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호법신장이 되어

우리스님 | 남한산성 망월사 성법 스님

2007-09-11     관리자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북한산성과 더불어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울을 수비하던 군사요충지였다. 이 산성의 축성에 벽암각성(碧岩覺性, 1575~1660) 스님이 도총섭(都摠攝)이 되어 8도의 승군을 동원하였고, 전국에서 동원된 수백 명의 스님들에 의해 3년에 걸쳐 축조되었다고 하니 스님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성이다. 그래서인가. 산성 곳곳에 쌓아올린 석축, 돌무더기, 굴러다니는 작은 돌 하나도 그냥 보여지지 않는다.
기록에 의하면 남한산성에는 가장 오래된 절 망월사(望月寺)를 비롯하여 장경사 외에 산성 내 9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의병 본거지로 탄로나 일제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다. 그나마 장경사는 요사채만 그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있었고, 나머지 사찰들은 폐사가 된 채 잡초만 우거져 있어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망월사 복원불사 발원 기도 가피
그런데 시절인연이 도래한 것일까. 1981년 비구니 성법(性法, 79세) 스님이 원을 세우고 이곳 망월사 터에 들어왔다. 길도 없는 산중에 잡초만이 무성하게 우거진 채 오막살이 판잣집 한 채가 고작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도 이곳은 그린벨트 지역인데다 문화재 보호구역인지라 불사가 쉬운 것은 아니었다. 웬 뱀은 그렇게도 많은지. 종류를 다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주위에서는 한사코 말렸다. 스님처럼 유능한 사람이 도심에서 포교를 하거나 대학 강단에 서야지 왜 산중으로 들어가느냐. 도대체 이렇게 험한 곳에 어떻게 혼자 살면서 절을 지으려고 하느냐.
그러나 스님은 묵묵히 기도를 시작했다. 화엄경 약찬게를 염하며 도량을 돌고 또 돌았다. 스님이 들어오던 해 정월은 눈이 참으로 많이 왔다. 길이 끊긴 채 오도 가도 못하는지라 설날이 되었지만 부처님 전에 떡국공양조차 올릴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웬 보살 한 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이는 예순 전후가 되었을까. 옥색 한복에 밤색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는 곱게 낭자를 해서 금비녀를 꽂았다. 동대문에서 포목상을 하고 있다고 했다.
“스님! 스님은 이 깊은 산중에 무엇 하러 오시었습니까. 공부를 하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절을 지으러 오셨습니까?”
“나는 이곳에 사리탑을 세우고, 글을 쓰고 싶어서 들어왔소이다.”
“그런데 이곳은 산신이 강하기 때문에 받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실 수가 없습니다. 산신할배 생일은 3월 16일인데 설 쇠고 할배가 좋아하는 것을 올리고 제를 올리십시오.”
“…. 차도 없고 길도 없는데 어찌 가실 겁니까. 추우신데 생강차라도 달여 드릴까요.” 하는데 눈 깜짝할 사이 그 보살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후 매월 음력 16일 사시에 산신법회를 모시고 있다.
그리고 또 얼마가 더 지났을까. 25년 전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툇마루에 걸터앉아있는데 갑자기 먹물 옷을 입은 스님들이 끝도 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웬 스님들이 저리도 많을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남한산성에서 승병으로 활약했던 스님들이었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그 많은 스님들을 모두 영접해 맞았다.
그리고 또 기도를 한 지 3년쯤 지났을까. 비가 오는 어느 날 신도 결혼식이 있는 날이었는데 갑자기 대명천지처럼 훤해졌다. 알고 보니 스님이 일본 유학시절부터 모셔온 백의관세음보살님이 방광을 하신 것이다. 방광은 6~7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기도 중 불가사의한 일들은 그 이후로도 계속해 이어졌다. 그 많던 뱀들도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없어졌다.

부처님을 향한 열정 하나로 걸어온 길
스님은 원래 금당이 있었던 자리에 극락전을 지었다. 1985년 백중날 상량식을 올리며 벽암각성 스님을 비롯하여 병자호란 때 전몰한 승병의 왕생극락을 발원하고,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호국영령들을 위한 천도재를 올렸다. “말로는 다 설명이 안 되는 것이 분명 있습니다. 정법이 아니라고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나라를 위해 산화해간 호국영령들과 도량을 보호하는 호법신장들을 잘 받들어 공양을 올려서 그런지 열악한 여건 속에서 이 많은 불사를 했는데 손가락 하나 다친 사람 없어요.” 스님이 국제포교사로 활동하던 중 인도 인드라 간디 수상으로부터 직접 모셔온 부처님 정골(頂骨)사리 3과와 스리랑카 대승정으로부터 모셔온 안구사리 등 10과를 5월 단오날 13층 사리탑에 함께 봉안해 모셨다. 사리탑 주변 병풍처럼 둘러쳐진 벽면에는 법화경 관세음보살 보문품, 여래수량품, 방편품을 판각하였다. 매월 휘영청 보름달이 뜨면 신도들은 법화경 게송들을 외우며 탑돌이를 한다. 극락전을 비롯하여 대웅전, 요사채, 사리탑, 산신각, 종각이 조성되기까지 스님의 기도원력, 그리고 한진그룹의 특별한 도움과 스님의 속가 유산, 화주보살들의 힘이 컸다. 1984년 망월사와 인연이 되어 20여 년째 스님을 모셔온 사무장 덕륜화 보살님은 “스님은 무슨 일이든 일임하면 그뿐 한 번도 장부를 보자고 하시지 않으십니다. 시주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특별히 떠받들지도 않으며,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세요. 손을 오므리기보다 펴는 것을 훨씬 편안해 하시지요.” 1929년 경북 안동에서 외동딸로 태어난 성법 스님은 퇴계 이황 선생의 15대 손녀로 할아버지가 이조 말 병조판서를 지낸 유학자의 집안에서 자랐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가족과 생이별한 스님은 1953년 강원도 오대산으로 들어가 출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우연찮게도 당신의 생일날 삭발을 하게 되었다. 삭발을 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제는 해결났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가난하던 시절 옥수수와 감자가루로 연명을 하면서 시작된 출가생활이었지만 한 번도 세속을 돌아본 일이 없다. 비구니로서는 처음으로 교도소 포교를 시작했다. 당시 대구교도소 남사에는 운문 스님이 여사에는 성법 스님이 교화활동을 맡았다. “죄의식을 갖지 말라. 본래 죄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 한 번 돌이키면 자유의 문이 열려있다. 이곳 교도소는 마음을 바꾸는 갱생의 집이다. 마음을 바꾸어라.” 그때가 서른 살 전후의 나이었다. 그러나 성법 스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부처님을 향한 끓어오르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에 나이나 성별을 떠나 당당했다. 비록 비구니의 몸이지만 열심히 공부하며 전법을 수행 삼아 웬만한 비판은 묵묵히 감수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되돌아보면 참으로 어려운 길을 걸어왔다. 편안히 앉아 수행을 할 여가가 따로 없었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이기에 나라사랑에 대한 성법 스님의 생각은 남다르다. 오직 나라를 살리고, 불교를 살리고자 하는 그 마음뿐이었다. 인생은 한바탕 꿈이라지만 경북 안동 퇴계 이황 선생의 후손으로 태어나 인류 최고의 양반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의 품안에 출가했으니, 몸가짐 마음가짐을 반듯하게 하고 욕 안 보이려 살아온 덕분에 이생에 온 본분은 다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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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법 스님|1929년 경북 안동 출생. 1953년 강원도 오대산 지장암 입산. 본견 스님을 은사로 득도해 월정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으로부터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1958년 직지사 강원 대교과, 중화민국 문화대학 동양철학과, 일본 정토종 비구니강원 졸업. 중화민국 임제종 총본산에서 천불대계와 삼장법사 학위 수지. 1972년 국제포교사로 한국불교를 세계에 알리며 일본, 대만, 중국, 인도 등과 불교문화교류에 힘써왔다. 1980년부터 세계불교도우의회(WFB) 한국연합지부 이사이기도 한 스님은 대가 없는 국내외 포교활동에 대한 공적으로 조계종 포교대상(1988년)을 받기도 했다.
2000년에는 영국 명문대 케임브리지대학 종교사회복지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케임브리지대학 명사록에 이름이 등재되어 있다. 직지사 서전, 상주 남장사 관음선원, 김천 관음사, 서울 묘관음원, 남한산성 망월사 등을 중창, 창건, 복원하였으며, 2003년 일본 후쿠오카현 정행사에 이퇴계 선생 현창비를 건립한 성법 스님은 현재 망월사에 주석하며, 한·중·일 불교문화교류에도 일익을 담당하고 계시다. 『불보살의 본적』, 『불교에서 본 미래의 인생관』, 『대승기신론 강화』, 『한국불교전교사』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