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의 만남-

재가의 선수행,오늘의 나

2007-09-13     관리자


먼저 평범한 일사상(日常事) 자체가 가장 특이한 일이라는 것을 다짐해 두고, 내가 나의 전문분야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지금까지 살아 왔는가를 나의 작은 선적 체험을 바탕으로 확립된 '오늘의 나'를 통해 여러분께 알려드리고자 한다.

뭐 별일[奇特事]없습니까?
시대가 갈수록 사람들의 머리는 점점 복잡해져 가는 것 같다. 이러는 가운데 주변의 모든 일들이 자기 자신을 짓누르는 느낌을 가지면 가질수록 삶의 활력소가 될 수 있는 일 '뭔가 새로운 일들'을 밖에서 찾고자 하나 자기 주변의 일상사가 잘 정리되지 않는 한 지나고 보면 더 스트레스만 쌓일 뿐이다.
특히 요즈음 세대들은 주발이 되면 주중의 복잡한 일들을 잊어버리고 교외로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만끽하고 피로도 풀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싶어 하나, 오늘날은 자동차 홍수시대가 되어 버려 거의 밤낮없이, 교외로 나갈 때나 다시 돌아올 때나 교통체증에 시달리고 있어 피로와 스트레스가 더 쌓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월요일에 출근을 해도 일이 손에 잘 잡히지도 않고 해서 오전 내내 멍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심지어는 '요즈음 자동차를 살 때 월요일에 출고된 차는 사지말아라!'라고 하는 말도 떠돌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정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기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 내에서 심신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을 것 같다. 즉, 만일 우리가 주말을 조용히 가족과 함께 보냈다면 월요일이 되어 직장에 출근했을 때 새로운 마음으로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당장은 힘들겠지만 이런 태도로 일 년 정도만 살아간다면 자기의 노력에 의해 모든 일들이 제자리를 잡아가게 되고 그렇게 될 때 자연히 상사로부터는 능력을 인정받고 부하직원으로부터는 존경을 받게 되어 따로 승진을 위해 애쓸 필요도 없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사실 이런 태도로 살아가려고 애쓰는 자체가 선(禪) 수행이어서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런 뜻을 잃지 않고 한평생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은 꾸준히 진땀을 흘리며 다리를 틀고 앉았을 때 길러지는 아랫배의 힘이라 확신한다.
벽암록 제26칙에 다음과 같은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한 중[僧]이 백장(百丈)선사에게 물었다. "스님 요즈음 뭐 기묘하고 특이한 일 좀 없습니까? [如何是奇特事]"그러자 백장 스님은 "나홀로 대웅봉[백장 스님이 기거하시던 산]에서 참선하고 있는 일이지![獨坐大雄峰]"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질문한 중이 [무엇을 고맙게 여겼는지] 절을 했다. 그런데 백장 스님은 [이를 긍정하지 않고] 즉시 한 대 후려 갈겼다.
부패가 만연하던 시대에 살았던 백장 선사는 총림(叢林)을 개창(開創)하고 청규(淸規)를 제정하여 선종(禪宗) 새롭게 일으킨 장본인이며 우리에게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굶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선어(禪語)를 제창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마 당시 시대상으로 보아 실참실구하는 스님들보다는 이론적으로 따지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의학도(義學徒)들이 판을 치는 때였던 것 같다. 이 중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귀동냥을 할 대로 다한 끝에 더 이상 별 재미를 못 느끼며 다니다 백장 선사에게 당도해 '뭐 귀가 솔깃한 아직까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것 좀 내놔 보십시오!'하고 시비를 걸었던 것 같다. 그러자 백장 스님께서 [수행의 진정한 뜻을 망각하고 떠돌아 다니는 의학도에게] '독좌대웅봉!'하고 우레와 같은 일구(一句)를 내뱉었던 것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일구는 이 중뿐만 아니라 후대에 길이 길이 우리 모두에게 따로 밖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평범한 일상사가 진정한 특이한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1985년 쯔쿠바 박람회에 갔을 때의 일이다.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일본 전시관을 들렀는데 일본은 이 전시관을 통해 최첨단 기술을 선보임으로써 물질적 차원에서 세계 선진국임을 마음껏 과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람객이 나가는 마지막 출구에 '독좌대웅봉!'이라고 쓴 일본 선사의 선필(禪筆)을 걸어 놓음으로써 일본을 대웅봉에 빗대어 정신적 차원에서도 세계 속에 홀로 우뚝 선 대국(大國)임을 자신만만하게 내세우고 있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요즈음은 일본도 호소카와 내각이 들어서면서 세계가 한 가족[共一家]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한나라만이 혼자 잘 살 수는 없는 시대가 오고 있음을 인식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작게는 우리 주변도 마찬가지로 언제까지나 나만 잘 살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일상사 속에서 자기 일에 충실하면서도 항상 남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자 애쓰는 것이 진정한 수행의 길이라 확신한다.


오늘의 나Ⅰ:대학시절
나는 서강대학교 이공대학 물리학과를 좋은 성적으로 입학한 후 우물안 개구리식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한국사람이나(중국말을 하나 더 가리키겠다는 부모님의 욕심 때문에) 화교 학교를 졸업한 한 친구와 성적에 관해 경쟁적인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런데 이 친구는 이미 미국의 교육제도를 도입한 대만식 교육을 중고등학교 때 받았기 때문에 미국식 교육체제로 이루어진 대학의 풍토와 잘 연결되어 있었다. 따라서 암기식 교육에 길들여져 있던 나로서는 매우 힘겹게 이 친구를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한 학기를 보내고 나니 학문과 삶에 관한 나의 얄팍한 가치관이 뿌리채 흔들리면서 모든 일에 강한 회의가 밀려 들어왔다. 그 후 1년간을 괴로워하면서 헤매게 되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독서하는 습관이 있어서 괴로움이 심화될수록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날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법정 스님이 번역하신 『숫타니파아타』라는 경전을 읽고 답답하던 마음이 시원해짐을 느꼈고 방학이 끝날 때까지 불교에 관한 글들을 섭렵하면서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 석가'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는 방학이 끝나자마자 불교학생회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고 드디어 이 모임의 한 선배를 따라 1975년 10월 셋째 토요일 평생의 스승이셨던 종달(宗達) 노사(老師)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다른 사람에 비해서는 짧을지도 모르나 그러나 값진 방황기를 끝내고 참선수행과 더불어 나의 삶과 학문에 관한 뚜렷한 가치관을 확립해가는 동시에 열심히 학업에도 열중하였다. 그래서 학점이 짜기로 소문난 서강대에서 3학년 두학기를 모두 4.00 만점에 4.00을 받았다. 이는 물론 내가 남보다 뛰어났다라기보다는 새벽 6시에 일어나 참선으로 하루를 열고 밤 10시까지 도서관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참선으로 하루를 닫는 대학생으로서의 일상사에 전념하려는 나의 치열한 선 수행의 결과라 확신한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 불사에 동참하신 김재현 불자님께서 입력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