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연(宿緣)

나의 인연 이야기

2007-09-13     관리자


불교와의 인연이 어느 때, 어느 만큼 깊은 것인지 정확히 말할 수 있다면 한 소식을 얻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그저 막연한 가운데 기억의 단편들이 떠오를 뿐이다. 예를 들면 아주 어릴 적에 외가의 어른들이 나를 '미륵'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나는데 당시는 그 이름의 뜻도 알지 못하였다. 글쎄, 특별한 의미를 두어서라기보다는 순하고 말수가 적은 아이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는 중학생이 되어서 두어 번 미당(未堂)선생님이 잘도 노래해주신 고창 선운사를 찾아 갔던 일이 생각난다. 천둥 번개가 무섭게 치던 그 어느 여름 밤, 대중방에 누워서 대단히 큰 모기들과 실랑이를 하던 우리 사춘기소녀들. 사천왕상이나 법당의 탱화나 그밖의 장엄물들이 오히려 무섭게 보인다고 아우성치는 친구들 속에서 나는 그다지 무서운 느낌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조금씩 조금씩 부처님 품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때는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 고교 3년 수험생이 되었던 시기의 심리적 스트레스라는 것을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우리는 그때 인생의 모든 것을 괴로움으로 알아버린듯 하였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 몇이서 밤이 깊도록 도서관 옆 벤치에 앉아 철학적 탐구도 하였고, 시골에서 같이 유학온 친구가 적응을 못하고 휴학해버린 사건이나 국어 시간에 엉뚱한 질문을 하고 교실을 뛰쳐나간 급우에 대한 이야기, 매일같이 노란색 레인 코트를 입고 교문 앞에 서 있는 잘 생긴 남학생이야기 등등.무엇을 말하더라도 우리 앞의 생(生)이 고난으로 가득찬 것처럼 보인다는 결론이었다.지나친 염려였는지 적절한 예측이었는지... .
고등학교 3년생이 있으면 요즘은 온 집안 친척 권속들이 모두 긴장하게 된다는데, 그때 우리는 각기 저 혼자 알아서 고민하고 상심하고 분발하고 그러는 정도였다. 시골에서 그저 공부를 좀 한다고 했기 때문에 돌보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서울을 찾아온 15살짜리들은 자주 대책없이 던져진것 같은 불안감과 경쟁심과 뜻밖의 열등감까지 혼자서 감당해야만 하였다.
누군가 이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되었다.시골에 계시는 부모님께는 차마 번민하는 심경을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기래서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조계사를 찾아갔다. 밤늦게까지 하는 보충수업을 빼먹고 살짝살짝 중간에 나들이를 하던 나는 급기야 담임 선생님께 불려가게 되었다. 야속하신 선생님은 "지금이 어느 때인데 정신을 팔고 있느냐. 절에 가서 스님들과 데이트라도 하는 거냐."고 철없는(?)훈계를 하시는 것이었다.나이 40이되는 지금의 생각으로도 그때는 정말 진지하고 절실한 문제 의식이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더욱 불행한 것은 조계사 법당을 뱅뱅 돌면서 아무리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어도 누구 하나 그 가엾은 중생을 눈여겨 보아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스님이건 일반 신도건간에 날마다 찾아와서 혼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가는 사춘기 여학생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얘기를 나눌 상대가 되지 못한다면 혼자서 책이라도 구해 읽어볼 생각이었지만 도무지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골랐던 책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금강경 주해서였고 당시의 내게 적당한 선택이 되지 못하였음을 알았다. 불교신자들은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두고두고 생각케 하였다. 이웃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도우려 하지 않는다는... .
고교 3년생의 몸살을 겪으면서도 대학 진학은 오랬 동안 목표삼아 왔던 법과로 선택되었다. 선택하였다기보다는 그저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한 일이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는 표현이 더 적당하다. 그렇게 해서 입학을 하긴 하였지만 불교 학생회원이 되고 초파일 즈음에 밤새워가며 연등을 만들었다가 결국은 전과(轉科)를 결심하였다. 아무하고도 의논하지 않고 부모님께 큰 실망을 끼치면서, 여러 친구들은 한편으로 예상치 못했다고 하고 또 한편으론 예상한 일이었다고 보는 가운데 본격적으로 불교 공부를 하게 되었다.
본래 느리고 생각이 많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 내 성격 탓인지, 업보의 탓인지 모르게 천천히 부처님 품안에 들어섰다.
불연(佛緣)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숙연이었음을 느끼면서... .

본 기사는 불광 사경 불사에 동참하신 원각심 불자님께서 입력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