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 버지니아 26만 평에 국제총림‘아란야사’ 건립 발원

워싱턴 보림사 경암 스님

2007-09-13     관리자
글· 남동화 사진 최배문

불교정화 당시 조계종의 수문장 역할을 하기도 하셨던 경암 스님은 1982년 3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군사정권 시절이었던 당시 김재규와 친하게 지냈기 때문에 대통령 시해사건을 교사했다는 죄목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그 무시무시한 삼청교육대에 끌려갈 판에 도망치듯 온 곳이 미국이었다.

헬로우~, 땡큐~! 영어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처지에서의 고행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여름에는 비가 새고 난방조차 안 되는 볼티모어의 낡은 아파트에서 작은 석유난로 하나로 한겨울을 보냈다. 삭발을 해야 하는 날에는 공동화장실이 있는 버스정류장까지 45분간을 걸어가서 머리를 깎아야 했다.

궁색하기 그지없는 생활이었지만 그나마 감사하며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달마 스님께서도 숭산 보림사에서 9년간 면벽하여 혜가를 만나 중국에 선을 펴셨는데 출가수행자로서 이쯤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부처님 오신 날 만등불사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일은 1983년 부처님 오신 날 만등불사였다. 미국 땅 볼티모어에도 봄이 익을 무렵 먹고 사는 것도 빠듯한 터였지만 부처님 제자로 부처님 오신 날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한 보살님이 기증한 관세음보살상을 주불로 모시고 7일간 참회기도를 하고 꼬박 일주일 동안 아파트 벽에 수성물감으로 등을 그렸다. 연등 5천 개, 팔각등 3천 개, 수박등 2천 개, 만등을 그려놓고 관세음보살 앞에 촛불을 켜고 보니 눈물이 주루룩 흘렀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며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정진하겠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왔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적막했다. 3천 배를 마치고 깜빡 잠이 들었는데 만공, 동산, 경허, 금호 스님 등 큰스님들께서 만등불사 회향식에 오셔서 대중공양을 하시며 ‘보림원(寶林院)’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그리고 갑자기 밖에서 천 명이나 되는 장수들이 불러 나가보니 출가 본사인 마곡사 대적광전의 신중님들이었다. 큰스님들을 모시는 임무를 맡아서 왔는데 앞으로 ‘너 경암을 보호하기 위해 신중을 파견할 테니 승계를 철저히 지키라’고 당부한 뒤 사라졌다. 꿈을 꾸고 나니 힘이 불끈 솟았다. 그 뒤 버지니아로 이사를 했고 지하실에서 6개월, 다 버려진 집에서 4년을 보냈지만 힘든 줄을 몰랐다.

세월이 흘러 한국의 정권이 바뀌고 노태우 대통령의 6.29선언 후 1988년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후 스님은 한국과 미국, 일본, 캐나다를 순방하며 수차례의 선서화전(禪書畵展)을 가졌다. 선서화전은 대성황이었다. 뛰어난 글과 글씨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 그 동안 출가수행자로 잘 살아온 스님의 덕화와 넉넉한 마음씀씀이로 인해 맺어진 여러 지인들과의 친분 덕분이기도 했다.

덕분에 보림사를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여 절 모양새를 갖추고, 이후 천불전 법당을 완성하여 신도들을 위한 매주 법회는 물론이려니와 인근의 조지워싱턴대학, 조지타운대학, 메디대학, 조지맨션대학 등의 종교학과 학생들이 보림사를 수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보림사에 등록된 신도 수는 현재 1,000여 명에 이른다.

국제총림 아란야사

제주도 남원읍 신흥리 부농의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스님은 소시적부터 한문을 공부한 덕분에 열 살 이전에 천자문과 대학, 소학, 논어, 맹자를 마쳤다. 그림에도 특별한 소질이 있었던 터라 화조(花鳥)와 산수(山水) 등 동양화 화첩을 익혔고, 한문에 뛰어난지라 화제(畵題)에도 능했다.

1958년 마곡사 일현 스님 문하에 출가하기 전인 1956년 광주 무등산 무등사에 살면서 의제 허백련 선생께 그림 그리는 법과 순서를 익힌 덕분에 그림의 이치를 터득했다. 스님은 워낙이 속필인지라 남들 1년 남짓 걸리는 것이 1달이면 되었다.

“칠하고 또 칠하면 그것은 그림이 아닙니다. 붓이 한 번 가면 그만이지 두 번 가면 안 되는 것이지요.”

스님의 붓 끝에는 꽃이 피고 새가 울기도 한다. 사군자, 산수, 코끼리, 사슴, 학, 용화조, 달마, 한산습득 등 그림 덕분에 큰 불사도 하게 되었다. 2003년에는 워싱턴 지역 66번 종점 웨스트 버지니아에 213에이커(한국 땅 26만 평)를 매입하여 보림사 국제총림 아란야사를 건립하고 있다.

“15년 계획으로 추진 중인 국제총림은 현재 100명 가량을 수용할 수 있는 안내센터(3층)를 지었고, 강에 다리를 놓는 다리불사 중입니다. 앞으로 지어질 국제총림에는 종교부지에 선원과 대웅전, 율원이 지어지고, 교육부지에는 불교대학과 불교문화원, 박물관 등이 건립될 것입니다. 국제총림은 달마 대사가 9년 면벽 끝에 중국불교의 혁명을 일으켰듯이 미국불교 혁명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역사학자 중 한 명이었던 아놀드 토인비가 20세기가장 중요한 사건을‘동양의 불교가 서양으로 건너온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은 동양사상, 그 중에서도 불교에서 그 해답을 찾고 있습니다. 국제총림은 앞으로 한국의 불교를 제대로 전하고 우리 후배들에게는 흐뭇한 아지트가 될 것입니다.”

부처님 법이 있으면 절은 절로 지어지는 것

앞으로 들 예산만도 천만불이 드는 대작불사라고 한다. 한국도 아니고 미국 내에 한국식의 선원과 강원, 율원을 두루 갖춘 국제총림을 건립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지만 경암 스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이내 마음이 턱 놓인다.

스님 말씀 왈 “부처님 법이 있으면 절은 절로 지어진다”는 것이었다. 하긴 경암 스님이 애초에 포교를 위해 미국에 온 것도 아니고 불사를 하기 위해 미국에 오신 것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스님은 그저 나무가 바람에 일렁이는 소리, 새가 우는 소리, 자연이 말하는 것을 듣고 그리며 자연인으로 살고 싶었다. 사실 요즈음도 스님은 보림사 2층 당신의 방에 올라가면 거의 온종일 내려오시지 않으신다. 그런데 살다보니 부처님 말씀이 절실하게 필요한 곳이 바로 이곳 미국이라는 생각에 시작한 포교요, 불사였다.

단돈 3천불과 목탁 하나 들고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들어와 보림사를 세우고, 미주불교신문을 발행하고, 대원불교대학 미주분교를 수용하고, 천불전을 건립하고 최근 국제총림 건립 부지를 확보하고 불사를 시작하기까지 하해와 같은 부처님의 은혜와 가피를 온몸으로 느낀다는 경암 스님. 스님은 다만 남은 여생은 출가수행자로서 선배의 도리를 다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비록 미국 땅에 와서 혹독한 고생을 했지만 후배들을 위해 넉넉한 수행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은 것이다.

한국불교가 미국에서 제대로 뿌리내리려면

미국 내에는 현재 100여 개의 한국 사찰(주로 L.A와 뉴욕을 중심으로 한 동부에 몰려 있음)이 있다고 한다. 거주하는 스님들은 140~150여 분 정도이고, 80% 이상이 조계종에 속한다. 그러나 대부분이 종단의 지원에 의하기보다 스님 개인 원력에 의해 사찰이 건립되고, 스님 혼자서 모든 일들을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겪어야 할 어려움도 많다.

아울러 한국불교가 미국에서 뿌리를 제대로 내리려면 아무래도 언어 장애가 없고 미국사회를 잘 아는 사람들이 많이 출가하여 이들이 최전방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런데 다행히 7년 전에 출가한 해인 스님은 경암 스님의 상좌로 코넬대학을 졸업하고 필라델피아대학 종교학과에서 불교학을 공부한 교포 1.5세(고등학교 1학년 때 미국 유학)로 촉망받는 신세대 스님이다. 올 봄 대학을 졸업하는 스님은 한국에 나가 해인사 율원에 입방하여 4~5년간 공부하고 다시 미국에 돌아올 예정이다. 출가 수행자의 모든 기반은 계율이기에 그 기틀을 바로 잡고 한국불교를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는 경암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서다.

1964년 미국을 방문한 서경보 스님 이후 삼우 스님과 숭산 스님, 법안 스님, 대원 스님, 도안 스님, 현호 스님에 의해 어느 정도 뼈대가 마련되었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 스님 경암 스님의 크나큰 원력에 의해 건립되고 있는 국제총림 ‘아란야사’가 미국 내 한국불교를 제대로 채워주는 새로운 메카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길 기원해본다.

취재 정리|남동화 dddd017@hana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