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탱화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탱화 그리는 사람 고영을

2007-09-13     관리자


우리의 탱화가 각 가정에 예술작품으로 걸려지기를 발원하며 탱화를 그리는 사람이 있다.
광주여고 미술교사 고영을 (여, 40세). 그가 불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15년 전 구봉(龜奉, 84세 광주시 탱화무형문화재) 스님으로부터였다.
대개의 미술학도가 그러하듯 그 역시 서양화를 하며 서구미술에 대한 편집증을 가져왔었다. 그러나 대학원에 다니며 졸업논문을 준비하던 중 고려불화인 ‘수월관음도’를 보고 그 아름다운 예술성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것이 1980년이었다.
탱화를 그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스승을 찾던 중 그는 구봉 스님을 만나고,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줄곧 이 길을 걸어왔다.
혹여 자신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싶은 두려움에 캔버스, 그림물감, 붓 등 그 동안의 그림 도구를 다 내다버렸다.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가정을 꾸려야 하고 직장생활을 해야하는 그였지만, 잠을 줄여가며 시작한 그림공부는 정말 치열했다.
‘지나간 것에 불과한 것을 무엇 하러 그리느냐’고 충고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최소한 고려불화만큼의 수준을 되고 싶었다.
하지만 15년째를 그려온 오늘에도 늘 새로 시작하는 기분이다. 불과 한 달 전에 그린 그림이 ‘왜 저렇게 그렸을까’할 정도로 마음에 안 들었다. 수월관음도와 비교해 본다면 1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철저하게 우리의 전통적인 것에 바탕을 둡니다. 우리의 전통미가 계승되지 않고는 참다운 우리의 미를 찾을 수 없어요. 전통은 배우다 말면 안 되고 확실히 배워야 하지요. 요즘 불교미술작품들이 눈에 자주 띄지만 거의 소재만 불교일 뿐 서양화인 경우가 많아요. 주제 자체가 불교적인 것이어야지요. 주제와 소재가 모두 동일한 것이어야 해요. 적당히 따라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봐요.”
그는 우리의 전통불교미술을 그대로 살리면서 이 시대에 맞는 새 미술을 창조해보고자 한다.
이번에 처음 갖은 개인전〔1994. 5. 13~5. 22 남봉미술관(광주일보사 3층), 1994. 5. 23~5. 27 광은 아트스페이스(광주은행본점 2층)〕에 내보인 작품 30여점도 역시 우리의 전통 불화에 그 바탕을 두고 있었다.
광경 16관변상도(觀經 16觀變相圖. 127×195cm)같은 대작들과 관음보살도 등 소품들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보는 이의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5?18영령 극락왕생도’였다.
“1980년 5월 18일, 그 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습니다. 미물 하나도 죽이지 말라고 가르치신 부처님이 오신 날이었지요. 그러나 그 날 광주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 오신 말이 아니라 송장 오신 날이구먼…’ 하던 어른들의 말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6년 전, 일곱 분의 부처님이 중생들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그림인 ‘감로왕도’를 그리면서도 그는 얼핏 그 말이 떠올랐다. 감로왕도를 그린 후 자연스럽게 그려진 그림이 ‘5?18 영령 극락왕생도’다. 일곱 여래의 모습 아래 그려진 태극기가 보이고 그 위에 손을 등뒤로 묶인 희생자들이 신음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의 전통 탱화기법으로 그렸다.
5?18 광주시민들의 아픔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그대로 끌어안아 승화시켰다고 해서 보는 이들은 그의 작품을 민중미술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고영을 씨 그 역시도 엄밀히 말해 불화는 민중미술이라는데 공감한다. 불교의 가르침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해주고 대중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작은 화폭에 ‘관세음보살도’를 자주 그린다. 관음신앙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정서에 가장 가깝고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친근감이 들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그는 불교미술의 대중화에 대한 많은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전시회에 온 일반인들이 “방에 걸어 놓으면 좋겠다.”며 자신이 그린 탱화를 소장하고 싶어했고, 심지어는 타종교인도 몇 분 그림을 소장했기 때문이다.
탱화는 각 가정에 모셔서는 안 되며 사찰의 법당에만 모셔야 한다는 일반인들의 생각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아 뿌듯했다.
탱화는 일반적으로 한지나 비단 천에 그리지만, 고영을 씨는 삼베와 면, 그리고 심지어는 아트만지에도 그린다. 부담스럽지 않게 작은 화폭에 담아 일반인 가정에도 걸어놓고 부처님의 그 모습을 닮게 하고 싶어서다. 어떤 그림도 대중이 공감할 수 없으면 예술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그는 늘 생각한다.
“탱화도 역시 종교의 벽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서양의 레오나르도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이 세계적인 명작으로 중학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불교미술도 그렇게 될 수 있고 그렇게 될 날이 멀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불화도 일반 불자들의 예배대상이 될 뿐 아니라 보는 사람들이 놀라와 할 만큼 아름다움을 주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탱화는 아무래도 ‘불심과 정성의 결정체’라고 그는 생각한다. 불심이 없으면 그릴 수 없고 정성을 들인 만큼 보는 이에게 감동을 주고,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 그릴 때 정성은 그림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자신이 하는 일이 너무 주제 넘는 것이 아닌가 해서 송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속인이 그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염려도 들고요….”
한 번은 한 비구니 스님이 자신이 그린 탱화를 보고 하도 좋아하시길래 “이 그림을 드려도 될까요.”한 적이 있다.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동아공예대전, 불교미전 등 각종 공모전에서 입상하기도 한 그이지만 자신이 아직은 미흡하다는 생각과 함께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서다.
강진에 있는 정수사 괘불탱화를 복원한 것 이외에는 일체의 주문을 거절해왔다. 아직은 더 공부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는 그림 작업에 대해선 철두철미하지만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늘 겸손하다.
학교에서 수업 외 빈 시간과, 가정생활을 마친 늦은 밤 시간을 이용해 하는 탱화 작업은 말 그대로 고행이 되고 있다.
어떤 땐 졸면서 자면서 비몽사몽간에 그림을 그릴 때도 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꿈속에서 그린 그 그림이 눈을 떠보면 제대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탱화는 90%가 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선이 생명이 된다. 그 작업 하나 하나가 그대로 수행이 되는 것이다. 혼신의 힘과 정성을 모으지 않으면 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는 세필로 그린 금니(金泥) 은니(銀泥)의 탱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경이로움과 환희를 준다. ‘형태나 문양은 고려불화의 원전에 충실하면서도 색감이나 선의 미감이 현대적’이라는 평들을 한다.
입술 밑 가운데에 있는 점이 부처님의 백호가 내려와 찍힌 것처럼 여겼던지 어렸을 때 아이들이 자신의 입술 밑에 있는 점을 보고 놀리면 “부처님의 제자 되려고 그러지.”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교회에 다니고 있었는데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른다.
내생엔 스님으로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그는 발원한다. 그러나 그의 화장기 없이 차분한 얼굴에 한복차림(평상시에도 그는 늘 한복을 입으며, 벌다른 사치를 하지 않는다.)이 일반인과는 무언가 많이 달라 보였다. 그의 관심 또한 일반 세속살림과는 거리가 아주 먼 듯하다.
그러나 별 투정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결려하며 자랑스러워하는 남편과 두 아이도 역시 자신의 일에 몰두할 수 있는데 큰 힘이 되고 있다.
내년쯤엔 불란서에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해볼 계획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을 그는 공감한다. 우리 것에 대한 평가는 오히려 남이 더 잘 할 것인지도 모르기에….

본 기사는 불광 사경 불사에 동참하신 문미호 불자님께서 입력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