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을 위한 불교이해 1

2007-09-12     불광교학부

1. 불교는 자유실현, 인간해방의 종교다 

불교는 석가모니불께서 열어 보이신 진리의 가르침이다. 가르침이라 해서 돈 잘 버는 법이나 싸워서 이기는 법이나 아니면 고상한 도덕교훈을 가르치는 가르침은 아니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 않다. 높은 도덕교훈도 있고, 돈 잘 벌고 사업 성공하고 가정의 행복을 증진하는 법도 있다. 그러나 불교는 그런 것이 목적은 아니다. 진리의 가르침을 행하노라면 그런 높은 도덕행도 있게 되고 사업의 흥성도, 가정의 행복도 있어지기는 하지만 이 것은 부수적인 것이지 그것 자체나 그 정도가 불교의 목적은 아니라는 말이다. 불교는 그를 넘어선 보다 큰 것이 있다.

그러면 무엇이 불교의 목적일까? 참된 자기회복이라 하면 어폐가 따르기는 하지만 그런 대로 이해가 쉬우리라고 생각된다.

불교의 가르침이 참된 인간회복에 있다고 하면 그것은 범상인들은 자기를 상실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과연 오늘날의 인간이 자기 진면목을 상실하고 있느냐의 여부는 다른 기회에 언급하기로 하고 도대체 인간은 자기 회복을 해서 무엇을 하자는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자유의 실현이다. 바꿔 말하면 정신적 불안과 현실적 속박과 고난에서 해방되자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교를 해탈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며, 인간 해방의 종교라 하는 것이다.

자유에의 의지- 어쩌면 이것이 인간을 끝없이 앞으로 앞으로 내어 닫게 하는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이 '자유'에 앞서 있는 것이 있다. 이 앞서 있는 존재가 끝없이 자유에의 의지를 충동하고 유출하는 것이다. 이 자유의 충동자가 인간 본성이며 불성이라 하는 제 1원인자다.

이 말에는 많은 사람들의 의혹이 있을 것이다. 논리에 비약이 있지 않느냐 할 것이다.

첫째, 인간이 지닌 정신적 불안과 현실적 속박 내지 여러 고난에서 벗어날 도리가 불교에 있다는 말인가? 오늘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국제적 사회적 여러 여건, 혼돈, 갈등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인간 불안 현상을 불교가 단번에 해결할 길이 있다는 말일까? 마땅히 반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신불안과 현실적 고난의 관계는 무엇이며, 인간해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 인간 본성이 불성이라 하니 본성이 무엇이고 불성은 무엇인가? 그가 내포한 세계의 의미는 또 무엇일까. 또 그것이 '자유' 이전의 존재라 하니 그의 존재방식이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이 인류세계가 걷잡을 수 없는 착잡한 상황 속에 있고, 인간 고뇌와 방황의 물결은 인류 전망을 극히 암담하게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불법에서의 처방은 무엇일까? 진리의 가르침이 불교라고 표방하고 나올 바엔 당연히 이에 대하여 명쾌한 해답을 낼 의무가 있는 것이다.

불교와 친해 오는 사람들 중에는 몇 가지 동기가 있음을 본다. 교양으로써, 또는 세습적인 신앙이기에, 또는 부처님에게 가슴의 열기를 호소하고 싶어서, 또는 진리 탐구에서…. 헌데 과연 이 모든 요구에 얼마만큼이나 충족이 되고 있을까? 역시 많은 수효가 믿음을 얻 고 있겠지만 오히려 갈수록 안개는 짙어져서 어쩌면 망망한 구름 속에 묻혀 버린 이도 있을 것이다.

본 난은 이처럼 불법에 친해오는 분들을 위하여, 그 크고 작은 모든 의문에 대하여 언급해 나가기로 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하나의 자그마한 휴게소의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이 푸른 초원엔 마음놓고 쉬어가도 환영하고 못 본 채 지나쳐버려도 고맙게 생각한다. 안개 속의 나그네는 이미 초원의 가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기왕의 입문서와 같이 체제를 세워서 교의를 설명해 나가지는 않겠다. 선후 없이 불법내 여러 잡다한 문제들을 토막토막 드러내 엮어가는 동안 불교의 편모나마 소개해 보기로 한다. 그렇지만 이 짤막한 토막글에서 혹 조각난 석편(石片)에 담긴 미소같은 것을 발견해 준다면 크게 다행으로 생각한다.

2. 조물주 사상에 대하여

많은 종교들이 조물주를 들고 나온다. 천지만물은 누가 만들었느냐? 하고는 그것을 신에 귀착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이 조물주인 신에 대하여 모든 권위와 신성을 돌리고 충성과 복종을 맹세하는가 하면 이 신의 진노를 사지 않도록 가지가지 의식으로 헌공도 하고 은혜도 비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되면 신도 곤란할 때가 종종 있다. 책임을 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때는 좋은 것은 신의 은총이고 나쁜 것은 악마의 장난이거나 아니면 인간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라고 하는 궁색한 답변이 나오지만 이렇게 되면 신의 절대성은 그만 깨어지고 만다. 그런데도 지금도 여전히 조물주의 절대적 권능에 대한 예찬은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는 조물주를 믿는 것이 종교로 알고는 불교의 조물주는 무엇인가? 한다.

이것이 주신(主神)사상의 한 쪼가리다. 우주와 인생을 신이 지배한다는 사상이다. 그리고 이런 신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 대답도 여러 가지다.

우주 밖에 따로 있어서 우주를 주관한다는 초월신이나 별재신(別在神)의 개념이 있다. 그런가 하면 우주 구석구석에 신이 가득하다는 범신(汎神)사상도 있다. 또는 인간과 우주의 중심에 신이 있고, 인간의 개성도 안에 있는 신이 지배한다는 내재신(內在神)의 사상도 있다. 그런데 이 내재신에는 문제가 따르는 것도 생각해두고 지나가야겠다. 신이 과연 무한, 절대, 영원, 불변한 것이라면 우리에게 내재하는 신은 부정할 수밖에 없다. 왜냐 하면 우리의 마음은 그런 불변의 것이 못 된다. 그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으며 죽음이라는 한계 의식 속에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흔들리는 마음 저 너머에 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현재 의식과 상대가 되는 것이므로 신의 유일 절대성이 성립이 안 된다. 절대와 상대가 양립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물주 사상은 그대로 창조신 사상이고 주재신 사상이다. 이에 의하여 인간은 만들어지고 지배되며 그가 주재하는 바에 따라 운명은 결정된다는 것이다. 초월신이건 범재신이건 또는 내재신이건 이 모든 주신(主神)사상은 고대 인도에 고루 있었다. 창조신으로서의 범 (梵)사상 또는 범천(梵天)사상이 그것이다. 원리로는 범이고 창조신으로서는 범천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고대 인도의 사상 풍토에 나시어 이 모두를 부정하셨다. 주신사상의 거부에서부터 불교는 설립된다. 다시 말하면 주신으로부터의 인간 해방에서 불교는 출발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래서 불교는 철저한 창조신 사상의 거부요, 인간을 속박으로부터의 해 방이며, 인간 권위, 인간신성의 개명(開明)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말하자면 무신주의(無神主義)다.

3. 불교의 무신주의가 의미한 것 

무신주의라 하지만 대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현상적 인간, 육체적 인간 외의 일체 존재신을 인정하지 않는 해석과 인간 이상의 존재(神)를 인정은 하되 우주를 창조 한 조물주로서 별격신을 두지 않는 해석이다. 그러니까 전자는 유물론적인 해석이고 불교의 무신주의는 후자에 가깝다. 불교에서는 인간보다 지적으로 우수한 계층, 예를 들면 천부(天部)의 사람(이를 천인을 천왕, 또는 신이라고도 하지만 이것 역시 중생의 한 생태로 본다)을 인정하지만 이들을 창조신으로 받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중생이 아닌 대각자(大覺者)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창조신의 권능이 있다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불신(佛身)'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다음에 말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 처님 몸이란 인간에 대립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불(佛)'은 무엇이고 인간 의 참모습(眞面目, 眞體)이 무엇이냐는 물음이 나올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차차 언급하겠다.

하여튼 부처님은 인간을 창조하거나 그의 운명을 주재하거나 선악을 심판하여 처벌하거나 잘 받들지 않으면 노여워서 벌을 내리거나 다른 신을 섬기면 질투하여 심술부리는 신류는 결코 아니다.

그는 현실의 허위성을 깨친 안목(智慧)을 이루어서 진리를 완전히 체달(體達)한 어른이시다.

그리고 '불(佛)의 몸인 진리의 몸(眞理身)은 중생과 별격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써 일체와 더불어 한 몸(同體)인 것이다. 그러므로 실로는 개아(個我)에 대립되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의 동체다. 진리일 뿐이다.

부처님은 진리의 지혜, 안목이 밝아서 진리와 더불어 영원하시고, 평화하시고 평등하시고 자재하시다. 하지만 범부들에게는 그런 것을 알 길이 없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범부 중생으로 서는 오직 자기 의지와 자기 수행으로 자기 향상을 기할밖에 방법은 없다 할 것이다. 여기서 생사도 공포도 고락도 비애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범부 경계의 말이다.

참으로 있는 진리의 세계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범부를 자주적으로 움직이는 중심이 무엇일까? 그것은 생명력의 착각적 발동인 업력이다. 생명력이 불멸의 힘인 만큼 업력이 또한 강력하다. 대개 인간은 신의 창조가 아니 라 이 업력의 자기 창조인 것이다. 그리고 이 업력이 끊임없이 자기를 형성해 가고 있는 이다. 자기가 단독으로 만들기도 하고 타와 공동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 업력의 공동창조를 공업감(共業感)이라 하는데 이 업감력(業感力)으로 일체를 만들어지는 것이 범부 인간계의 상태다.

이렇게 볼 때 인간 운명은 신의 조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주재자다.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기 업력으로 자기와 자기 환경과 자기 운명을 형성하고 개척해 나간다. 또한 행위의 결과에 대한 심판도 신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원인이 선하면 결과도 선이다. 원인이 악이면 결과도 악일 수밖에 없다. 신은 불행히도 붙을 곳이 없다. 창조신 자리도 비워 있지 않 다. 인간을 주재하는 주재신 자리도 선악을 판단하여 복이나 재앙을 내릴 재판신 자리도 그 만 없어지고 만다.

4. 부처님과 삼신(三身) 

부처님의 출현으로 기왕에 권위의 상징으로 인간에게 군림하고 있던 신은 파직이라기 보다 깨끗이 추방되었다. 사실은 추방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니이체는 짜 라투스트라를 시켜 '신은 죽었다'고 하였지만 실로는 죽을 신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신의 자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누가 그 자리를 차지했는가. 사실 그 옥좌에는 만인이 앉은 것이다. 앉은 것이 아니라 이미 앉아 있는 것을 부처님의 지혜 광명은 밝혀 내셨다. 인간의 본성, 심지(心地), 실상에 대하여는 뒤에 언급하겠지만 그러면 부처님의 자리는 어찌 되었을까. 부처님은 어떻게 계시는 것일까?

여기서 불신론(佛身論)이 나오게 된다. 부처님은 한 몸이지만 동시에 삼신(三身)을 갖추셨 다. 삼신이란 법신(法身), 보신(報身),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이다.

부처님은 이 삼신을 갖추셨다. 이 삼신은 실로 중요한 가르침이다. 삼신에 대한 이해가 불확 실하면 불법은 모른다. 모든 교의가 뒤죽박죽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부처님, 즉 눈으로 볼 수 있었고 귀로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2500년 전 석가 세존은 보통 응신이라고 한다. 응신이라 하면 중생을 제도하기 알맞은 몸을 나투신 몸이다.

화신이라 함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나투시는 몸인데 이는 중생을 위한 곡진 한 방편에서다.

이와 같이 중생을 위하여 나타난 몸은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 나 중생에게 저들이 집착할 수 있는 그릇된 소견을 끊고 바른 지혜를 열어주기 위하여는 우리의 응신이신 석가세존은 범부들과 똑같이 살고 병들고 죽어감을 보이셨다. 중생과 함께 늙고 병들고 죽어감을 보임으로써 우리에게 주신 해탈에의 설법은 깊은 힘을 더하였다. 이 것 역시 부처님의 곡진한 자비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중생 구제에 필요한 대로 불신도 나투시고 그밖에 여러 가지 변화신도 나투신다. 그러나 응신이나 화신은 범부를 위하여 나투시는 몸이지 부처님의 본 몸은 아니다. 그것은 본 몸에서 나타내신 작용신이다.

그러면 보신(報身)은 무엇일까? 보신은 수용신, 또는 수법락신(受法樂身), 또는 제이신(第二身)이라고 하는데 이는 부처님의 원만한 수행의 결과로써 이루어진 몸이다. 경에 의하면 부처님은 지나간 긴 전생 또는 그 먼 생애 동안에 한량없는 수행을 쌓으셨다. 참을 수 없는 고난의 길을 이겨내셨으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위하여 한없는 땀과 눈물과 피(목숨)를 바치셨다. 그리고 오로지 무상(無上)의 진리를 구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당신은 수행을 완성하셨고, 모든 공덕을 두루 닦으시어 마침내 위없는 깨달음이라는 각(覺, 보리· bodhi)를 이루신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의 결과에서 얻어진 몸을 보신이라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보신에는 한량없는 지혜와 삼매의 힘과 대자비심을 갖춘다. 부처님의 무량한 색상(色相)과 공덕도 청정 장엄하기 이를 데 없는 불국토도 여기에 근거한다. "나의 수명은 실로 헤아릴 수 없는 겁이다. 내가 혹 죽음을 보인 것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 한 방편이요, 결코 죽는 것은 아니다. 죽음을 보이되 실로는 죽지 아니 한다. 누구나 한마음 으로 나를 찾을 때 언제나 내 여기 있노라 하고 나타나리라"하셨다. 여기에 말씀하신 "나라 하면 부처님의 어떠한 몸으로 이해하여야 할까? 그것은 우선 '보신'의 입장이다. 부처님의 수명이 한량없고, 지혜의 위신력이 원만하시어 생사를 자재로 초월하시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무량방편을 벌리시는 대자비심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계속)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해 주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