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강의실] 반야심경 강의 1

성전(聖典)강의실

2007-09-12     광덕

대승불교는 부처님이 출세하신 본회(本懷)를 설파하신 교법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근본되는 사상체계는 반야를 통하여 비로소 전개된다. 그래서 '반야'를 '제불의 모(母)'라 한다. 반야는 자세히 말한다면 끝이 없다. 반야심경은 600권이나 된다. 반야심경은 반야부 경전 가 운데서 가장 간명하고 반야의 핵심을 담은 요전(要典)이다. 반야심경의 '심(心)'이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hridaya 즉 심자의 뜻을 가진 것으로 짐작이 간다. 반야의 정요인 것이다.

이 경은 광본(廣本)과 약본(略本)의 2종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경의 이름은 다같이 Prajna -Paramita- hrdyana-Sutra라 한다. 우리가 지송하고 있는 것은 그 중 약본으로써 대체 로 광본경에서 서분과 유통분에 해당하는 부분을 생략한 정종분(正宗分)에 해당된다. 고 려대장경에는 2종의 심경이 보인다. 구마라집과 현장의 번역이다. 우리가 지송하는 260 자 심경은 현장 역이다. 관본심경은 우리 나라에는 전해지지 않은 듯, 그 이름조차 모른 다. 얼마전 필자가 번역한 광본은 아마도 이것이 우리 나라 광본심경의 효시이리라.

본고는 불광법회의 강의본으로 작성한다. 강의를 전제하기 때문에 요점을 적는 데 그친다. 강술의 의본(依本)은 현장역 약본이다.

서설(緖設)

1. 반야심경의 중심사상


이 경은 경의 제목이 보이듯이 '반야'의 정요를 밝힌 대승사상이 그 중심이다.

'반야'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해서 사물의 참 도리를 사무쳐보는 깊은 지혜다. 범부 안목으로는 흔들리고 변 화무쌍한 현상에 집착하여 사물의 진상을 알지 못한다. '반야'의 지혜에 의하여 비로소 그 진상이 파악되는 것이다.
여기서 정견(正見)이 선다. 정견이야말로 우리 생활의 진리로 방향지우고 또한 진리로 연결 시키는 관건인 것이다. 팔정도(八正道)에 정견이 수(首)가 되고, 원각경의 선지식의 가격 요건으로써 정지견을 제일로 삼은 이유를 알 만하다.

그러므로 구도자(보살)가 진리의 이상향을 성취시키는 여섯 가지 방법(육바라밀) 중에서 '반 야바라밀'을 제일로 삼는다. 반야에 의해서 다른 오덕행(五德行)이 바라밀(波羅蜜 Paramita)로 승화하기 때문이다.

'반야의 정요(精要)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체 현상적 존재는 '없다'는 것이다. 일체 공(空)이라 한다. 공은 Sunya 즉 수학의 0(zero)다. 혹자는 공은 '공'이라는 것이 있다거나 또는 공이 아닌 무엇이 있다는 듯이 말하나 이는 잘못된 견해다. 공은 공이다. 아주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일체 법(현상)은 인 연따라 생긴 것이므로 아체(我體) 실체(實體)라는 것은 아예 없다. 이래서 제법개공(諸法皆空)이라 한다.

공을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으로 나눈다. 아공이란 유정(有情)의 개체의 중심에 '아(我)'라 는 실체가 없음을 말하고 법공이란 일체 현상은 인연따라 생긴 것이므로 일체 현상은 존재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을 析空이란 한다.)

허나 공이란 원래 어떠한 사유가 있는 공이 아니다. 본래로 현상자체가 없는 것이므로 공이 다. (體空, 뒤에 거듭 상술)

여기서 주의해 둘 것이 있다. 대개 범부는 현상만을 인식한다. 인식되는 현상은 그 모두가 공이라 했다. 그러나 현상이 아닌 것은 공이라 할 수 없다(不空).

이 불공(不空)의 진실처가 불보살의 입각처인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의 공을 집착하고 불광 의 진실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이 공은 죽은 것이다. 오히려 공에 걸려 죽은 것이다. 그 래서 이를 가리켜 변공(偏空)이니 완공(頑空)이니 악취공(惡取空)이니 한다. 공은 공이므 로 공도 공이어서 공이라는 말이나 생각을 일으킬 여지가 없다. 있다면 망설(妄說)이다. 여기서 불공(不空)의 진실상을 발견한 그것이 대승불교의 출발이다.

대승이란 무엇인가?

범어의 Maha-yana, '큰수레'의 뜻이다. 미혹의 현실에서 진리인 피안에 이르게 하는 yana (수레), 즉 부처님의 교법을 말한다. 그러므로 원래는 부처님의 교법, 그 모두가 Maha-yana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승'의 의미는 변화되었다.

불멸 후 부처님의 언행을 직접 전승하는 원시불교와 그의 주석적 연구에 치우친 부파불교로 나뉜 뒤 따로 부처님의 각행을 중심한 보살불교가 융성하면서 이 각행 위주의 보살불교 의 우월성을 표방하는 의미로 스스로를 Maha-yana 다른 교법을 Hina-yana(소승)라 함 에서 비롯된다.

대체로 소승을 자기 해탈을 목적한 자조자오(自調自悟)의 도라 한다면 대승은 각의 적극적 인 행에 중시한 보살의 도라 할 것이다. 흔히들 대승을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도라 하나 대승에 있어서의 '자(自)' 는 곧 '타(他)'요, '타'가 즉 '자'이어서 자타가 분립할 수 없는 것 이 대승의 입각처다. 개(個)가 전(全)이요, '전'이 '개'이면서 개와 전을 각각 살리는 이른 바 쌍조(雙照)의 리(理)가 대승이다. 그러므로 대승은 바로 '바라밀행'을 의미하며 바꾸어 말하면 근원적 실재의 전성개현(全性開顯)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반야심경은 이와 같이 반야공관(般若空觀)에 입각하여 중생의 무실성과 존재의 허망성을 척 결하고 불공(不空)의 대법을 현발하여 진리 현전(現前)을 목적하는 교법체계라 할 것이다.

종래의 통설에 의하면 '반야'는 공을 설한 것이며 이는 대승의 입문이며 제법실상을 설한 법 화사상이 구경의 대승이라 한다. 그러나 실로는 반야에서 진리당체가 전체 현성(現成)하 고 반야의 이(理)를 통하여 실상은 비로소 정립되는 것이므로 선후 우열을 논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2. 반야의 의의

반야는 중생의 미혹으로 야기된 현상계에의 속박을 타파하고 진리 본구(本具)의 완전 원만 성을 현실 위에 구현시키는 데 근본 의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야를 통하여 정견(正見)을 세우며 정견에 의하여 굳건한 믿음과 명확한 이해로써 현실적 행동의 구체적 지표가 제시된다. 여기서 반야는 진리의 행동화라는 구체성 을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야는 진리의 뒷받침이 된 대행(大行)의 전개를 의미한다. 이 것이 반야행이며 창조행이다. 거듭 말해서 대행이 즉시 반야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필자가 보기에는 이러한 '반야'의 의미는 크게 등한시되어 있어 보인다.

반야에서 공을 관하며 실교(實敎)에서 보살도를 염하되 이것이 관념화되고 있는 것이다. 각 (覺)의 의미가 관념화하고 명상이나 '반야삼매' 속에서 파악되거나 또한 그것이 파악되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될 때 거기에서 불교는 명상이나 삼매를 거쳐 파악되는 종교가 되고 만다.

동시에 그것은 아직 범부와는 거리가 있는 마땅히 앞으로 얻어질 진리로 남아 있게 된다.
이런 종교는 행동이 결여된 하나의 '수도하는 종교'로 그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 한 삼매 속 진리를 찾는 수도하는 종교로 삼매를 완성하고 진리를 파악하기 전에는 오직 고 결한 수도인의 규율이나 생활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진리를 구체적으로 전개하는 '행'은 없게 된다.

원래 행이 즉시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며 역사적 현실을 움직이는 실질인 동시에 동력이다.
그러므로 행은 역사성 사회성과 직결된다. 행이 없다는 것은 곧 역사의식 사회의식의 결여 를 의미한다. 대개 역사의식 사회의식이 없는 종교는 그 사회를 번영으로 이끌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힘이 없는 것이다. 현실을 진리에로 개혁할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명상 속 진리를 찾는 종교에서 현실을 개혁할 의지가 없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이 상사회라 할 진리세계는 이미 명상 또는 삼매 너머에 완성되어 있는 것이며 이것은 행동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매나 정신수양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 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이 땅의 영광을 위한 행동이 나올 여지가 없게 된다.

불교는 이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공'이라는- 진리에 도달하는 관문을 개념화하고 진리는 '공'을 거쳐 장차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한 진리는 언제나 '공'이라는 장벽에 거쳐 장벽에 막혀 있어 우리와는 격리 될 수밖에 없다.
만약 불교와 반야를 이와 같이 이해하는 이가 있다면 불교에서 역사의식, 사회의식을 찾는 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다. 그런 믿음으로는 사회가 발전하기는 극히 힘들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반야를 올바로 이해한다는 것은 역사와 사회를 광명화하고 활력을 부여하는 데 결 정적 의의를 갖는 것이라 하겠다. 동시에 개인의 생활자세를 긍정과 부정, 피동과 능동, 소 극과 적극, 행동과 관념, 낙관과 비관으로 결정하는 관건이 된다.
만약 오늘날의 한국 불교가 소극과 회피로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거나 안이한 현실 긍정으로 주체적이며 창조적 열의가 결여했거나 또는 명예로운 국가와 민족을 건설하고 나아가 세계 평화 번영을 위한 적극적인 책임감과 행동이 저조하다면 그것은 반야에 대한 그릇된 인식이 그 일반의 이유가 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불교로 하여금 행이 없는 종교로 전락시킬 수 있는 요인은 이밖에 또 있다. 그것은 불공(不空)의 진리는 오도(悟道)한 특별한 사람에게만 있는 경계라고 자굴(自屈)하는 점이 다. 그리하여 불공의 실질은 '미지(未知)'와 '불가득(不可得)'과 '알 수 없는 것'으로 묻어두고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다. 설혹 도덕적 선행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모두가 유루인(有漏因, 번 뇌의 한 형체)이며 생사의 근원이라 하여 행이 없는 관념 속에 침체하는 것을 최고 가치로 삼는다.

부처님은 불공(不空)의 진리를 말씀 안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대승경전이 이 불공의 무진행(無盡行) 실상청정행(實相淸淨行)을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만약에 분(分)이 아니라고 회피하며 그것은 오(悟) 후의 일이요, 달도(達道)한 사람의 경계라 하여 외면하는 일이 있다 면 이것이 '행동의 불모지'가 되 또 하나의 요소가 된다.

우리는 마땅히 반야의 참뜻을 바로 알아 '바라밀'의 대행을 전개할 것을 명심하여야 하겠다.

3. 반야심경의 구조

심경은 대체로 4분하여 말할 수 있다. 입의분(立意分), 파사분(破邪분), 공능분(功能分), 총결 분(總結分)이다. 처음 입의분은 반야바라밀다에서 보니 일체 현상(五蘊)은 공하였다는 정언(定言)이다. 그래 서 일체 고액(苦厄)에서 해탈했다는 것이다. "관자재보살…에서 일체 고액을 건넜어라. (度一切苦厄)"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다음의 파사분은 반야 공관으로 현상과 가치와 방편적 교법시설을 비춰보는 대문이다. 여기 서 물질현상이 공이요, 공이 곧 일체 현상이라. 이와 같은 공성(空性)은 일체에 미만(靡滿) 하여 육근(六根), 육진(六塵), 육식(六識), 십이인연법 내지 사제법(四諦法)까지도 도무지 없 는 것임을 노정(露呈)시킨다. '색(色)'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 색불이 공 공불이색(色不異 空 空不異色…)에서 지(智)도 없고 얻음도 또한 없다. 무지 역무득(無智 亦無得)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셋째로 공능분(功能分)은 이와 같은 오온(五蘊)과 십팔계(十八界), 교법까지도 반야광명 앞 에서는 존재성이 공허함을 들어 보이고는 거기에 현전된 경지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한다.

그것은 마음에 걸림이 없어 자재(自在) 무애(無碍)하여 마침내 대안락지(大安樂地)에 이르러 성불함을 밝히는 것이다.

끝으로 총결분은 '반야바라밀다'가 진리실상지(眞理實相地)의 무한한 공덕을 현출(現出)시키 는 대위력의 소임임을 결론한다. 그리고 이는 참으로 진실함을 거듭 다지고 이와 같은 최고 구극의 진리에 도달한 '각(覺)'의 경지(bodhi)를 구명한 결정적 찬구(讚句)로 일경(一經)을 맺 는다. 이것은 경의 끝부분 "반야바라밀다는 대신주(大新呪며, 대명주(大明呪)"에서부터 진언 까지가 이에 해당한다.(계속)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해 주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