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수학] 반야심경과 군론

불교와 수학

2007-09-09     김용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자식에게는 아버지이며 부모님에게는 자식···, 학생들에게는 선생님이라는 식으로 사람마다 다르게 나를 부른다.
나는 나로서, 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와의 관계에 의해 그 존재가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나의 머리 속에는 가득하게 수많은 촛불들이 가지런히 서면서, 고요하게 타오르는 모습이 떠 오른다. 가벼운 바람에 촛불이 일제히 흔들리기도 하는 것이 환상적인 세계로도 보인다.
나는 그 중에, 타오르고 있는 한 개의 촛불이다. 나에게 그 촛불을 주신 분은, 나의 바로 뒤에 서있는 촛불인 부모이며, 그 뒤에는 조상들에 해당하는 무한의 촛불의 행렬이 있다. 나의 앞에는 자식, 옆으로는 형제의 불꽃들이 타오르고 있다. 처음과 끝이 없는 촛불의 세계에서 저마다 스스로의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나는 나지만, 서있는 위치에 따라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나를 자식, 아버지, 친구라는 식으로 부른다.
만다라의 세계에는 어디에나 부처가 있다. 이 세상은 어디로 가나 살아있는 사람이 있으며, 저마다 삶의 보람을 찾으면서 자신의 몸을 불태우고 있다. 열심히 스스로의 길을 묻는 사람으로부터 부처는 연상(聯想)한다.


자신이 관계하는 관계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Kierkegaard, 1813-1855)가 쓴 다음의 난해한 글 때문에 고민한 철학 청년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필자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인간이란 정신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신이다. 자신이란 무엇인가? 자신이란 자기 자신에 관계되는 관계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관계에는 관계가 자기 자신에 관계되는 것······, 그 때문에 자신이란, 단순한 관계는 아닐 것이며, 관계가 자기 자신에 관계함을 뜻한다.」(죽음에 이르는 병 중에서)
일반 언어로써 인간의 실존문제를 설명하기는 적절하지 못할 때가 있다. 누구와도 통할 수 있는 언어는 보편의 성격을 지니는데, 실존은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키에르케고르의 글에서 고통에 찬 사색의 행로를 엿본다. 그러나 필자가 다소나마 이 난해한 글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된 것은 현대 수학의 군론과의 연관을 감지했을 때였다.
새 수학의 사상이, 교육 현장에까지 침투되었을 때는 군론이 국민학교 산수에도 등장한 적이 있었다. 가령 정수의 집합을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성질이 있다.

(1) 정수에 정수를 더하면 정수가 된다.
(2) 정수는 더하는 순서에는 관계없이 일정한 값을 얻는다.
(3) 0은 정수이다.
(4) 어떤 정수도 더하면 0이 되는 정수가 있다.
1,2,3,4의 관계가 성립하는 집합을 「군」이라고 한다. 정수나 실수 집합은 저마다 하나의 군을 이루고 있다.
이 사실을 이용해서 나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관계를 생각하면서 나 자신과 관계되는 것 전체를 생각할 때, 그것이 하나의 군처럼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생각을 확대해 가면 나와 직접 이어지는 선이 없다 하더라도 그 관계의 관계라는 식으로, 보이지 않은 선에 따라 나를 중심으로 둔 관계의 군은 방대한 세계를 형성한다.
군론은 현대 수학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정리는 「쌍대의 원리」로 알려져 있다. 어떤 특수한 조건 안에서는 「하나의 군 G가 있으면
, 그들의 관계만으로 형성되는 G가 있다. 이 때 G와 G는 같다. 〈수학적으로는 보다 엄밀하게 기술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뜻에서 이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가령 나의 가족의 군 G를 모두 관계로 바꾸어 생각한 G〈관계군〉와 같은 구조이다.
이 정리의 본 뜻은
「집합은 그들 사이의 관계와 같다.」집합의 요소에 주목해서 말한다면 「요소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의 관계는 요소이다.」이며, 간단히 말해서 「요소는 관계이고 관계는 요소이다.」가 된다. 여기서 요소를 자신으로 해석한다면 앞서 소개한 키에르케고르의 글의 내용과 같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이 관계하는 관계는 자신이다.」
반야심경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갈파(喝破)한다. 「색(色)」이란 물질적인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의 집합 또는 인간 사회에서는 그 한 요소가 인간이다. 현상 세계를 말한다면 낱낱의 존재가 곧 색이다. 그것이 곧 공(空)이다. 반야심경의 철학에서는 물질적인 존재 사이에 있는 관계를 공으로 본 것이다. 다시 한번 「요소는 관계」라는 인식을 전제할 때, 관계가 곧 공임을 알게 된다.
대승불교의 철학은 공이 근본으로 되어 있다. 모든 존재와 현상이 연기(緣起)이므로, 실체가 없는 공이다. 요소〈존재하는 것〉는 연기〈관계〉이고, 연기〈관계〉가 요소〈존재〉이며 그 실체가 공이다. 공의 철학을 개재하여 전개되는 존재와 관계〈연기〉의 일치가 용케도 현대 수학에 있어 군론의 가장 아름다운 정리와 일치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물론 수학적 논리 구조와 철학이라는 차이는 있다. 그러나 의미론적인 구조는 한마디로 「요소는 관계이고 관계는 요소이다.」가 되는 것이다.
현대 수학에서는 대상에 한계가 없다. 특히 집합론에서 말하는 요소는 구별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좋다. 물질이건 또는 사회 현상이건 가리지 않는다. 「물질적 현상으로서 존재하는 것, 즉 색이다.」수학적으로 말한다면 색의 모임이 「집합」이고 그것이 모여 「군」을 이룬다

구조주의적인 사고. 

최근 구조주의라는 이름 아래 사회적 현상이나 인문적 가치의 문제까지도 퍽 넓게 다루어지고 있다. 처음 인류학에 구조주의를 도입한 사람은 불란서의 래비스트로스(Levi stoauss)였다. 그는 당시 미개민족의 혼인관계를 연구하다가, 그들의 복잡한 결혼방법의 구조를 수학자의 도움을 얻어 그것이 군이 됨을 밝힌 것이다. 그의 저서 [친족의 기본 구조]는 구조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맡았다.구조주의적 사고는 가능한대로, 대상을 높고 넓게 관찰하여 세상의 본질을 파악할 것을 시도한다. 현대수학의 대상은 종래의 수나 도형을 떠나 모든 현상의 기본 구조를  생각한다. 군론과 인문, 사회, 과학이 만나게 된 것은 필연적이라 하겠다.

불교는 이성의 종교로서, 전 인류의 문제를 억겁(億劫)의 과거로부터 영원의 미래에까지 걸쳐 관찰한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탄생, 삶 그리고 죽음 사이에 가로놓인 본질의 구조적인 문제가 대상이다. 여기에 수학적인 사유가 개재된다.

실존철학과 구조주의적인 사고가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짧은 글에 함축되어 있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인류학, 사회학, 수학..... 등의 학문은, 목적에 따라 연기(緣起)의 구조를 주목한다.

불교의 [반야심경]에서는 먼 태고로부터 영원한 미래에 걸쳐 타오르는 연기의 구조를 밝혔다. 타오는 불꽃은 색(色)이며, 그것은 오직 연기로만 존재하고, 이들 불꽃은 모두 타서 태고의 고요함으로 돌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