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연구] 1. 인간은 죽으면 그만인가

심령연구/제 1회

2007-09-12     광덕스님

이 글을 쓰는 것은 영계(靈界)를 규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일부 인사들의 흥미를 끌자는 것은 더욱이 아니다. 독자 여러분이 '인간은 육체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자는 것뿐이다.

제 1장 사후문제 연구의 필요성

1. 미혹이라는 인간의 자기상실


인간이 육체뿐이라면 또는 세계가 이뿐이라면 차라리 좋다. 제 마음나는 대로 살면 되니까.
그래서 속편하다.
헌데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육체 인간을 조금만 반성하는 사람은 육체나 환경조건이 이 육체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보다 정신적인 초월의식이 우리 생명의 배후에서 생명을 조성하고 있는 것을 알 것이다. 오늘날 심리학 정신과학이 이를 입증해 준 지도 이미 오 래다.
이 육체 아닌 정신적 초월의식이 무엇인가. 정신, 초의식(超意識), 무의식, 자아, 혼, 영(靈)… . 가지가지 용어로 불러오지만 아직 통일적인 개념이나 용어가 확정된 것이 아니다. 우 리는 단순한 반성만으로도 우리가 육체뿐이거나 물질만이 아닌 생명이라는 것은 쉽게 수긍이 간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생명은 불성이라는 대생명, 즉 근원 생 명의 표현이라는 것도 믿고 또한 알고 있다.
헌데 우리는 이 생명을 어디까지나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대상으로 파악하려 하기 때 문에 생명이면서 생명 자체는 의식하지 못한다. 이것이 중생의 미혹이다. 이 미혹이 있 기 때문에 중생은 여러 갈래 종류로 차별이 생겨난다.
이 여러 갈래의 중생차별이 욕심의 세계(欲界), 삼매의 세계(色界), 초월의 세계(무색계)- 이 른바 삼계이며, 또한 천상, 인간, 수라, 아귀, 귀신 등 육도(六途)로 나뉘어지게 된다.
인식은 시간과 공간의 인식 범주에 한정된 범위이므로 우리는 물질적인 것, 감각적인 것, 의 식할 수 있는 것 등 관념 구성의 바탕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념 범주 밖의 것은 인식할 수 없다. 없다는 것이 아니라 들이대도 못 보 는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 인간의 인식 밖의 세계는 퍽 많다.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는 아주 적고 적은 부분의 부분일 것이다.
진리의 눈이 환히 열린 성현은 이를 다 보시고 아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다가 아니다."라고. …허나 이를 믿기는 어렵다. 범부 눈에는 없 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좀 지혜있는 자라야 우리는 볼 수 없고 알 수 없어도 무엇 인가 있는 듯하다고 말하게 된다.

2. 인간은 육체가 아니다

사람은 미혹에서 깨지 않는 한 비록 육체를 벗어났다 하더라도 또 다른 세계를 형성하게 된 다. 그것은 또 다른 양상의 미혹의 형태다. 이 또 다른 형태로써의 탄생을 전생(轉生), 또는 내생(來生)이라고 부른다.
이 전생- 새로운 생의 상속을 아는 사람은 없다. 보는 사람도 없다. 말하는 사람도 없다.
혹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종의 웃음꺼리에 지나지 않는다. 믿으려 들지도 않는다. 성인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먼저 부정을 해보려고 한다.
이 전생(轉生)의 상태는 미혹의 연속이므로 본질적으로는 범부 인간의 계속이다.
범부가 다만 육체라는 의상을 다른 옷으로 바꾼 것뿐이다.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묵은 육 체적 자산을 몽땅 버리고 타방에 가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데 지나지 않다. 그런데 그 타방이란 보이지 않고 통신이 닿지 않는 그런 멀고 색다른 곳일 따름이다. 죽음을 거 쳐 벌어지는 전생이 우리의 인식권 밖에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이 하나의 현실이라 면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남이 인정할 수 있든 없든 우리 자신의 앞에 놓 인 반드시 거쳐야 하는 대리 통과가 허락되지 않는 고장일진대 이것은 우리에게 관심꺼 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내생이 있다.' '육체의 죽음이 다가 아니다.' '내생은 현생의 연장이다.'할 때 우리는 인생을 사는 태도가 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선 인간이 육체적 인간은 죽더라도 자신은 '죽지 않는 인간'임을 알게 된다. 인간은 물질 의 연속인 육체가 아니고 영적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백 년을 살다가 죽으며 죽은 후에는 빈 사과상자와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그렇게 알고 살겠지만 오늘의 삶이 보다 높은 삶의 준비를 위한 시기라고 할진대 우리의 삶은 그러한 영적 가 치와 관련한 생활이 추구되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 바르게 살려면 아무래도 죽은 후에 삶이 존속하느냐의 문제는 결정해 두어야 한다.

3. 오늘을 바르게 살기 위하여

혹자는 죽은 후의 일은 지금부터 알아두지 않아도 좋다. 금생은 금생대로 열심히 살고 죽은 후에는 그 때 가서 성실하게 살든지 할 것이 아니냐고 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후의 삶이 있다 하고 열심히 사는 것과 사후에 삶이 없다고 알고 열심히 사는 것과는 '열심히 산다'는 그 자체는 같을 지 모르나 생활태도는 사뭇 달라지게 될 것이다. 더욱이 죽은 후의 생활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과의 오늘의 생활태도의 차이는 크게 벌어진다.
가령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믿고 애인과 함께 정사함으로써 인생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 하겠다는 연애지상론자가 있다고 하자. 만약 이들이 자살의 결과 사후에 음산한 늪에 빠 져 고생 고생하는 자신과 애인을 알게 될 때는 어떠할까?
그는 죽음을 부르는 연애지상 방법보다 다른 연애 방법을 택할 것이다. 또한 정사의 결과가 함께 다정하게 행복한 영원을 살 것으로 기대했던 자가 죽은 후에는 고통의 수렁을 거 듭 드나드는 자신들을 알게 되면 그들의 사랑도 정사 이외의 보람을 찾게 될 것은 명백 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후에 삶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결정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사후가 있다하더라도 사후의 생활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대강은 알아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생이 있다.' '육체의 죽음이 전부가 아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인간이 오늘을 바르게 사 는 데 다시없이 중요한 것이라고 외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우리는 개인으로 살고 있다. 동시에 한 사회인으로 국가인으로 인류의 한 사람으로 살고 있 다. 동시에 이 시간상의 현세로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간 과거의 생과 앞으로 다 가올 사후의 생을 연결하는 오늘을 살고 있다. 이와 같이 시간 공간으로 넓은 '나'를 생 각할 때 부처님께서 가르치시는 '참 나'를 향하여 오늘을 바르게 사는 길에도 한 걸음 가까워지리라 생각한다.

4.불교와 제사

불교는 깨달음의 가르침이다. 그럼 무엇을 깨달으라는 말인가? 네 자신이 불(佛)이라는, 완 성자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이다. 깨달으면 어떠한가. 불(佛)밖에 없게 된다. 불밖에 없 을 때 어떠한가. 불도 없고 중생도 없고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고 불이 중생이고 중생이 불인 대자유가 현전한다.
이 대자유성이 중생의 아버지다. 이것이 중생의 원인인 미혹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 대유 영묘성(靈妙性)의 무단한 착각이 미혹의 근원이다. 그래서 삼계(삼계)가 벌어지고 육도 (六途)가 벌어지고 생과 사(死)가 있게 되고 시랑, 슬픔, 이별의 쓰라림도 사모의 애달픔 도 생겨나게 된다. 나아가 죽은 자에 대한 제사도 생겨 난다.
제사는 왜 지내는가?
죽으면 다 허사이긴 하지만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좀 섭섭하니까 지낸다고 한다. 그리고 보 면 이는 제 마음을 달래기 위한 제사다. 또는 자식된 도리에서 지낸다고도 한다. 이는 내심(內心)과 외견(外見)에 대한 의리와 체면을 위한 제사다. 가정의 의범상 지낸다고 한다. 이 제사는 가범(家範)과 가정교육의 목적이다. 참으로 망인을 이익되게 하고 복되 게 한다는 생각은 없다. 하긴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죽은 이는 없는 것이므로 실감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육체만을 인간으로 아는 생활에서 오는 제사는 이럴 수 밖에 없다.
불교에서 제사는 으레 천도(薦度)를 의미한다. 거기에는 진리의 광명력과 삼매력, 말씀의 힘 과 자비력, 여래 위신력으로 망인에게 밝음과 깨달음과 지혜와 만족을 준다. 그는 영적 으로 보다 복되고 자재를 얻게 되는 것이 결정적이기 때문에 제사를 지낸다. 이승(此土) 의 누구를 위한다는 공리심은 사뭇 뒤의 이야기다.

5. 심령연구의 자료

이러한 제사의 근거에는 많은 자료가 있다. 죽은 자의 사후 생활에 대하여도 많은 자료가 있다. 삼계육도설(三界六途設)의 전부가 중생의 전생상속(轉生相續)의 양태를 기술한 것 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술이다. 사실의 기록이며 현실에 대한 구술의 기록이며 체험 자의 자술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논의는 너무나 광범한 것이어서 우리는 삼계육도를 다 논할 겨를이 없다.
여기서는 다만 협의의 내생이라 할까- 즉 육체 인간이 죽은 후에 새로운 결정적 생을 받을 때까지의 중간 기간의 생활양상을 몇 가지 기록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 영역의 연구는 오늘날 '심령학' 또는 '교령(交靈)현상연구'라 하여 구미 여러 나라에서는 착실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허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종류의 연구는 거의 없는 듯 하다. 그것은 필자 과문의 탓이겠지만 외국 저서의 번역도 한 두 가지를 넘지 않고 있 다.
필자는 본고를 진행함에 있어 중국의 묵은 기록과 일본의 '심령연구'에 관한 여러 저서 중에 서 전용하고자 한다.
아마도 독자 여러분은 이 글을 통하여 육체는 죽어도 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후 영혼의 상태영계의 조직, 다시 인간에의 환생, 현세의 고통이 가지 는 의미, 또는 죽음이 고통을 해결하는가의 여부, 정사로 끝난 사람이 저승에서는 어떠 한가 등등 인간계와 영계와의 관계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에 접하게 될 줄 믿는다.
여기에 수록되는 자료가 100퍼센트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많은 영계 통신에 가담하고 있는 정령 중에는 간혹 의식적인 장난을 삽입시키거나 진술에 착각을 일으킬 때도 없지 않으며 특히 저속한 영혼인 경우 제멋대로 꾸며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의 심령연구에는 이러한 오차나 허위를 배제하기에 십분 고려되고 있고 본고도 그 러한 정선된 자료에 의거한다.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영계 통신을 제공하고 있는 정령의 인식 범위가 자신의 경험 범위를 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공여하는 사실도 영계의 부분적 관찰이거나 주관적 판단 에 속함은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중에는 보다 높은 지혜의 말씀과 어긋날 때도 있 을 것이다. 그 점 미리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양해를 구할 것은 영계 상황에 대한 경전의 기록은 인용하지 않았고, 또 한 자료 모두가 구미 제국이나 고대 중국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경전에 설하신 바 는 별도 강술에 기대하고 우리 나라의 자료로는 정리가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검토 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제 2장 영혼은 말한다.

1. 피스롭 교수의 영혼


사람이 죽으면 그만인가. 아니면 영혼이라거나 혼백이 남아 있는가에 대하여는 차차 밝히기 로 하고 여기서는 영혼 자신이 생전의 자기 부인에 감령되어 이른바 자동서기(自動書 記) 현상으로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일절을 보기로 하자. 다음은 죽은 피-스롭 교수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다.(S·피스-롭 저 Speaking Across the Borden Line 소재)

"여보 당신은 내가 저승으로 간 상태를 알고 싶어하는 군요. 내가 죽었을 때 나는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었소" 그리고 그때 나는 나의 어머님의 따뜻한 사랑의 보호를 받고 있었 지요. 그런 상태로 나는 당신네 세계의 시간으로 계산하여 2주일간을 꼼짝않고 있었답니 다. 얼마 후 나는 어머님과 친한 분의 도움으로 의식을 회복하였었소. 그랬더니 차차 이 새 세계의 놀라운 아름다움이 펼쳐지더군요. 나무나 꽃의 아름다움, 산의 장엄스러움, 그 리고 먼 호수의 반짝임이 보입디다. 내가 죽음의 고개를 정말 넘어 선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지요. 이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뛸 듯이 기뻤지요. 왜냐하면 저 세상 에서의 괴로움은 정말 견디기 어려웠고 죽기를 바랐었기 때문이요. 나는 이상하게도 새 힘이 용솟음 치는 것을 느꼈어요. 정말 나는 문자 그대로 재생하였던 거요. 어머님과 친 척들의 영혼들은 나를 아담한 집으로 옮겨 놓더군요. 거기에는 내가 좋아하던 꽃이 모두 가 나를 반기는 것 같이 보이잖아요? 오오 장미꽃이여… 당신이 이 꽃을 볼 수 있었으 면 얼마나 좋겠소만! 이 묘하고도 이상한 세계에는 모든 것이 두 개씩 같은 모양을 하 고 있어요. 둘이 복합해서 하나의 완전을 이룹니다. 그래서 당신이 꽃 한 송이를 꺾으면 거기에는 또 하나의 똑같은 하나의 복체(複體)가 남아 있어요. 당신이 꺾은 꽃은 시들지 도 않고 마르지도 않다가 꽃이 필요없게 되면 다시 꽃이 유체(幽體)로 돌아가 버리고 다 시 흡수되어 본래로의 한 모양이 된답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 아름다운 국토의 경험을 더욱 자세하게 보고 할 약속을 하였지요. 그래요. 참으로 이 국토는 경이의 세계입니다.
그 기묘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어떤 말로도 이 세계의 이상한 것을 표현 하기에는 부족하고 지상에 있는 무엇으로도 비유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이 세계에 오기 전에는 이 세계의 경험은 당신에게는 봉함된 문서와 같소."
육체는 죽어도 죽지 않는 생명의 덧옷-영혼의 증언을 여기서 듣는 것이다.

2. 전사한 영혼의 체험담

다음은 전사자의 영혼이 저숭(幽界)으로 옮겨간 상대를 말하고 있다. (와트킹 저 private Dowding에서)

"육체적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실지로 거기에는 아무런 공포도 없기 때문이다. 유탄이 핑 하고 하늘을 긋는 소리를 들을 때까지는 나는 별로 위험을 몰랐다. 유탄이 폭발하자 무엇인가 나의 목덜미를 탁하고 쳤다. 나는 쓰러졌다. 나는 나 자신 밖에 있는 나를 발 견하였다. 나는 두 동료 병사들의 부축에 의해서 나의 시체는 꼬불꼬불한 참호 속 간호 병이 있는 쪽으로 옮겨졌다. 나에게 있어 죽음은 정말 단순한 경험에 불과하였다. 두려 움도 없었고 오래 끈 고통도 없었다. 또 다른 갈등도 없었다. 나는 얼마 있다가 내가 부 축하지 않아도 두 병사들이 떨어져서 기묘하고 겸손한 거동으로 따라갔다. 그러다가 나 는 의식을 잃고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들었다."

영혼은 어떠한 몸을 가지고 있는가?
Private Dowding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는 분명히 지금도 어떤 종류의 신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몸이냐를 알릴 방도가 없다. 그것은 아주 편리하게 돼 있어서 병들지도 않고 피로한 일도 없다. 겉모양 은 생전의 육체와 닮은 느낌이다. 물론 자그마한 차이는 있다. 그러나 나는 이를 분별할 수 없다.
내가 생각이 들었을 때 처음 느낀 것은 생과 사의 이동이 그리 먼 여행길은 아니었다. 내가 항상 살고 있던 그 장소에 한가한 기분으로 있었다. 그러나 앞서 보다 훨씬 현저하게 생 기가 있고 누구와도 이별하지 않았고 내 소유들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보면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한층 더 큰 진리의식으로 의식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한 의식상태에서, 우리는 현실 세계보다도 더욱 참되게 소유하게 된다. 우리는 당신과 가까 운 곳에 있어 자주 이야기도 나눈다. 죽음은 이별이 아니다. 다만 보다 큰 결합이다.
(Speaking Across the Border -Line에서)

3. 쥬리아의 수기

"…나는 비로소 나 자신이 육체라는 것에서 석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육체가 누워 있는 침상 바로 곁에 서 있 었습니다. 나는 눈을 감기 전에 보던 가구들이 그대로 방 안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하등의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스탠드 저 Afer Death에서)

4. 어느 ROTC장교의 영혼 부탁

이것은 필자가 봉은사를 맡아 있던 1965년 여름의 일이다. 그 해 홍수가 났다. 신문에는 피 해복구공사 중에 장교(중위) 한 분이 순직했음을 알았다. 그 얼마 후 한 노신사 부부가 봉은사를 찾아왔다. 신문에서 본 그 군인의 천도를 의논해 온 것이다. 노부부는 망인의 부모님었다. 7재를 올리기로 한 그 얼마 후 노신사의 이야기다.
"얼마 전 점심을 먹고 잠깐 앉아 있다가 아마 잠깐 졸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역 력합니다. 내 곁에 죽은 자식이 찾아오지 않았겠어요. 나는 멍청히 그 애의 얼굴만 쳐다 보았어요. 그 애는 평상시와 같이 활달했어요. 나에게 하는 말이 '아버지, 어머님을 위로 해 주십시요. 어머님은 제가 죽었다고 저렇게 슬퍼하고 계시는데 조금도 그러실 것 없습 니다. 아버지 저기를 보십시요.' 합디다. 그래 손으로 가르키는 곳을 보니 좀 떨어진 멀 지 않은 곳에 한 세계가 벌어져 있지 않겠어요. 자세히는 못 보았어도 아름다운 동산에 거루고각이 대궐같이 솟아 있었어요.
자식이 하는 말이 '저 집이 멀지 않아 제가 가서 살 집입니다. 이 세상 즐거움이란 여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아버님 어머님 부디 제 걱정을 하지 말아주십시요.
그리고 아버님은 이제 좀 한가로우시니 어머님을 위로해 주십시요. ' 하지 않겠어요. 사 실 저는 얼마 전까지 시골에서 공직생활(면장이었다)을 하며 살아왔고, 우리집 사람은 아이가 대학에 다니면서부터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서울에 와 있었어요. …"
노부부에게는 아들이란 이 하나뿐이었다. 경희대학교를 졸업하고 ROTC장교로 입대했었다.
그런데 7재가 지난 후 다시 그의 어머니에게도 나타났다. 현몽이었다. 안락처로 간다는 인사였다.

5. 여고생 영혼의 어리광

그 때는 필자가 범어사 선원에 있던 1951년 여름의 일이다. 산 너머 양산군 동면 내송리 사 베부락에서 중년 부부가 찾아왔다. 맏딸이 갑자기 죽어서 서러워서 왔다. 딸은 동래여고 3년, 학교에서 돌아와 책가방을 두고 바깥마당에 나가더니 차에 밀려 쓰러졌다. 외상 하 나 없는데 혼은 떠나고 없었다고 한다.
그 여학생의 7재는 올려지고 위패는 지정전 한 모퉁이에 안치되었다. 그런데 절에 재식이 겹치는 날이면 병풍이 여럿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쉬울 때 나는 여학생 영단에 펼쳐 있 던 병풍을 다른 곳으로 가져다 쓸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어머님이 왔다.
망인의 현몽을 전해 온 것이다.
"어제 낮 방에서 비몽사몽간에 애가 보였어요. 그리고 생전에 어리광 부리듯 내 두 무릎에 매달리면서 '스님들 정성으로 제가 아주 좋은 데로 간답니다. 그런데 내 곁에 병풍은 왜 자주 가져가지요?' 하며 못마땅해 하더군요."
이 사실은 필자만이 아는 사실이다. 나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여학생 영단에 놓으려고 다 홍빛 산리라를 몇 번이고 꺽어왔다. 그 후 7재를 마친 후에도 부부는 오래도록 절에 와 서 염불을 하고 설법을 들었다. 7재 후에 죽은 딸이 부모에게 기쁜 얼굴로 현몽하며 '이 제 저는 아주 좋은 곳으로 태어납니다. 엄마 아빠 안녕'하더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때 이 후 한동안 사후 영계 문제를 골똘히 생각했다.

6. 신생 영혼은 영계를 잘 모른다

이상에서 필자는 영계가 어떻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육체는 죽었어도 영 혼은 이와 같다.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이자는 것뿐이다. 헌데 혹 독자 중에는 위에 열 거한 영계 소식에 대하여 오해가 있을까 하여 거듭 사족을 더 부치고자 한다. 한 말로 영계니 유계(幽界)니 하지만 그 세계의 조직이 그리 단순하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육체에서 의식이 떠나기 시작한 데서부터 육체를 정지시켜놓고 영혼만의 여행, 또는 완 전한 육체에서의 이탈, 이탈 후에 머물게 되는 처소와 환경이 실로 각양각색이다. 천국 과 같은 낙원도 있고, 갖은 고생으로 휘감긴 악도도 있고, 지루하고 따분하기 짝이 없는 영계도 있다. 그런데 영계나 유계에 새로 태어나는 영혼들은 그 고장의 지리와 조직과 상황을 잘 모른다. 영적으로 밝고 의식이 고도로 순수해야 그만큼 널리 아는 것이다. 그 러므로 영혼의 고백 등 영계자료에 대하여는 그리 알아주기를 부탁한다.-계속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해 주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