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활약한 우리 스님들ㅡ고구려편ㅡ

한국불교사

2007-09-08     관리자

  일본 초대 승도(僧都) 덕적(德積)

 일본  서기(日本書紀 卷22 推古32年)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624년(推古32년) 4월에 처음으로 스님들을 단속하고 보살피기 위한 승니 검교(僧尼檢校)의 교단통제(敎團統制)기구이며, 소임인 승정(僧正)과 승도(僧都)를 두었는데, 관륵(觀勒)을 승정으로 삼고 안부 덕적(鞍部德積)을 승도로 삼았다는 것이다.

 승정은 말 할 것도 없이 교단 최고의 통제 책임을 행사하는 소임이며, 승도는 승정을 보좌하는 승정 다음의 교단 책임자이다. 이러한 교단제도는 물론 중국에서 비롯되었던 것인데, 남북조(南北朝)시대에 주로 남조에서 행하여졌던 승단통제기구였다. 북조에서는 주로 승통(僧統)과 도유나(都維那)의 제도가 행해졌으므로 고구려와 신라가 이 승통 도유나의 제도를 택하였었다.

 백제에서는 중국 남조의 제도인 승정과 승도의 제도를 택하였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 갔던 백제의 고승 관륵(觀勒)이 일본 조정에 건의하여 비로소 설치하게 된 교단통제의 기구이므로 승정과 승도를 두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와 아울러서 최초의 승정을 백제의 관륵스님으로 삼았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승정 다음의 승직(僧職)인 승도(僧都)를 안부 덕적(鞍部德積)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에는 최초의 승정(僧正)인 관륵은 백제의 스님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데, 승도인 안부 덕적에 관해서는 전혀 그 언급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 자체가 일본인의 이름처럼 보이고 있어서 스님의 이름같지도 않은 것이 사실이다.

 스님의 이름을 안부덕적(鞍部德積)이라 한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렇다고 스님 아닌 속인에게 승도(僧都)라는 중책을 맡겼을 리가 없을 것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 승도는 북조 계통의 도유나(都維那,신라에서는 大維那)와 같이 승정 (또는 승통)을 도와 승니의 기강을 바로잡고 총찰하는 중요한 승직으로 되어 있다.

 그와같은 교단통제의 중요한 승직(僧職)을 스님이 아닌 일반 속인으로 임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의 앞부분인 안부(鞍部)는 실은 그의 이름이 아니고 그 뒤에 붙은 덕적(德積)이 그 승명(僧名)일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본서기(日本書紀 )보다도 훨씬 후대의 일본 사서(史書)에는 덕적이 고구려의 스님으로 보이고 있다. 즉 승강보임초출(僧綱補任抄出 上 推古32년 조)에는 승도 안부덕적은 고구려 사람(高麗國人也)이라고 있다.

 그리고 본조고승전(本朝高僧傳)의 백제산문 관륵전(百濟沙門 觀勒傳)에는 관륵을 승정으로 임명하고 고구려 덕적을 승도로 삼았다.<勒任僧正 高麗 德積爲僧都>라고 있다.

 물론 이 때의 고려는 고구려를 지칭한 것이므로, 이상의 두 글을 통해서 덕적이 고구려의 스님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덕적이 어떤 스님이었던지는 전혀 알 수가 없으나 일본 최초의 교단통제 기구에 있어서 초대 승도(僧都)라는 중요한 위치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그의 학덕을 짐작할 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일본 불교계에 있어서 처음으로 교단통제의 기구를 설치하면서 백제의 관륵스님을 승정으로 삼고, 고구려의 덕적스님을 승도로 삼았다는 것에서 당시 일본불교의 사정을 엿볼 수가 있다.

 일본 불교는 백제에서 전한 것으로 시작되었으므로 초기의 일본 불교는 백제의 불교가 그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훌륭한 고구려의 고승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게 되면서 고구려 불교가 일본에 차지하는 비중도 백제불교에 못지않을 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백제의 스님을 승정으로 삼는다면 고구려의 스님을 승도로 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덕적이 승도가 된 그 이듬해(625)에 일본으로 건너가 제 2 대의 승정이 되었던 혜관( 慧灌)법사 역시 고구려 스님이었다.

 고구려의 불교가 그만큼 백제 불교와 함께 일본에 끼쳤던 바가 컸던 그 당시에 있어서, 교단 초창기의 첫 승도(僧都)가 고구려 스님이었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한 고구려의 덕적스님이 일본불교의 최초 교단기구에 있어서 제 2 인자의 자리인 승도에 임명되었으면서도 그 국적마저 불분명할 만큼 전기(傳記)가 전혀 모호하게 된 까닭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일본세기(日本世記) 저자 도현(道顕)

 고구려에서 일찌기 출가한 도현(道顕)법사는 언제인지는 모르나 일본으로 건너 갔다. 일본 왕명으로 대안사(大安寺)에 머물면서 그는 불법을 대중들에게 가르쳤다.

 불법을 가르치는 틈틈이 도현스님은 일본의 역사책인 일본세기(日本書紀)를 지엇다. 그 책이 현재 남아 전하지 않기 때문에 체제와 내용을 알 수가 없우며, 약간권(若干券)이라고 있어서 그 권 수 마저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오늘날 일본 고대사의 정사(正史)로 전해져 있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편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의 하나가 되었던 고서(古書)로만 알려져 있을 따름이다.

 일본에 건너간 때도 모르고 일본세기를 지은 연대도 알 수가 없어서 도현스님이 활동한 시기를 자세히 알기가 어렵다. 단지 일본서기의 천지 원년(天智元年,662) 4월조에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어서 그의 활동연대를 대략 짐작할 수가 있을 뿐이다.

   그 해(662년은 고구려의 寶藏王21년임) 4월에 쥐가 말의 꼬리(馬尾)에 새끼를 낳은 괴변이 있었는데 도현스님이 예언해서 말하기를, 『북국(北國)사람이 남국(南國)에 부속(附屬)될 징조이다. 즉 고구려가 패망하여 일본에 소속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12지(十二支)에서 쥐(孑)가 북방이고, 말(牛)이 남방이므로, 쥐가 말 꼬리에서 새끼를 낳은 것은 북방 사람이 남쪽 나라에 부속될 징조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서북방에 있는 고구려는 쥐(孑方)이고, 동남쪽에 있는 일본은 말(牛方)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 기록에서는 도현의 말대로 과연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本朝高僧傳 권 72>

 일본서기 등에는, 그 해(662) 3 월에 당나라와 신라가 고구려를 침으로 고구려에서는 일본에 구원을 청하였고, 그래서 일본 조정에서는 고구려에 군장(軍將)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도왔다고 한다. 그렇게 일본이 고구려를 도왔지마는 결국은 고구려는 망하고 일본쪽으로 부속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것을 도현스님이 쥐가 말 꼬리에 새끼낳은 일로 미루어 알아 맞추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해( 寶藏王 21년)에 고구려는 패망하지도 않았고 또 일본에 소속되어 가지도 않았다.

 훨씬 앞서부터 삼국(고구려 · 백제 · 신라)전쟁은 치열하였지마는 66년에 신라가 당나라 군사와 함께 백제를 멸망 시킨 다음 곧 라·당(羅唐)연합군은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보장왕 20년(661)4월에 당나라는 바닷길과 육로의 두 길로 대군을 나누어 고구려를 쳐들어 왔으며, 그 해 7월에는 소정방(蘇定方)이 이끈 당군(唐軍)이 평양성(고구려 서울)을 포위하였다.

 그 이듬해(21)년 정월에 신라에서는 김유신(金庾信)등을 고구려로 보내어 당군을 도우게 하였다. 그때 고구려의 군사는 사수(蛇水)에서 당군을 크게 깨트렸고, 그래서 소정방은 평양성의 포위를 풀고 후퇴해 갔다.

 이로써 고구려는 일단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보장왕 25년에 고구려의 실권자인 개소문(蓋蘇文)이 죽고 그 아들들이 대를 잇게 되면서부터 형제간의 불화로 고구려는 혼란해졌고 그 틈을 타서 다시 침공한 라·당 연합군에 의하여 보장왕은 그 27년(668)에 결국 나라를 잃고 말았던 것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맞든 안 맞든 간에 고구려의 도현법사가 일본에가서 활동한 시기가 그 무렵이었다는 사실만은 알 수가 있다. 아마 도현도 보장왕 초에 개소문이 도교(道敎)를 편파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불교를 핍박하였을 때, 보덕(普德)화상이 남쪽으로 옮겨 간 경우처럼 일본으로 망명한 스님의 사례중 하나가 아닌가 본다.

 일본에 건너간 때와 세상을 떠난 해를 전혀 알 수가 없고 일본에서의 활동도 자세하지가 않으나, 대안사(大安寺)에 머물면서 교수(敎授)하는 틈틈이 일본세기(日本世記)를 찬술하였다는 본조고승전(本朝高僧傳)의 기록대로라면, 도현스님은 일본에 가서 고구려 불교를 전하고 일본사람들을 일깨우는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던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면서 그는 틈을 내어 일본의 역사서(書)인 일본세기를 지었던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그 밖에 일본 사서(史書)에 보이는 고구려 스님으로는 복가(福嘉)가 있다.. 복가스님에 대한 다른 기록은 전혀 볼 수가 없고, 오직 지통(持統) 7년 (693) 6월에 일본 국왕이 고구려 스님 복가로 하여금 환속(還俗)케 하였다. (日本世記 권30, 持統天皇 7년 6월 條)는 사실만이 보이고 있다.

 원형석서(元亨釋書 권20)에서는,『고구려 복가르 그 재주로써 환속케 아였다. <高麗福嘉 以才詔反俗>』라고 하였는데, 이에 의한다면 일본 국왕이 복가스님을 환속시킨 이유가 그 재주(以才)임을 알 수가 잇다.才)

 그 재주<才>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으나 환속하므로써 더 기능을 발휘하여 일본 사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던지도 모를 일이다.

 고구려의 불교인이 일본에 가서 활동한 공적이 매우 컸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고구려 불교를 대단히 훌륭하게 보았고, 아울러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우수한 스님들을 고구려에 보내어 고구려의 불교를 공부하게 하였던 것같이 보인다. 고구려 유학의 대표적인 일본 스님으로는 도등(道登)과 행선(行善)을 들 수가 있다.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서 고구려의 불교를 고구려 스님 못지 않게 자기나라 안에 전파하였다. 그 자세한 전기는 고구려스님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 생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