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귀한 법은 인내하는 자, 용감한 자만이 얻을 수 있다

특집 | 가행정진

2006-11-06     관리자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 너무도 감사하며 행복한 마음으로 수행에 참가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위빠사나 수행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물질현상과 정신현상을 사실대로 바르게 알게 해주고 지혜와 통찰로 이끌어주는 수행법임을 확신해왔기 때문이다. 이번에 마련된 ‘집중수행’은 현재의 내 삶을 실제적으로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 될 거라는 믿음과 기대로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수행 첫날부터 나의 간절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음은 온통 답답함과 뜨거움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아무리 수행에 집중하고자 해도 온몸은 무겁고 뻣뻣하며, 마음은 고통스럽고, 알아차림 할 때마다 망상과 혼침으로 인해 스스로 성냄이 일었다.

또한 성냄이 커지니 슬픔이 일고, 슬픔이 커지니 잇따라 좌절감이 찾아왔다. 무엇보다도, 알아차림 하고자 하는 마음이 활발하지 않음을 스스로 느끼게 되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수행자의 단 한 가지 의무는 ‘알아차림’뿐

나는 이런 마음을 스님께 말씀드렸다. 스님께서는 물고기가 물에서 벗어나면 펄떡펄떡 뛰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감각적 느낌에서 멀어져 온 현재의 이 마음을 알아차림 하면 된다고 위로해 주셨다. 오로지 수행자의 단 한 가지 의무는 알아차림뿐이라고!

그러나 본격적인 고통은 그 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다리 통증으로 인해 한 시간 삼십 분 동안의 좌선 시간에 제대로 앉아 있을 수 없는 것이 괴로웠다.

그것을 참고 견디고 통증을 확인하고 앎으로써(쑤시고 저리고 뜨거우며 항상하지 않음) 극복하고 나니, 이번에는 좌선할 때 배의 부름과 꺼짐의 주시에서 조준과 힘*을 조절하지 못해 배에 상처가 난 것처럼 따갑고 아프고 쓰리더니 아예 배가 부풀어 오르면서 움직이지도 않는 것이었다.

나는 “혹시 위장이 파열되는 게 아닐까? 수행하다가 119차에 실려 응급실로 가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며 또다시 혼자만의 큰 두려움에 빠졌다.
나의 유일한 의지처인 스님께 다시 이런 괴로움을 보고 드리니, 스님은 긴장을 풀고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수행을 계속하라고 조언해주셨다. 정말로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배의 부름과 꺼짐을 주시하여 4대 요소인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알아차림 하는 것은, 내게 있어 하나의 어두운 동굴이며 거대한 미로였다. 뻣뻣하다 싶으면 단단한 것 같기도 하고, 좌선시간 내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 심한 저림으로 어쩔 줄 몰라 하기도 했다.

수행의 진전과정

차차 배의 부름과 꺼짐을 알아차림 하니 저절로 앎이 생겼고, 또 알고 나니 얻는 기쁨과 즐거움도 생겼다. 그런데 그 기쁨 또한 잠깐이었다. 배의 부름과 꺼짐, 그리고 통증의 주시가 이제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하여 계속 편안하게 관찰하면서 밀어붙이면 되겠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자리에 앉기만 하면 졸음이 쏟아졌고 이를 악물고 혼침에서 벗어나면 게으름과 지루함이 쉼 없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수행을 하면 할수록 마음의 고요함과 청정함은 찾아볼 수 없었고, 나는 애초의 생각과는 다르게 벌어지는 이 상황들 앞에서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스님께 호소했다.

“스님! 저는 좌선과 경행하는 매순간마다 적(나의 장애)을 무찌르지 않으면 안 되는 용사가 되어, 최고의 극한 상황에서 있는 힘을 다해 싸우는 마음입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수행이 행복하다고 하는데, 저는 수행이 너무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러자 스님은 힘주어 말씀하셨다. “최전방에서 적과 싸우는 용사보다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성냄, 지루함, 게으름, 마음의 방황들을 이겨내는 용사가 훨씬 고귀하다.

힘들 때 더욱 인내하고 알아차림 하는 것이 수행자의 의무이며, 고귀한 법은 인내하는 자, 용감한 자만이 얻을 수 있고 이 때 비로소 위빠사나의 지혜가 따라온다.”

“수행은 어렵다가 쉬워지는 순간이 생기고 다시 어려워짐을 반복하면서 점점 진전된다. 필요 없는 생각은 단 한 생각도 하지 말라. 성인이든 범부든 주시하는 대상은 모두 같으나 대상에서 얻는 앎이 다르니, 이는 지루해 하고 지겨워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스님에게 일침을 당한 후에, 나는 힘을 내어 하루하루를 버티고 몸과 마음을 포기하면서 42일을 지냈다. 지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수행 기간 중에 그저 행복하기만 했을 때는 단 3일 정도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온갖 장애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이 수행에 참여한 동기가 되어준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나름의 답, 귀중하고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수행을 시작한 지 9일째 되는 날, 나는 처음으로 감각적 행복과 사회적 관계를 포기하게 됨으로써 얻는 평온함과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이처럼 위빠사나 수행은 내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한 노력이며, 나 자신에 대한 실제적인 연구 과정이었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가르침

나는 좋은 것을 대하면 좋은 느낌이 일어나고 싫은 것을 대하면 성냄의 마음이 되어, 좋은 것과 싫은 것에 자꾸 집착하는 내 마음을 보았다.

더 나아가 볼 때, 들을 때, 맛볼 때, 냄새 맡을 때, 생각하거나 상상할 때 바로 그 순간 알아차림으로써 마음의 흐름이 끊어져 탐심, 성냄, 어리석음이 따라오지 않고 고통이 소멸되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나의 사견으로 감히 진리의 법에 대해 논하는 것이 부끄럽기에, 나는 대념처경에서 밝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가르침으로써 이번 수행을 통해 구한 나의 답을 대신하고 싶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라고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닦음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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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진|정신세계원에서 교육사업과 광고홍보팀을 담당하고 있으며, 현재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고 있다. 이 글은 지난 2006년 4월 15일부터 5월 26일까지 42일간의 집중수행(우 빤디따 사야도 지도, 경기도 남양주 봉인사) 후 수행자 대표로 발표한 수행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