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무명의 두꺼운 껍질을 벗겨 주리오

선가귀감 강설 3

2007-09-13     관리자

글 | 지묵스님(칠보산 아란야 선원장)

제3장

然 法有多義 人有多機 不妨施設
그러나 법에는 여러 뜻이 있고
사람에게도 여러 근기가 있어서
(언어문자의) 시설이 방해되지 않느니라.

법이란 일물(一物)이요, 사람이란 중생이니라. 법에는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의 뜻이 있고, 사람에게는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근기가 있느니라.
이런 까닭에 문자 언어의 시설이 방해되지 않느니라. 이것은 소위 공적으로 바늘 하나도 용납하지 못하지만 사사로움으로는 마소가 오고 간다고 한 것이니라.

중생은 비록 (부처가) 원만하게 이뤄진 것이라고 말하나, 생판 지혜의 눈이 없어서 윤회를 달게 받는 까닭으로, 만약에 출세의 금비(금칼)가 아니면 누가 무명의 두꺼운 껍질을 벗겨 주리오.

고해를 넘어 극락의 언덕에 오르게 된 것은 모두가 큰 자비의 은혜로 된 것이니라. 그런즉 갠지스 강 모래알만큼 수많은 신명(身命)을 바치더라도 만에 하나 보답키 어려우니라. 이로써 널리 (부처자리의) 신훈에 올라 불조의 깊은 은혜에 감동할지니라. 송하되,

王登寶殿 野老謳歌
왕이 보전에 오르니
촌 늙은이가 (기뻐서) 노래를 부르네

강설
왕은 법사이고 촌 늙은이는 청중이다. 법사가 법상에 올라서 사자후 법문을 토함에 청중이 환희심을 낸다는 뜻이다.

법이란 일물(一物)
법(法)이란 무엇인가. 다르마(dharma)이다. 다르마란 무엇인가.
쓰임새에 따라 여러 뜻이 있는데 우선 유위(有爲)법과 무위(無爲)법으로 살펴본다. 이름과 모양이 있는 세계는 유위법 세계이고 이름과 모양이 없는 세계는 무위법의 세계이다. 중생의 삼독(三毒) 세계가 유위법이고 부처의 진리 세계가 무위법이다. 다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서 말하는 법은 무엇인가. 모양과 이름이 정해진 순간 법이 성립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 보듯이, 법이란 나에게 왔을 때 꽃이 되고 너에게 갔을 때 꽃이 되는 것처럼, 모양과 이름이 마음에 찍힌 순간 이뤄진 것이다.

불변수연(不變隨緣)
근본과 현상, 진리와 현실의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한 마음의 두 문을 『기신론(起信論)』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일심(一心)에 이문(二門)이 있으니, 하나는 불변의 진여문(眞如門)이고 다른 하나는 수연의 생멸문(生滅門)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컴퍼스로 둥근 원을 그릴 때에 중심 바늘은 불변의 몫이고 차츰 그려지는 바깥 테두리는 수연의 몫이다. 우리 탐진치 삼독의 중생심은 불성을 근거해서 있다는 말.

돈오점수(頓悟漸修)
깨달은 도인의 돈오와 미혹한 중생의 점수로 나눠 볼 수가 있다.
우리가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부처가 되는 순간 부처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부처인 것을 확인한 과정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점차로 단계별 수행을 통해 이뤄진다는 견해는 중생의 입장이다.
선지식 가운데 혹자는 돈오를, 혹자는 점수를 주장한다. 이것은 자신의 경지에서 보면 다 돈오이지만 중생의 교화 차원에서 점수를 말하기도 한 것이다. 점수를 주장한다고 해서 중생이라고 보는 것은 오해이다.

불방시설(不妨施設)
방해되지 않는다니 무엇이 방해되지 않는가.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이고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다. 언어문자에 걸리지 않는 선지식의 법문이다. 유(有)를 말하나 유(有)에 걸리지 않고 무(無)를 말하나 무(無)에 걸리지 않는다.
법사는 전체 법문이 이렇게 유(有)와 무(無)에 걸리지 않는 법문을 하는 선지식이어야 한다. 유(有)에 걸리고 무(無)에 걸린다면 선지식이 아니다.

49재 천도재 법문에서 육신은 죽으나 마음은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육조 스님과 보조 국사가 꾸짖은 유(有)에 걸린 법문의 예이다. 언어문자는 이렇게 방해된다.

금비(金硼)

원래 의미는 메스(수술용 칼)인데 여기서는 살활(殺活)이 자유자재한 반야 지혜의 검을 나타낸다. 공부인은 선지식의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대오(大悟)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은 일체의 것이 불생불멸(不生不滅)임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법화경에는 진리의 삼인(三忍)이 있다. 첫째, 법인(法忍)은 진리의 깨달음이다. 둘째, 신인(信忍)은 진리의 깊은 믿음이다. 셋째, 순인(順忍)은 진리의 순순한 순응이다.

신훈(新熏)
본래 부처라는 본각(本覺)과는 달리, 수행 단계를 거쳐 부처가 된 시각(始覺)을 말한다. 신훈은 새로 훈습함이다. 훈습은 송편을 찔 때에 비유하는데, 솔잎을 깔고 송편 떡을 찌면 은연중 솔향기가 배어있는 것과 같아서, 이와 같이 선지식의 청정한 가르침을 통해 흑업을 청정히 맑혀 부처가 된 것을 말한다.

제4장

强立種種名字 或心或佛或衆生
不可守名而生解 當體便是 動念卽乖

굳이 갖가지 이름을 성립시킨 것이 혹 마음이며, 혹 부처이며, 혹 중생인지라,
이름에 집착하여 알음알이를 내지 말지니,
(당체) 바로 그 자리인데 생각을 움직이면 즉시 어긋나느니라.

일물(一物)에 굳이 세 가지 이름자를 성립시킨다는 것은 (경전의) 교학(敎學)이 부득이한 경우니라. 이름에 집착하여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는 것은 또한 선(禪)이 부득이한 경우니라.

한번 들어올리고 한번 내려놓으며, 성립시키고 깨뜨린 것은 모두 법왕의 법령이 자유자재한 것이니라. 이것은 위(보리)는 열매를 맺고 아래(중생)를 일으키려는 것으로 불조의 일[一大事因緣] 자체가 각기 같지 않음을 말한 것이니라. 송하여,

久旱 逢佳雨 他鄕 見故友
오랜 가뭄에 좋은 비를 만나고
타향에서 고향 친구를 보는구나

강설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나고 외로운 객지에서 옛 고향 친구를 만났다는 것은 언어문자가 핵심을 찔러 가슴에 와 닿았다는 뜻이다.

강립(强立)
마지못해서 알면서 짐짓 범한다는 뜻. 입니입수(入泥入水)란 말이 있다. 연꽃을 얻기 위해서는 발을 벗어 붙이고 진흙 속에 들어가 물에 빠진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불보살이 중생을 위해 억지 언어문자를 쓴 것은 언어문자의 해독이 심한 줄 알면서도 대자대비심에서 짐짓 범한 것이다.

선(禪)의 부득이한 경우
모양과 이름을 떠난 것이 선의 세계이다. 헌데 선사의 어록이 교학의 교과서보다 많이 쏟아져 나온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낙서금지를 강조하다 보니 낙서보다 많은 낙서금지 푯말이 나타난 경우이다. 선(禪) 역사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동념즉괴(動念卽乖)
생각이 움직이면 바로 어긋난다는 뜻. 한 생각 머뭇거리면 천길 벼랑에 굴러 떨어진다. 그대로가 다 옳다. 바로 그 자리인데 무얼 작위(作爲)하려 하겠는가.
갖추어서는 개구즉착(開口卽錯) 동념즉괴(動念卽乖)로, 입을 뻥긋 열면 착오이고 생각을 움직이면 어긋난다.

지묵 스님|1948년 전남 장흥에서 출생. 1976년 조계산 송광사로 출가하여 법흥 화상을 은사로 득도한 이후 각종 수련회를 이끌고 걸림 없는 다양한 글쓰기, 방송 매체를 통한 생활 불교를 전파하고 있다. 『초발심자경문(난자집)』, 『산승일기』, 『나마스테』, 『날마다 좋은 날』, 『봉주르, 길상입니다』, 『초발심자경문(영인본)』, 『죽비 깎는 아침』 등 20여 권의 책을 펴냈다. 현재 수원 아란야 원장으로 대중들과 더불어 수행정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