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현대서양철학

풍경소리

2007-09-12     관리자


원래 종교라는 말은 선서 (禪書) 인 『종경록 (宗鏡錄)』 속에 나오는 말이다.
서양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를 맺는다는 릴리전 (Religeon) 이라는 말이 들어왔을 때에 불전에 나오는 이 말로 대치한 것이다. 하지만 종교라는 말은 2개의 문자로 되어 있어 불교에서의 종과 교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종 (宗) 이란 피안에 있는 것, 즉 말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고 교 (敎) 란 가르침을 뜻하는 것이다. 표현할 수 없는 피안의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이 종교의 참뜻이다.
맑은 하늘에 뜬 둥근 달에 비유한다면 그 달이 종 (宗)이 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교 (敎)가 되는 셈이다. 그러나 달은 하나지만 손가락은 무수히 많다.
종은 인간의 사유의 세계를 초월한 저쪽에 있고 그것은 이치보다는 신심 (信心)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넓은 의미로는 도 (道)와도 통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불도 (佛道)라는 말도 쓴다. 서양에서는 종교라고 하면 어디까지나 교리를 통하여 인간을 속박하는 교주주의가 중심이 되나 불교의 가르침은 이와는 다르다. 즉 가르침이라는 것은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일단 강을 건너게 되면 뗏목은 버려야 한다. 이것이 방편 (方便)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기독교에서 볼 수 있었던 마녀재판, 이단 심문, 종교전쟁과 같은 잔인한 행위가 신의 이름 아래 정당화되어 온 일은 없었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인격존중의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모든 것은 자기의 인격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유아독존 (唯我獨尊)이라는 말로써 표현하고 있다. 공자도 학문은 무엇 때문에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자기를 위해서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상 오늘날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학문을 하지 않고 좋은 자리에 취직하기 위하여 학문을 한다.
자기 삶의 안정만을 생각하고 참된 삶의 의미나 미래에 대한 전망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현대인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의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 사회에 여러 가지 범죄가 많은 것도 그 근본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서양에서 온 것이다. 필자가 20년 전에 미국에서 보고 우려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한국의 현실이 된 점도 그 예이다.
그러기 때문에 세계에서 동양사상 특히 불교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세계는 서구인의 지배 아래서 움직여왔으나 서구인들은 오늘날의 세계의 상황에 대하여 자신을 잃고 있다. 서구인의 전통, 사고방식, 행동양식에서 너무나 많은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동양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전통 사고방식이 서구사상에 억눌려 오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서구인은 자기의 사고방식을 수정하기 위하여 동양사상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의 큰 서점에 가면 과거와는 달리 중국문화 또는 논어, 맹자, 장자, 주역에 관한 책이 많이 눈에 띄고 인도문화로는 불전 특히 반야심경, 법화경, 법구경, 그리고 우파니샤드, 바가바드 등 힌두교의 성전도 많이 눈에 띈다. 그리고 요가나 선 (禪)의 책과 함께 미용, 명상기법, 건강에 관한 책이 범람하고 있다. 물론 프랑스의 대학에서는 서양철학의 강의가 중심이 되고 있지만 서양철학은 인간이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참된 지혜를 가르쳐 주지 못한다. 그 때문에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전통과는 다른 이질적인 불교서적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배우는 것이다.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 확립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불교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여러 가지 일에 집착하는 자에 대한 경고로 진공무상 (眞空無相) 이란 말을 쓰고 있다. 자기의 자존심, 출신, 재산, 지위 그밖의 속세적인 것에 사로잡혀 자기인식을 한다. 하지만 자기 것, 자기 소유물이라고 생각한 일체가 실은 공 (空)이다. 하지만 공의 모습에는 진공묘유 (眞空妙有)라는 것이 있다. 집착의 면에서 모든 것을 다 부정하면 허무주의에 빠진다. 모든 것이 환상이라 한다면 그 환상속에 어떻게 내가 있는가? 왜 구름, 강, 산, 식물, 동물이 있는가?
이러한 것이 나타나게 되는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이 부처님의 자비이고 모든 것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있는 것임을 깨달을 때 이 세상은 멋진 극락으로 변하는 것이다. 일체가 환상이면서 멋진 예술인 것이다. 이것이 위대한 중도 (中道)의 길이고 부정을 통해 세상을 보고 그 속에서 멋진 것을 발견하고 자기 가능성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확립의 과정이고 선도 (禪道)중의 하나이다. 불교를 통하여 자리를 펴주는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는 이것이 지혜를 얻는 길이다. 인간은 자기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조상과 자연의 은혜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연기의 이법 (理法)으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조그만 생명 하나에도 우주전체가 포함되어 있다. 겨자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있는 것이다.
서양인은 불교의 '공'이나 도교의 '무'의 사상에 이끌린다. 예술이나 기술에 있어서도 무심 또는 삼매경의 경지에 들어 자기라는 것이 없어지면 멋진 일을 쉽게 완성하게 된다. 이 공과 무는 미래의 세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서양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유 (有)의 사상이다. 오늘날의 세계가 이처럼 혼탁한 것은 유의 철학에 기반을 둔 서양 이데올로기가 끝없이 대립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를 절대시하여 이것을 교조적으로 지켜나간다. 그때 또 하나의 대립되는 이데올로기가 여기에 부딪치게 된다. 이러한 인류를 멸망으로부터 구하고 앞으로의 인류가 서로 평화롭게 번영하기 위해서는 공의 사상이 불가결하다.
이 세상의 궁극적인 것이 공이라면 제아무리 이데올로기가 대립한다 해도 그 극단적인 고의 부분적인 진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서로 싸울 이유는 없어진다.
이 점에 있어서 현대의 서양의 철학자들이 불교에 큰 관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미래의 인류가 번영하기 위한 문제해결의 열쇠가 바로 불교에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공 사상과 현대의 서양철학을 비교 연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의의가 있을 뿐 아니라 인류의 앞길을 여는 중요한 핵심이 되는 것이다. 앞으로 동양의 시대가 오는 것이 확실한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쉽게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본 기사는 불광 사경 불사에 동참하신 황윤정 불자님께서 입력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