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판위에 새겨지는 행복

부처님 그늘에 살며 생각하며,판화가 강행복

2007-09-12     관리자


1년 가운데 1월의 느낌은 뭐랄까. 온갖 번뇌망상 훌훌 털어버린 겨울나무 같다고 할까. 아무튼 1월은 말끔히 닦은 거울과 같다는 느낌이다.
지난 해 봄 판화가 강행복(43세)씨를 처음 만났다. 주위의 몇몇 사람들의 얘기에 의하면 그는 불교판화를 하는 사람으로 앞으로 기대가 촉망되는 젊은 작가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 작업을 구도삼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전시회를 통해 본 그의 작품들은 역시 여느 작품들과는 달랐다. 특히 쑥쑥 솟아오른 높은 준령들을 나무에 새겨 찍어낸 작품들은 하나의 선구(禪句)같기도 했다. 마치 은산철벽 앞에 맞닥뜨려 있는 듯 싶었다. 그래 내년 1월호 쯤엔 저 작품들을 불광 가족들에게 보여주자 .
지난 연말 만난 강행복씨는 역시 자신의 참모습을 찾아가는 구도자였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 일구어진 모습을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조심스럽게 형상화시키고 있었다.
그야말로 그가 불교를 만나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응용미술과를 졸업한 그는 전공을 살려 모 유명 패션회사에 취직을 했다. 쫒기다시피 바쁜 7년 동안의 직장생활 후 그는 독립하여 개인 디자인 사무실을 열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사업에 실패했던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실패라기보다 외부적인 요인이 컸다. 억울하다는 생각과 분노로 가득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미 아내와 자식이 있는 그였지만 그를 아는 사람이 가장 적은 전라남도 광주를 택해 은거를 했다. 1987년의 일이었다.
외부와 일체연락을 끊고 살면서 산을 찾았다. 산마다 있는 절을 찾게 되고, 시간 나는 대로 불교 책들을 읽게 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많은 감동을 주고 그를 정화시켜준 것은 법정 스님의 책들이었다. 광주에 있는 원각사를 자주 찾아 108배를 하고, 불교 공부 모임인 금륜회에도 나가 법문도 들었다. 태안사 청화 큰스님께 '각명(覺明)'이라고 하는 법명도 받았다. 그 모두가 자연스러운 이끌림이었다. 무소유와 함께 차분히 가라앉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날카로운 성격이 유연해지고 조급한 성격도 느긋해졌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평온해진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자신을 비추어보기 시작했다. 일렁임 없는 맑은 물에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나온 과거의 자신을 돌이켜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40이 가까운 나이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숨가쁜 하루하루였던가. 무었을 위해. 그리고 그로 인해 얻어진 것들이 무엇이었던가. 그는 스스로 사업의 실패를 지금도 자신의 일생에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모든 것을 하나하나 놓고 비움으로써 차오르는 충만한 기쁨을 맛보게 된 그는 그 기쁨과 행복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그것은 역시 자신이 그동안 계속해오던 방법대로 목판과 석판 실크스크린등의 판화기법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내면에 비추어진 불교의 가르침의 내용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부처님 말씀을 우리가 전해야 하듯, 강행복 씨 그는 처음엔 그 일을 많이 고민했다. 대중들이 쉽게 접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기법으로 색감도 다채롭게 표현해 보았다. 대중들의 반응은 꽤 좋았다.
자신이 말하고 싶어하는 뜻을 어느 정도는 이해해주는 듯 싶었다. 그러나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내용을 남에게 전하려고 하면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많이 해야하듯, 조금은 번거롭고 요란한 그런 표현방식이 아니었나싶다. 4년 전, 그가 처음 표현해낸 불교의 세계는 다소 그런 느낌이었다. 요즈음은 굳이 의도적인 포교라기보다 자신이 느낀 내면의 세계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기법도 주로 목판을 통해 하고 색도 주로 먹색만을 쓰고 있다. 훨씬 차분하고 간결해서 좋다.
앞으로는 주로 목판을 이용하려고 한다. 소박하고 투박하면서도 거친 재질이 마음에 맞는다. 요즈음도 광주(봉선동)에 사는 강행복 씨는 전화연락마저도 끊고 작품에 몰두하고 있다. 작품을 위한 목판화 작업은 주로 밤시간에 하고, 낮엔 주로 명상을 하거나 책(요즈음은 인도명상집을 읽으며 채식을 하고 있음)을 읽는다.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그는 자주 산을 찾는다. 다니다 문득 떠오르는 구상들을 스케치하거나 사진을 찍기도 한다. 어찌 보면 해왔던 일이라 쉽게 시작했던 판화 작업이었다. 그러나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판화는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는 깨침도 조금씩 생긴다. 그가 요즈음 부러운 사람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다. 그보다 더 부러운 사람은 출가수행자다.
공부를 한다고 하고는 있지만 쉽지 않다는 것에 많은 콤플렉스에 빠지기도 한다. 좀더 이른 나이에 불교를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 수행은 항상 그의 과제와 숙제로 남아 있지만 작품을 수행삼아 이 일을 계속해갈 것이다. 그동안 생활과 예술창작이라는 두 가지 일을 쫒던 그가 이젠 그동안의 방황과 갈등을 극복하고 구도의 길을 가며 그 과정으로 작품을 해가고 있다. 응용미술에서 순수미술에로의 갑작스런 변화와 작품 전체가 불교적인 소재라는 것 때문에 그동안의 과정과는 달리 운신의 폭이 좁다. 그러나 그는 불교적인 것이 자신의 근간이고 또 자신이 해야할 일의 전부이고, 추구하는 바 전체가 불교이기에 이 일을 계속하고 싶어한다. 이 일을 해가는데 자신의 깨달음의 깊이를 어떻게 더해갈 수 있는가가 숙제로 남을 뿐이다. 초발심 때의 그 마음으로 제2의 분심을 일으켜 불교공부를 하고 싶다.
특별히 굴곡없이 그냥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친구들을 보면 안타까운 때가 많다. 그러나 아직은 자신의 행복을 그들에게 말로 이해시킬 수가 없다. 오히려 그 친구들과의 벽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 또한 언젠가는 극복되리라 믿는다. 한 때는 외국으로의 이민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한국적인 것, 불교를 떠날 수가 없었다. 2-3년 후엔 서울에 공방을 하나 낼 생각이다. 그래서 불교와 그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불교판화를 지도하고 싶어한다. 오히려 예전보다는 넉넉한 살림이 아님에도 일생에 있어 어느 때보다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강행복 씨. 그는 부처님으로 인하여 그 이름만큼이나 많은 행복을 찾았고, 그 행복의 그림자를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싶어한다.

강행복
1952 경기도 김포생
1975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1990 판화이인전 (신화랑)
1991 창작판화가회전 (현대백화점미술관)
1991 '91-5 월 동인전 (관훈미술관)
1991 한일현대판화교류전 (일본반전시미술관)
1991 한일현대판화교류전 (주한일본대사관광보문화원)
1992 서울 오월전 (삼정미술관)
1992 한일현대판화교류전 (일본정전시미술박물관)
1992 서울 오월전 (삼정미술관)
1992 'Gallery정' 초대전 (광주)
1992 한중현대판화가교류전 (경인미술관)
1993 판화개인전 (Gallery 서호)
연구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 198-16 남도빌딩 101호
전화 (02) 739-0108 FAX (02) 725-0570

본 기사는 불광 사경 불사에 동참하신 황윤정 불자님께서 입력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