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형상으로 표현된 붓다(Ⅰ)

내가 본 불교미술

2007-09-13     관리자


문화와 역사적인 배경
부처님을 스투파와 스투파의 외형적인 장식으로 표현했던 초기의 개념은 초기의 경전에 표현된 관념과 상당히 일치한다. 석가모니불은 이들 초기 경전에 분명하게 역사적인 인물로 등장하지만 경전을 편찬한 사람들은 어떤 전기적(傳記的)인 의미에 있어서 부처님을 특징적인 역사적인 인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부처님의 생애를 일관성 있게 다룬 부분은 부처님의 득도와 첫번 때 설법, 마지막 여행과 열반에 들어가는 사건들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석가모니불 이전의 부처님들의 생애에 예시된 바와 같이 통상적인 행위와 사건의 행적에 분명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결과적으로 이승에서의 석가모니불의 생애는 일종의 특수한 행위이거나 단순히 보여줌에 머무르고 만다. 석가모니는 숙명적으로 운명지워진 사람인 여래(如來)로 바로 그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바로 그런 방법으로 온 사람이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특히 스투파와 보리수와 같은 상징물에 반영된 부처님의 상은 초월과 보편성이라는 동일한 개념에 일치한다. 석가모니불이 스승으로서, 임금으로서, 그리고 붓다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지만 초기 불교신자들은 그의 찰라적이고 역사적인 인물성보다는 그가 구현하고 있는 이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처님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그의 가르침에 관련해서 부수적으로 기록된 것이거나 아니면 그의 불성(佛性)을 증명하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이었다. 이러한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사건들이 아주 옛날에 네가지 사건의 두짝으로 배열했다.
즉 부처님생애의 4단계인 출생, 득도, 첫 설법과 열반이 그것인데 이들은 각각 룸비니, 보드가야, 녹야원과 쿠시나가라에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부처님이 특별한 기적을 행했던 네 개의 도시인 스라바스티, 라자그라, 바이살리와 산카스야에 연관이 되어 있다.
이러한 장소에 관련된 이야기와 전설들은 의도적으로 수집한 것이 석가모니불의 완전한 전기를 만들어 내는 첫 동기를 마련해 주었을 것이다. 대 여섯 개의 경전 이외의 그러한 전기가 부처님의 전생에 관한 이야기와 이미 경전에서 이용할 수 있게 된 자료를 혼합해서 만들어졌다.
산스크리트어로 남아 있는 이러한 초기의 두 전기인 「라리타비스타라」와「마하바스투」의 경우를 보면 전생에 관한 관심이 지배적인 경향이었으며 전자는 석가모니불의 이승에서의 마지막 생애를 첫 설법까지만 다루고 있고 후자는 카스야파[迦葉波] 삼형제 브라만을 개종시키는 유명한 이야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서기 2세기에 가서야 출생과 열반 그리고 유물을 분배하기까지의 정설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사건을 망라하는 일관성 있는 전기가 비로소 만들어진다. 이것을 부다카리타[佛本行集經]라고 하는데 하나는 중국어로 남아 있고 다른 하나는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로 남아 있다.
부처님을 신인동형(神人同形)의 상으로 처음 제작한 것과 이승에서의 부처님의 실생활을 일종의 반(半)역사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서로 동시대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두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아쇼카 대왕의 제국은 그가 죽은 지 50년 이내에 해체가 되어 승가 왕조가 계승했다. 이 왕조는 특별히 불교를 보호했다고는 여겨지지 않으나 바하루트와 산치 같은 불교도 정착지를 발전시켰다. 승가 왕조는 아쇼카 대왕이 첫 불교 교단을 장려했던 인도대륙의 서북지방은 장악할 수가 없었고 간다라 지방(현재의 동부아프가니스탄과 서북부 파키스탄)은 박트리아 출신 그리스 왕조가 점령했다.
이들 그리스 침략자들의 절충적인 관심이 불교 전설에서는 밀린다라고 알려진 메난데르의 경우에 아주 잘 설명되어 있다. 현재의 시아콜르의 그리스 통치자인 그가 불교 승려나 나가세나[那先]와 가진 대화는 아마도 "밀린다의 문제[那先比丘經]"라고 알려진 불교의 신앙에 관한 초기 변증론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 특별한 왕이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진짜 관심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이들도 머지않아 북쪽에서 점차로 남진하는 또다른 종족에 의해서 쫓겨나게 되는데 이들은 인도의 전설에서는 사캬족, 보다 정확하게는 인도 스키타이족이다. 인도의 전설에 의하면 서기 원년 경에 쿠사나라는 제국에 의해 쫓겨난다.
쿠사나 제국에는 그리스, 코로스트라이아교, 불교, 자인교와 힌두교 등 다양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절충주의는 그들의 동전에 모든 종류의 종교적인 상징물들을 자유롭게 이용한 데에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의 제일 위대한 왕은 카니스카 1세로 그는 일관성 있는 석가모니불의 전기가 처음으로 등장했던 서기 원년 첫 50년간에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쿠사나 제국의 서부 지역이 페르시아와 그리스와 인도의 문화적 전통이 지배적인 상이한 문화적 유산을 가진 종족에게 속해 있던 반면에 간지스와 아무나 강 유역은 문화적으로는 주로 인도적이었다. 인도 동부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는 마투라로 유명한 인도 귀족 가문의 수라세나의 수도였다. 트롤레미도 이 도시를(그의 『지리론』에서) 성스러운 도시로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힌두교와 불교와 자인교가 번창하고 있었다. 주요 힌두교의 신상들과 마찬가지로 불상들과 '정복자'의 상들이 신인동형으로 처음 만들어 진 곳이 바로 이 광범위한 쿠사나 제국의 영토 안이었다.
400년 이상이나 불상이 없이 지냈던 불교가 왜 이런 불상의 필요를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일은 왜 완전한 전기를 요구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스투파 자체가 벌써 적합한 예배의 대상을 제공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예배적인 종교의 발흥이 불상이 필요했던 원인이 되었다고는 말 할 수 없다.
아마도 이 시대에 예배로부터 초월적인 이상과 현현된 신이나 현현된 붓다나 정복자에로의 이행이 인도의 고급 종교에 일어났는지도 모른다. 독특한 종류의 '개인 숭배'가 나타나서 그것이 예술과 문학에 표현되었다.
이 장에서 우리는 간지스, 아무나가 상류의 인도적 배경에서, 북서부의 간다라 지방의 절충적인 배경에서, 그리고 남쪽의 안드라 지방의 배경에서 발상된 불상 표현의 상이한 형식을 다루게 된다. 이 지역은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도 중앙 아시아, 인도 대륙, 네팔과 티베트 그리고 동남아 전역에 걸친 그 뒤의 발전에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각 지역을 별도로 다루는 것이 편리하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 불사에 동참하신 김재현 불자님께서 입력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