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닿는 곳에 도(道)가 있다.

겁외가(劫外歌) 4

2007-09-12     관리자

흐르는 물의 설법(說法)소리

우리가 알려고 하는 이 자리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일체 상태적인 것이 떨어진 자리다.
시절은 춘삼월 호시절이라 우주에 춘광이 도래하여 시냇물은 잔잔히 흘러가고 꽃은 웃고 새는 우짖는데 선창(禪窓)에 일주청향(一炷淸香)의 노연(爐烟)은 우리 집 묘한 풍광이요, 곧 다함없는 진리이다. 봄이 오니 새우는 소리도 봄에 우는 소리는 다르다. 겨울에는 추워서 근근히 움추리는 소리로 우는데 봄에는 아주 활발한, 활짝 핀 울음 소리다. 물은 잔잔히 흘러가고 산 꽃은 웃고 들새는 노래하는 여기에 법문이 있다. 법 문은 법사의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이 모두 법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전(聲前)에 미어전(眉語傳)하고
묵연(默然)히 안미소(眼微笑)로다.
(말하기 전에 눈썹말을 전하고 묵연히 눈으로 미소를 짓네)
목격(目擊)에 도존(道存)이라. 눈이 마주치는 곳에 도가 있기 때문이다.


천진심(天眞心)

여러분이 가만히 참선하고 있는 것이 극락세계 소식이요, 이것이 안락처요, 이것이 불경계(佛境界)에 들어가는 것이다.
탐심, 진심, 모든 망상을 다 쉬고 모든 생각이 붙으려고 해도 붙을 수 없는 그 경지, 천진난만한 동심에 돌아간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편해야 한다. 몸은 바쁘더라도 마음은 태연 부동해야 한다는 말 이다. 마음이 바쁘면 몸도 바쁘게 되니 몸은 바쁘더라도 마음은 태연해서 불교를 믿 어 안락처를 얻어야한다. 지극히 고요한데 들어가면 편안한 것이 들어와서 몸도 편안 하고 마음도 편안해진다.
편안할 뿐만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이 백 천일 월보다도 더 밝아지고 백 천 바닷물보 다 더 맑아지는 이러한 경지가 들어온다. 지극히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통한다. 이 자리가 사람마다 다 있는 것인데 자기가 잘 못해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아픈 것이다.
마음이 바르면 모든 일이 편안하고 즐겁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자연히 불안이 생 기고 몸과 마음이 불안해지는데 마음이 바르고 맑으니 내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고 부처님 말씀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지혜가 있어서, 무슨 말을 들으면 그 말이 어디에 떨어지는지 말의 낙처를 안다. 그 말이 무엇 때문에 끄집어내는 말인지 말을 다 안 들어도 안다.
정신 수련을 쌓으면 모든 면에 통찰력이 빨라지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금을 캐면 금속에 은도 들어있고 동도 들어있고 철과 아연도 들어있는데 잡철을 다 빼고 24금이 되면 온 세계에 통용하는 보배가 된다.
보검을 만드는 데도 쇠를 불려 넣어서 달구어 쇠를 자꾸 두드려 쇠똥을 모두 빼고 쇠의 정수만 남아서 두드려도 아무런 잡철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두드려서 다시 불에 달구어 최후에 물에 건져낼 때에 온도가 덥지도 차지도 않은 거기에 건져내는 데 묘 가 있는 것이다. 거기서 보검이 된다.
우리가 본래 천진난만해서 아무 생각도 없는데 욕심과 탐, 진, 치 삼독과 팔만 사천 가지 번뇌를 일으켜서 모두 잡철 붙듯이 붙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불교를 믿어서 마음도 바로하고 말도 바로하고 그 마음속에 아무 잡된 생각 이 없으면 순금이 되고 보검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바른 뜻을 가지고 자비를 베 푸는 데 이것이 보살의 행하는 곳이다. 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하여 본다는 뜻이 다. 그렇게 해서 욕되는 것을 참는데 머물러서 부드럽고 화하고 착하고 순한 마음을 지닌다.
아무리 중생들이 수행을 잘하고 인욕을 잘해도 부처님의 과거 인행(因行) 당시와 비 할 수가 없다. 과거세에 부처님은 누가 와서 너의 눈을 빼주면 내가 꼭 쓸 데가 있 으니 좀 빼달라고 조르자 쑥 빼 주었다. 그러나 눈은 쓰지도 않고 발로 땅에다 문질 러 버렸다. 그러니 얼마나 괘씸하겠는가? 그래도 태연 부동해서 동하지 않으셨으니 부동지(不動地)에 들어가서 그렇게 되기가 참 어려운 일이다.
마음이 성급하거나 포악하지 않고 마음이 또한 놀라지도 말아야 되는데 마음을 모아 집중하는 공부가 있으면 놀라지 않는다.


생활이 법이며 도다

우리가 알려고 하는 이 자리는 가히 마음을 두어서 구하지도 못하고 무심으로써 얻 지도 못한다. 무심은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망상없는 그것이 무심이다.
언어로 짓지도 못하고 가히 말로써 어떻다고 말 할 수도 없고 문자로 그 자리를 어 떻다고 형용할 수도 없고 적묵(寂默)으로 통할 수도 없는 자리이다.
사홍서원은 네 가지 큰 서원인데,
가없는 중생을 서원코 건지리다.
다함없는 번뇌를 서원코 끊으리다.
무량한 법문을 서원코 배우리다.
위없는 불도를 서원코 이루리다.
이것은 흔히 요새 말하는 서원이고 선가(禪家)의 사홍서원은 어떤가 하면,
배가 고프면 요긴히 밥을 먹고,
추우면 옷을 더 입고,
몸이 고단하면 발을 쭉 펴고 누워 자고,
더우면 시원한 바람을 사랑한다.
이것이 선가의 네 가지 큰 서원인데 우리 일상생활을 제쳐놓고 무엇을 하겠는가?
일상생활이 불법이고 도다. 눈만 끔쩍이고 소리 한 번 지르는 여기에 도가 있고, 밥하 고 옷 만들고 농사짓고 장사하는데 도가 있고, 밥 먹고 대소변 보는데 모두 도가 있 다. 도를 모르니까 도를 따로 찾지 기실은 그곳에 다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 첫머리에 부처님이 밥 먹을 때를 당해서 '가사를 수하시고 발 우를 가지고 사위대성에 들어가서 차례로 걸식하여 본처에 돌아와서 밥 잡수시기를 마치시고 옷과 발우를 걷으시고 발을 씻고 좌를 펴고 앉으셨다.'라고 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그 소중한 경전에 밥 얻어먹고 밥을 다 먹고 발씻고 좌를 펴고 앉는 것을 경 초(經初)에다 넣었겠느냐 말이다. 진리가 거기에 다 있다. 이것을 경 읽는 사람도 예사로 넘기고, 배우는 학인도 예사로 그 대문을 넘긴다. 무엇 때문에 밥 먹고 발씻 고 좌를 펴고 앉는 것을 넣었는가를 모르고 그냥 넘어간다.


박첨지 놀이와 도(道)

극으로 멋있게 도를 편 일이 있다. 누가 창안을 했는지 몰라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주 멋진 도인이 구상을 한 것이다. 이를테면 극으로 불법을 편 셈이었다. 나이 많 은 사람들은 보았을런지 모르겠는데 우리 젊었을 때에 '산두 박첨지'라는 허수아비 놀 이가 있었다.
동네 한복판에 빈터가 있으면 기둥을 네 개 세우고 포장을 치고 사람들이 모이면 '산두 박첨지' 놀이가 시작되는데, 기둥 넷은 우리 몸이 땅, 물, 불, 바람의 네 가지 요 소로 크게 나누어 구성되어 세상에 사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박첨지 놀이가 시작될 라치면 포장을 둘러친 위로 허수아비들이 탈바가지들을 뒤집어쓰고 나와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는데 그 허수아비들을 줄로 당기는 조정을 포장 밑에서 사람들이 한다. 밑에 사람들이 줄로 당겨 조정을 하지만 허수아비들이 말할 때는 입도 열고 춤도 추 어서 정작 허수아비 자신들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엔 부채가 흔들흔들하며 나타났다가 지나간 뒤에 한 영감이 나오는데 아주 털보 영감이었다.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오늘 사람 참 많이 모였다."
하는데 여기 남녀간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이 너희들이 아니라 모두 나처럼 부모의 탈 바가지를 썼다. 그리고 또 너희들 마음 가운데 번뇌 망상이 내 수염같이 많이 붙어 있다는 말이다. 그 다음에는 여자 남자 허수아비들이 한 패거리가 나와서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며 세상의 애정에 집착하는 인간상을 펼쳐가며 입도 맞추며 옆엣 놈이 쥐 어 박기도 하고 한참 놀다가 사자 호랑이 등 뭇 짐승 탈들이 출연하여 놀다가 이번에 는 스님네가 두엇이 나와서 절을 짓는데 흥겹게 노래와 장단을 맞추어 가며 짓는다.
-에루 화산에 절을 지어 뚝딱-
-에루 화산에 절을 지어 뚝딱-
노래를 부르며 뚝딱뚝딱 하다가 절을 잠시 하나 지어 놓는다. 절을 다 지어놓고 법 상을 차려서 법사가 나와 법문을 한다. 법상에 올라가서 주장자로 법상을 탁 치고 게 송을 읊기를,
단진범정(但盡凡情)이언정
별무성해(別無聖解)이니라
(다만 범부의 생각만 모두 비우거라. 따로 성현의 지해(知解)란 게 없느니라.) 간단한 법문이지만 그 법문이 참으로 좋다. 범부의 생각만 비우면 되는데 그것이 붙 어서 아무 것도 안된다. 법문을 그렇게 간단히 끝내고 주장자를 또 한번 탁 친다. 누 가 이런 법을 냈는지 법문하는 허수아비도 모르고 듣는 사람들도 모르지만 참 좋은 법문이다. 무슨 소리인지 알지도 못하는 소리를 한 마디 해놓고 법문 다했다고 치운 다.
용이 나오고 사자도 나오고 별별 구경거리를 다 보여주다가 나중에는 홍동지라는 일 곱 여덟 살 가량의 어린이가 홀딱 벗고 나오는데 자지가 어찌나 크던지 제 키보다 더 큰 자지를 어깨에 둘러메고 나와서 그것으로 이리 치고 저리 치고 하는데 춤추고 노 래하든 놈도 때리면 어디로 갔는지 없어지고 법사도 치면 없어지고 용이고 사자고 모 조리 때려서 다 없애는데, 자지로 때리면 없어지니 구경하던 사람들이 웃고 야단법석 이다. 우습지만 홍동지의 자지에 인생의 근본 문제가 붙어있고 그것이 법의 방망이요, 지혜의 방망이인 것이다. 이 방망이로 사람도 치면 없어지고 짐승도 치면 없어지고 절도 없어지고 무엇이든지 치기만 하면 없어져서 부처도 치고 조사도 치는 법 방망이 이다.


법 방망이 소식

외외낙낙정나나(巍巍落落淨裸裸)한데
독보건곤수반아(獨步乾坤誰伴我)러냐
(높고 높아 아이가 옷 벗고 씻은 듯 맑고, 홀로 하늘과 땅에 거니는데 누가 나를 벗 하랴!)
이 게송이 우리가 찾으려는 자성 자리 그 당체를 바로 들어내놓은 것이다. 그것을 아는 이가 없다. 이 게송이 홍동지가 홀딱 벗고 나온 소식이다.
간취붕두농괴뢰(看取棚頭弄傀儡)하라
추견전차리두인(推牽全借裡頭人)이라
(산두틀에 허수아비 놀리는 것을 보아라. 밀고 당기는 것이 전부 속 사람의 짓이 다.)
속 사람은 곧 사람들의 주인공이다. 그러니 자기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오고 가고 하는 것도 모두 속 사람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고 오고 하는 것도 모두 속 사람 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밑에서 사람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고 오고 하는 것도 모두 속 사람이 하는 것이고, 눈이 보고 귀가 듣고 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전부 속의 사람 이 하는 것이다. 속의 사람을 모르고 그냥 물질에 집착해서 매일 가슴이 답답하고 머 리가 아프다고 하니 그러고서야 인생의 보람이 무엇인가?
무영안비천간월(無影雁飛千澗月)하고
석사동후두이서(石獅東吼斗移西)로다
(그림자 없는 기러기는 일천 시냇달에 날고, 돌사자가 동으로 향해서 울부짖는데 하 늘에 두우성 별은 서쪽으로 옮기네)
(할 一할)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해 주신 황순덕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