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새롭게 보게 해준 스승 백남준

고(故) 백남준 49재 - 화제의 현장

2007-09-11     관리자

“…대중은 아무 예술가나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저널리즘과 기타의 경로를 통하여 이미 신화화된 예술가를 존경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존경받는 예술가 치고 신화화하지 않은 예술가가 있는가.… 중요한 일은 대중은 언제나 신화를 기다리고 있으며 감동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가들의 역할이 크다.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을 우매하다고 생각하는 예술가가 있다면 그것은 자가당착이다.…”

“내 말에 속지 마라.”고 하셨던 성철 스님(1912~1993)의 말씀 그 한 뜻을 백남준(1932~2006)과의 대담(동아일보 1999년 12월) 행간에서 읽는다. 그 역시 “예술은 사기다.”라고 일갈했으니 , 위대한 종교지도자와 위대한 예술가를 한 반열에 놓고 이야기 하려는 것 역시 독자나 대중에 대한 무례가 되는 것은 아닐지 ….

성철 스님께서 종정에 취임한 직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했다는 그 말은 종정이란 자리에 현혹되어 좋은 말 따위를 얻어 듣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무한한 능력을 스스로 개발해 쓰도록 하라는 강력한 뜻을 전달한 것이리라. 백남준의 명제 또한 예술의 주체로서 대중 스스로 자기 자신의 발견을 요구한 것이리라.

그러한 메시지를 지난 18일 봉은사 마당, 낮과 밤으로 이어지는 그의 49재에서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바이올린에 줄을 묶어 끌고 다니며 땅과의 마찰음으로 바이올린 소리를 내는 ‘옛 파격(破格)’-바이올린과 끈(1961)이 봉은사 종각 앞에서 펼쳐졌다.

그에 앞서 지난 16일 백남준의 마지막 작품 ‘엄마’가 봉은사 법왕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일자형 대나무 옷걸이에 팔을 활짝 벌린 살구빛 두루마기가 TV 모니터 앞에 드리워있는 영상 설치 작품이다. TV 속에는 북소리, 장구소리와 함께 한복을 입은 소녀들이 전통 춤을 추거나 공놀이를 하는 화면이 지나가고 중간중간 ‘엄마’라는 한국말이 반복적으로 들린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못했던 백남준이 살아생전 그토록 그리워했다던 바로 그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 같다. 두루마기 왼쪽 뒷자락 하단에는 그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힘들게 새겨 넣었을 분홍빛 서명이 뚜렷하다. 엄마 품 같은 고향에 오고자 했던 작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엄마’는 그의 다른 작품 ‘손’과 함께 그의 타계 100일이 되는 5월 9일까지 봉은사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다음날인 17일 오후 백남준의 49재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있던 장조카 켄 백 하쿠타(한국명 백건) 씨에게 생전 백남준의 불교적 신념은 어느 정도였는가를 물어보았다. TV를 위한 선(Zen for TV, 1963), TV부처(TV Buddha, 1974) 등 불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세계에 선보였으나 정작 불교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절에 자주 가시지는 않았지만 불교가 몸과 마음에 배어 있는 분이셨다. 여기 봉은사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 ‘엄마’를 보더라도 다른 어느 곳보다 여기에서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은가?”

하기야 작가는 작품으로 자신의 뜻과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자의 우문이었다.

18일 오후 5시 50분, 봉은사에서는 백남준의 부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와 국내 유족, 미술계 관계자 및 일반 추모객 1천여 명이 함께한 가운데 세계적인 아티스트 고(故) 백남준을 떠나보내는 동양의 굿판과 그의 생전 퍼포먼스가 한판 난장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는 일본·독일 유학을 통해 동양의 선불교에 심취해 있던 전위 음악의 대가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를 만나 본격적인 예술의 길로 들어선다. 1963년 독일에서의 첫 개인전(‘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 난데없이 도끼를 들고 나타나 전시 중인 피아노를 때려 부수는 퍼포먼스를 보여줌으로써 예술계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 그는 1984년 TV와 인공위성을 통해 뉴욕과 파리, 서울 등지로 생중계되었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시대를 예언한 작가로 전 세계의 시선을 한몸에 받게 된다.

1993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세계 주요 매체들이 뽑은 20세기 대표 예술가에 이름을 올림으로써 명실상부한 세계 예술계의 거장으로 우뚝 선 백남준.

수많은 작품 활동을 통해 스스로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던 그는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졌음에도 휠체어에 앉아 오른손만으로 끊임없이 작품을 쏟아내며 2000년 2월 뉴욕 미술의 메카라 할 구겐하임 미술관에서의 회고전과 이듬해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순회전,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식 작품까지 성공리에 보여준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비디오예술의 아버지, 행위예술가, 테크놀로지 사상가, 현대 예술의 살아있는 신화. 그림자처럼 백남준을 따라다니는 화려한 수식어들을 뒤로 한 그의 49재는 마지막 가는 길 부처님과의 뜻깊은 인연을 나누고 있는 것이리라.

오래전 ‘TV 부처’와 ‘테크니컬 부처’ 등을 통해 부처라는 동양 사상과 TV라는 서양 기술을 하나로 만들었고, 전 생애 작품을 통해 전통, 질서, 권위를 부숨으로써 참여와 소통, 예술 대중주의와 인간적인 예술을 부르짖던 전사(戰士)요,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으니 말이다.

“백남준은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주는 사람이었고 창의력과 상상력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보게 해준 스승이었다.”

존 헨하트(John Hanhardt,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수석 큐레이터)의 회고가 아니더라도 자랑스런 한국인 백남준, 그의 삶은 오래도록 세상을 위한 예술, 더 나아가 예술의 종교가 되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