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미술의 발생

내가 본 불교미술

2007-09-12     관리자

불교 미술은 석가모니불의 열만으로 그 막이 열렸다고 말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열반하기 전에는 예배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예배의 대상물을 만들거나 장식할 필요가 없었다.
석가모니불이 열반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장례식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아난다에게 물었을 때 그는 대왕의 장례식과 같이 하면 된다고 대답했다.
"대왕의 시신을 무명으로 싸고 그 위에 5백벌의 옷을 입혀서 철로 만든 상자에 넣고 상자에 식물성 기름을 가득 채우고 이중으로 된 쇠뚜껑을 덮고 모든 종류의 향내 나는 나무들을 그 위에 쌓고 화장을 한 뒤에는 우유를 가지고 불을 끄고 뼈를 금으로 만든 화병에 넣어서 십자로가에 큰무덤을 만들어 묻고 그 무덤을 파라솔, 승리의 깃발, 향료, 화환, 분과 음악으로 영광되게 만들라. 그 무덤을 명예롭게 만들고 숭배하고 예배하는 큰 잔치를 베풀어라."하고 말했다.
『열반경』에 대충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석가모니불은 이런 장례를 받았을 것인데 마지막에 가서 쿠시나가라를 포함한 여덟 개의 나라가 석가모니불의 유해의 소유권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은 여덟 나라가 석가모니불의 유해를 팔등분해서 나누어 가졌는데 다른 마을에서 온 한 브라만 소년이 화장한 재를 자기 마을로 가져가 결국에는 열 개의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를 모신 무덤(stupa)이 만들어져서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은 예우와 숭배를 받았을 것이다.
아쇼카 대왕 시대인 서력 기원전 3세기에도 석가모니불과 다른 부처님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런 무덤이 존재 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사실 위대한 사람들을 장례하기 위해서 이런 식의 무덤에 안장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석가모니불의 이승에서의 행적에는 네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다.
첫째는 아버지의 매개가 없이 기적적으로 세상에 태어났고, 가야에서 득도(bodhi)하고, 그의 교리를 설법하기로 결심하고, 그가 이승을 떠나면서 그의 교리(dharma)로 하여금 다음의 부처가 도래할 때까지 이승에서 그를 대신하도록 남겨두었다.
이러한 틀 속에서 석가모니불이 룸비니에서 탄생해서 가야에서 득도하여 녹야원에서 첫 설법을 하고 쿠시나가라에서 열반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경전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이 네 곳이 석가모니불 열반 뒤에 급격하게 중요한 순례지가 된다.
인도의 역사상 연대가 분명한 시기는 아쇼카 왕 시대인 서력 기원전 3세기이다. 이때는 아쇼카 왕의 깊은 신심과 태평시대 덕분에 불교가 인도 전역에 번져나갔다. 특히 인도의 여러지역에 흩어져 있는 무역의 통로를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상인들을 따라서 초기의 승려라 할 수 있는 떠돌이 수행자들이 이동을 했다.
상인계급이 신흥불교의 후원자가 된 것은 중요한 일이다. 불교의 승려 집단이 처음에는 승려들이 보급품 공급을 위해서 도시나 마을 근처에 정착을 했으나 이제는 주요 무역통로상에 세워져서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주고 재물 보시를 받았을 것이다.
석가모니불 생존시에 부자들이 그와 제자들을 위해서 정사를 지어 그들이 마음대로 사용하게 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교외에는 정사가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그 나라의 왕이 불교교단에 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명한 의사가 희사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사가 여러 군데 있었는데, 특히 우기가 되면 여행을 하기 어렵기 때문에 승려들이 6월부터 9월까지 한데 모여서 공동생활을 하였다.
이러는 동안에 승려들이 임시변통으로 움막, 독방과 모임을 할 수 있는 큰 홀을 짓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석가모니불 생존시에 계율이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필요에 따라서 확장되고 발전되어 갔다.
불교의 성지로 알려진 네 곳이 점점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는데 아쇼카 왕의 비석 명문에 따르면, 그러한 장소 중 최고 관심사는 붓다의 유해를 간직한 스투파였다고 한다. 스투파를 신봉한 사람들은 평신도들이었으며 승려들은 엄격한 도덕과 명상과 고행을 통해서 득도하는데 더 전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투파 신앙은 급속도로 확산됐으며 스투파는 불교의 중심적인 신앙의 대상물이 되었다.
기원전 2세기에 연유하는 인도 서부의 석굴사원들은 그 안에 큰 신전이나 사원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기독교 성당을 닮았다. 사원의 중심부 공터는 장식된 기둥머리를 가진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고 맨 끝에 스투파가 있는데 그 스투파는 벽에 맞대여 있지 않아서 신자들이 탑돌이 하는 식으로 돌게 되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스투파 안에서 예배를 받는 사람은 석가모니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배를 받는 것은 붓다라는 관념이다.
이 관념이 옛날에는 이전의 붓다들 속에 나타났고 최근에는 석가모니라는 붓다 속에 나타났었다.
이것이 법보화신(Dharmakaya)으로 무덤같이 생긴 상징물(스투파) 속에 현현했다고 믿는다.
신자들에게 그러한 '현신'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스투파에는 석가모니의 생애 중에서 중요한 장면을 설명하는 조각장식이 주를 이루게 된다.
석가모니가 아직 득도를 하지 못하고 보살(Bodhi+sattva)로 있던 시절을 그리는 초기 조각에는 석가모니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 않다.
비어 있는 공간이 있거나 아니면 보리수 (그의 득도)와 스투파(그의 열반) 같은 판에 박힌 상징물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석가모니를 붓다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는 초상화를 그릴 수 있는 육체적인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이처럼 초기 불교 예술가들은 불성을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집했었다.
초기 스투파를 보면 처음부터 불성은 윤회전생을 거듭하는 보살의 긴 정이라는 생각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의 전생에 관한 장면들과 가르침이 이런 스투파의 주위에도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이 산치의 스투파들이다.
불교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 스투파는 불성의 최고 상징으로서 그 절대적인 중요성을 한번도 상실한 적이 없다. 뒤에 가서 붓다가 득도한 고요의 모습을 나무나 돌, 청동으로 조각상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 발달했지만 그래도 스투파는 그 중심적인 위치를 양보한 적이 없다. 마치 기독교에서 십자가처럼, 불교의 중심적인 상징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곧 중국.한국.일본에 수없이 남아있는 석탑과 목탑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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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길님은 유네스코 문화부장, 연구위원을 역임하였으며 우리 문화를 영역하여 해외에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현재는 한양대 홍익대에 출강하며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 불사에 동참하신 황윤정 불자님께서 입력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