불사에 동참하신 문미호 불자님께서 입력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