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화산 용주사(龍珠寺) 나와 부모를 찾아 떠나는 테마여행

템플스테이

2007-09-11     관리자

글· 양동민

미국에 개척정신이 있고, 일본에 무사정신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효(孝)의 정신이 있다. 그만큼 효는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자랑스런 정신문화이다. 그러나 급격한 산업화가 진행되고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모든 관점이 경제력으로 집중되는 시대에 효의 자리는 점차 설 곳을 잃어가고 있다. 효를 바탕으로 근본적인 인성(人性)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병폐를 가장 빠르고 온전하게 치유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다행히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효행을 가장 큰 미덕으로 삼고, 효의 정신을 지켜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효의 대본찰인 조계종 제2교구본사 화성 용주사(주지 정호 스님)는 가장 앞장서서 우리가 잠시 잊고 지냈던 효의 가르침을 일깨우기 위해 ‘효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며 효의 가치를 선양하고 있다.

효심의 본찰 용주사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사찰(갈양사)로서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왕실의 원찰로 삼았다.

사도세자는 28세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숨을 거뒀다.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하던 정조는 보경 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부모님의 열 가지 은혜와 그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가르치는 경전) 설법을 듣고 이에 크게 감동하여,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경기도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화산(花山)으로 옮겨와 현륭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이곳에 절을 지었다. 낙성식 날, 정조가 꿈속에서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것을 보고는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이에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다.

이후 용주사는 ‘효(孝)’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사찰이 되었으며, 정조의 뜻을 받들어 효행교육원을 설립하여 효를 주제로 한 각종 수련회와 템플스테이를 통해 바른 인성교육을 사회로 회향하고 있다.

번잡한 도로를 벗어나 용주사로 들어서는 길목은 곧게 뻗은 느티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서있어 봄길 드라이브 코스로 안성맞춤이다. 몸과 마음이 한결 상쾌해진 기분으로 템플스테이가 진행되는 효행교육원에 들어서자 자원봉사자들이 참가자들을 맞을 준비로 분주하다.

이 날은 마침 새로운 주지스님이 오시는 날이라 자축하는 의미로 입제식에 앞서 육법공양을 올렸다. 육법공양이란, 향·초·꽃·과일·차·쌀 여섯 가지 공양물을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으로서, 그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여 나와 남이 함께 해탈하기를 간절히 발원하는 의식이다.

입제식과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김영순 포교사의 안내로 용주사 경내와 효행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용주사는 정조의 효심으로 왕실의 지원을 받아 지어졌기 때문에 다른 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색다른 모습이 눈에 띈다. ‘효성전’과 부모은중경이 새겨진 ‘효행탑’이 있는가 하면, 대웅전 앞에 위치한 천보루(天保樓)는 궁궐에서나 볼 수 있는 웅장한 누각으로 그 양 옆에 사대부가의 행랑채와 비슷한 요사채가 이어져 있다.

이 밖에도 정조의 지시로 김홍도가 그린 대웅전 후불탱화, 정조가 직접 심어 수령이 200년이 넘었으나 지난 해 고사(枯死)한 대웅보전 앞의 가느다란 회양나무, 손꼽히는 걸작으로 평가되는 고려시대 범종은 용주사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부모님 은혜 감사합니다

전통적인 예법에 따라 저녁 발우공양을 마치자, 어느새 고즈넉한 사찰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참가자 24명 외에도 인근 부대에서 사병 20여 명이 인성을 계발하고 효심을 싹틔우기 위해 템플스테이에 함께 참여했다.

잔잔한 명상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포교국장 도정 스님이 건네준 촛불을 하나씩 들고 효행원을 천천히 돌며 진행자의 멘트를 따라 촛불에 마음을 비춰본다.
“미지의 세계에서 생명이 되고자 했던 것들은 빛을 찾아 나섭니다. … 어두운 적막에서 빛이 있는 곳으로 걷고 또 걸었습니다. … 부모님을 통해서 하나의 생명으로 지구에 왔습니다.”

자성을 찾아가며 부모와의 인연을 통해 현재의 나를 바라보는 과정이다. 참가자들은 촛불을 들고 효행탑으로 가서 탑돌이를 하며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을 올렸다. 효행원에 돌아와 부모은중경 CD를 들으며 다시 한 번 부모님의 자애로운 모습을 떠올리며, 그 동안 세상사에 쫓겨 새까맣게 잊고 지냈던 자신의 불효를 참회한다.

이어서 김영동의 108배 명상음악에 맞춰 절 한 배에 염주 한 알을 꿰며 정성을 다해 108배를 올렸다. 다 꿰어진 108염주를 보며 비로소 참가자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부모은중경의 말씀에 보면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업고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서 수미산을 백천 번을 돌고 돌아도 부모의 깊은 은혜는 다 갚았다고 할 수가 없다.”고 하였지만, 부모님을 떠올리며 절을 올리고 작은 선물을 마련했다는 데서 오는 기쁨일 것이다.

불심과 효심이
자성을 일깨우고

다음 날 새벽 2시 45분, 참가자들은 일제히 일어나 대웅전 앞에 모였다. 스님과 함께 도량석을 돌고, 종각에서 직접 타종하여 우주의 울림을 느끼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용주사의 모든 대중스님들과 함께 대웅전에서 새벽예불을 올리고, 효행원으로 돌아와 참선과 부모은중경 독송을 하였다. 불심과 효심이 서로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자성을 일깨우고 있었다.

다시 발우공양으로 아침공양을 한 후 울력을 나갔다. 도정 스님은 “사찰에서는 비질도 위의(威儀)를 갖춰야 한다.”며 직접 화려한(?) 시범을 보여줘 참가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울력을 마치고 용주사를 감싸고 있는 화산으로 산행을 나섰다.

산행코스는 선방스님들이 포행하는 장소로서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지만,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에게만 특별히 개방하고 있다. 가끔 맞은 편에서 걸어오는 스님과 마주쳐 합장인사를 하기도 하고, 선방스님들이 직접 만들어놓은 다리를 건너는 재미도 있다. 소나무 숲에 이르러서는 간단한 선체조로 몸을 풀고, 소나무를 끌어안고 명상을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어본다.

모든 일정을 끝내고 회향에 앞서 둥그렇게 모여앉아 도정 스님과 차담이 펼쳐졌다. 참가자들의 소감이 쏟아진다. “부모은중경을 독송하며 부처님 말씀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 잘못한 일들이 떠올라 무척이나 괴로웠습니다.” “스님들이 따뜻한 방에서 책이나 보고 생각이나 조금 하시는 줄 알았는데, 치열하게 수행하시는 모습을 보며 진실된 불자가 되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올 때는 몸이 좋지 않았는데 사찰에서 의미있는 하루를 보내니 가뿐해졌습니다.”

너무도 인상적인
템플스테이 자원봉사

용주사 템플스테이는 2002년 월드컵 당시부터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내 여러 사정으로 중단되었다가, 포교 일선에서 남다른 열정을 보여주시는 도정 스님과 용주사 거사회·청년회 중심으로 이루어진 자연봉사자들의 원력으로 지난 해 10월부터 ‘효’를 주제로 본격적으로 열리고 있다.

실제로 이번 템플스테이에서 10여 명의 자원봉사자들의 활약은 눈부실 정도였다. 모든 프로그램을 매끄럽게 진행하고 참가자들이 전혀 불편을 느끼지 못하게끔 사전 회의를 통해 철저히 준비한다. 육법공양부터 발우공양, 촛불명상, 염주꿰기, 선체조, 음악, 간식 등 자원봉사자들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발우공양이 끝난 후 바로 깨끗이 닦아 청결하게 보관하는 일도 이들의 몫이다. 심지어 국내에 없는 명상CD를 외국에 가서 구해오기도 한다.

“마음을 가다듬고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으니, 봉사하면서 제가 느끼는 보람이 더 큽니다. 또한 불교를 표면화시켜서 꽃으로 승화시키는 일은 당연히 우리 불자들이 책임지고 맡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템플스테이 진행을 맡고 있는 이철수 팀장의 말이다. 일사분란하게 자신들이 맡은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처리하는 모습에 불교 신행단체의 성장을 넘어 불교 포교의 미래마저 밝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