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버클리 무문선원

김나미가 만난 사람/캘리포니아에서 보는 숭산 스님 행적 4

2007-01-24     관리자

그 스승에 그 제자일까. 다이아나에게 구체적으로 선이 뭐냐고 묻자 “지금 뭐하고 있니?” “어떻게 남을 도울까?” 이 두 가지라고 자신있게 답을 준다. 화계사와 수덕사 견성암에서 오래 했던 용맹정진의 결과물인가 보다.
그러나 다이아나는 지도법사가 되지 않았다. 법문으로, 또 화두로 사람들을 이끌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직접 수행을 하는 것과 제자를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버클리 무문선원이 또 다른 장소인 버클리 대학 앞 파커 스크릿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1994년, 16년이 지난 시점에 다 놓아 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옛 평범한 가정으로 돌아오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훌륭한 새 지도법사가 탄생하자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한 것이다.
마침 숭산 스님도 건강이 나빠 한국으로 돌아가시고 나니 선원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무문선원이 자리를 옮겨 이사 나간 다음 다이아나는 가정으로 돌아와 적응하는 데 무척 힘들었다 한다.

▲ 숭산 스님
Only doing it

옛 무문선원은 지난 10여 년간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고 지금은 사람들은 이 집을 ‘작은 상가(Diana’s Sangha House)’ 라 부른다. 숭산 스님이 버클리에 오시면 쓰시던 2층 방엔 버클리 신학 대학원생이 살고 있다. 자그마한 토굴을 연상시키는 다이아나 집 거실 옆 법당에는 스님의 사진과 금빛 불상이 놓여 있다. 여전히 주 2회 아침 참선과 108배를 하며 30여 년 전 스님 곁에 있었던 제자들과 교류하고 있다.
스님이 몸이 많이 안 좋아 한국에 가실 즈음엔 각자가 홀로 독립을 할 만큼 커 있던 것은 다행이었다. 많은 제자들이 ‘관음선종’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미국 전역으로 흩어져 스님의 가르침을 각자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법을 이어 나가고 있다. 그 곳이 어디이든 스님이 생전에 주셨던 “Don’t know mind” “Only doing it” “go Straight”, 이 세 가지 가르침은 여전히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
“스님은 대단히 위대한 분이시고 한국이 자랑스러워해야 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한국문화를 알게 해 주셨고 그 문화 속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건 큰 선물이었어요. 스님이 세상에 줄 것이 많은 분이었기에 스님에게 동참했을 뿐인데 얻은 게 많아요. 지금도 우리를 가르치시니까요.”
10여 년 전에 새로 자리잡은 현재의 버클리 무문선원은 선원장인 미국인 제프 키츠, 본성 법사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매일 참선, 예불과 함께 정기 수련대회도 하는데 정기 수행자 가운데는 이미 법사가 된 사람도 있고 앞으로 곧 법사가 될 사람도 있다. 이색적인 점이라면 매주 수요일마다 오픈 하우스를 열어 누구라도 참석해 자리를 같이 하도록 한다.
수요일 오픈 하우스 법문시간, 동부 홍법원에서 다니러 온 법사 한 분이 법문을 해주었다. 자리를 메운 사람들은 대부분 버클리 대학 대학원생들, 학교 직원, 또 버클리 근교 사람들이다. 스님의 명성을 듣고 온 사람도 있고 20여 년 전부터 무문선원을 출입하는 사람도 있다.

비록 스님은가셨지만!
무문선원의 예불에는 영어로 음역한 우리말 예불문을 쓰는데 반야심경은 영어로, 천수경은 산스크리트어로 읽는다. 완전한 한국식 법당으로 금빛 불상 뒤에 관세음보살 족자와 스님의 사진이 걸려 있다. 법당 내에서 보는 익숙한 우리 것 때문인지 마치 서울의 동네 사찰에라도 온 것처럼 낯설지 않다. 법회에도 스님의 스피릿(Spirit)이 살아 있다. 만약 숭산 스님께서 이런 법회광경을 내려다보고 계신다면 무척 흐뭇해하실 것 같다.
셋이나 되는 아이들에 남편까지 있는 몸으로 자신을 던져 스님을 보필하고 시봉했던 사람, 아직도 스님은 자신을 가르치며 인생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한다. 다이아나는 스님이 11월 돌아가시기 전, 9월에 서울 화계사로 달려가 스님을 만났다.
그 얼마 후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또 한번 스님의 다비식에 다녀오느라 또 한국에 다녀왔다. 그 자리에서 옛 도반들을 모두 만났지만 어쩌면 그것으로서 한국 방문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한다. 그러나 74세의 몸으로도 한국과의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 이미 한국과 스님은 자신의 한 부분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한 인간과 인간이 사제지간을 떠나 하나의 가슴으로 만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다이아나는 스님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숭산 스님에게 다이아나와 같은 제자가 없었다면 스님의 서부 포교는 아마도 불가능했었으리라. 다이아나를 통해 버클리에서의 스님의 포교 이야기를 들으며 난 한국인으로서, 또 한국 불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큰 긍지를 느끼게 되었다. 참으로 고마우신 스승님은 몸은 가셨지만 꼭 다시 돌아오실 것만 같다. 스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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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숭산 스님은 1947년 마곡사에서 출가 득도, 49년 수덕사에서 고봉 선사를 법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였으며, 화계사 주지, 불교신문사 초대 사장, 조계종 비상종회의장, 조계종 원로의원, 화계사 조실 등을 역임하셨다. 특히 전 세계에 한국 불교를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치셨다.
한창 때는 1년에 지구를 두 바퀴나 돌기도 했으며, 2004년 세수 77세, 법랍 57세로 입적하시기 전까지도 1년에 서너 차례씩 미국, 홍콩, 말레이시아, 유럽 등지의 해외선원을 순방하셨다. 살아계실 때 달라이라마, 틱낫한 스님 등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3대 생불(生佛) 중의 한 분으로 추앙받았다. 저서로는 『큰스님과의 대화』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온 세상은 한 송이 꽃』 『천강에 비친 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