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의 수호신 - 범일국사

바라밀국토를찾아서,명주군

2007-09-13     관리자


차는 대관령을 향하여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려 오른다. 차창 밖의 산골풍경이 자주 바뀌듯 여러 가지 상념들이 문득 문득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길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것일까?
산자락을 감싸안고 돌아가는 우리의 옛길은 산허리를 뭉툭 잘라내고 강물위로 다리를 놓은 포장도로와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우리의 선조들이 오랫동안 이용하였던 옛길은 단순한 차량의 교통로나 물산의 이동통로가 아니다. 전화나 전보, 자동차나 비행기가 없던 시절에 그 길을 통하여 가정사에서부터 국가의 대사가 이루어졌고 비상시에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민족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길, 그 길은 바로 역사의 길이다, 한강이 단순한 물길이 아닌 역사의 물길인 것처럼.
대관령!
언제 어떻게 생긴 길인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이 이 땅에 터를 닦고 살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생겨나서 수많은 역사를 그 골짜기마다 쌓아온 고갯길을 차로 오르며 나는 신사임당의 '유대관령망친정(踰大關嶺望親庭;대관령을 넘어가며 친정을 바라본다.)'을 생각한다.

慈親鶴髮在臨瀛(자친학발재임영) 늙은신 어머님은 강릉에 계시는데
身向長安獨去情(신향장안독거정) 이 몸은 서울 향해 가는 마음이여
回首北坪時一望(회수북평시일망) 때때로 머리 돌려 북평을 바라보니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정) 흰 구름을 날아 내리고 산은 저물어 가네.

이제 대관령 고갯마루에는 피곤한 다리를 쉬며 짚신 감발을 다시 매만졌던 나무 그늘이나 샘터는 자취가 없다. 그 언저리엔 대관령 휴게소라는 현대식 건물이 들어앉아 바쁘게 오가는 차량들이 쏟아내는 승객들을 부산히 맞고 있을 뿐이다.
아니, 변하지 아니한 곳도 있다. 휴게소에서 북쪽계곡으로 1.5㎞ 가량 들어가면 나타나는 대관령서낭사(大關嶺城隍祠)와 산신각이 바로 그곳이다. 비록 건물은 오래되지 않았지만 서낭당 안에는 대관령 국사성황대신(國史城隍大神)이 모셔져 있고 여기에서부터 강릉단오제는 시작된다. 허균이 1603년에 강릉에 가서 단오제를 구경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적어도 400년 동안이나 대관령 국사서낭은 강릉을 비롯한 영동지방의 사람들에게 모셔져 왔고 지금은 중요 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강릉단오제의 주신(主神)으로 영구히 제자리를 지켜갈 것이다.
국사서낭, 불교의 고승이며 나라의 스승인 국사(國師)가 어찌 서낭당에 모셔졌을까? 다른 곳에는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이 국사는 도대체 누구일까?
대관령 국사서낭은 바로 선문구산의 한 갈래인 굴산사파를 개창한 범일국사(梵日國師)다. 역사의 갈피에 나타나는 비범한 인물들은 대개 신비로운 탄생설화를 갖고 있고 범일국사도 그러하다.

지금의 명주군 구정면 학산리 마을의 한 처녀가 샘터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뜨니 바가지 물속에 해가 떠 있었다. 물을 버리고 다시 떴으나 여전히 해가 바가지 속에 있으므로 이상히 여기면서 물을 마셨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처녀는 태기가 있어 아기를 낳았으나 아비가 없는 자식이라 하여 뒷산 학바위 밑에 버렸다. 산모가 몇일 후 학바위 밑에 가보니 학이 어린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다. 다시 아이를 거두어 키운 뒤 경주로 보내어 공부시키니 나중에 국사가 되었다.
범일국사는 고향에 돌아와 심복사(尋福寺:지금의 신복사터가 그곳이다)와 굴산사(掘山寺)를 창건하고 고향을 지키며 불교를 전파하다가 죽은 다음 대관령의 서낭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상에 나타난 범일국사의 일생은 좀 다르다.
범일(梵日:810∼889)국사의 성은 김씨, 경주 계림 출신으로 명주도독을 지낸 김술원의 아들이다. 태양을 머리 위로 받드는 태몽을 꾸고 13개월만에 낳았으며 15세에 출가하여 22세 때에 당나라로 건너갔다. 제안(齊安) 스님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곧 도이다.'라는 말에 크게 깨달았다.
38세에 귀국한 후 명주도독의 청으로 굴산사에 머물며 40여년간 후학들을 교화하였고 여러 왕들이 국사로 청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항상 '부처의 뒤를 따르지도 말고 다른 사람의 깨달음도 따르지말라'고 가르치며 자기 스스로의 깨침을 중시하였고 80세로 입적하였다.
이처럼 범일국사의 탄생에 대해서는 상반된 이설이 있지만 역사상으로는 강릉지방을 중심으로 선종을 선양하며 수행하다 이곳에서 입적하였고 그러한 국사의 공덕을 잊지 못한 후세 사람들이 대관령 국사서낭으로 모시게 되는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강릉단오제는 음력 3월 20일부터 제사에 소용될 신주(神酒)를 빚기 시작하여 단오 다음날인 5월 6일까지 약 50여일이 걸리는 민속행사로 지금도 이 때가 되면 전국의 장돌뱅이, 서커스단이 거의 모이고 곳곳에서 단오굿, 씨름판, 윷놀이 판이 벌어지며 강릉 관노가면극, 그네뛰기 등도 열린다.
대관령에서 국사서낭을 모셔오는 날은 음력 4월 15일이며 국사서낭의 부인인 대관령 국사여서낭이 있는 홍제동 서낭당에 함께 모시게 되는데 여기에도 재미있는 구전설화가 있다.
옛날 강릉에 정씨가 살았는데 나이 찬 딸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꿈에 국사서낭이 나타나 딸을 달라는 청이 있었으나 서낭신에게는 시집보내지 못하겠다고 거절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마루에 앉아 있던 딸을 업고 달아났다. 국사서낭은 호랑이를 사자로 보내어 딸을 데려다 아내로 삼았고 정씨 집안에서는 딸을 되찾으려 대관령 서낭당에 찾아갔다. 소녀는 서낭과 함께 서 있었으나 이미 혼백은 없고 몸만 비석처럼 서 있었다. 정씨는 화공을 불러 딸의 모습을 그려 붙이니 딸의 몸이 땅에서 떨어졌다. 호랑이가 딸을 업어간 날이 음력 4월 15일이므로 이 날 대관령에 올라가 국사서낭을 모셔다가 정씨 집(지금의 최씨 문중의 소유이다) 앞에서 잠시 쉰 뒤 여서낭당에 한께 모시고 제사하는 것이다.
지금 굴산사터에는 당간지주(보물 86호)와 범일국사의 것으로 믿어지는 부도(보물 85호)가 있고 처녀가 물을 떴다는 석천(石泉), 아이를 버렸었다는 학바위가 남아있으나 범일국사가 창건했다는 굴산사는 이제 그터만 남아 무심한 농부의 생계를 이어주는 농토가 되었다.
신복사도 마찬가지다. 삼층석탑(보물 87호)과 석불좌상(보물 84호)만 그터에 남아 천 년 전의 그 자리를 증언하고 있고 솔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만 옛날과 같을 뿐이다.
그러나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중생을 가르친 공덕이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볼 때 다시 중생의 큰 스승이 이곳에 머물며 불법진리의 감로비를 내리기를 기다리는 것은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범일국사가 다시 살아오신 듯 사부대중이 구름처럼 모이는 감격적인 광경을 언덕 위 거대한 당간지주 아래에서 조용히 그려본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 불사에 동참하신 김재현 불자님께서 입력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