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법단] 메아리 없는 골짜기

2007-09-02     관리자

나는 나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나

어떤 스님이 보조(普照 1158~1210)스님께 오리무중에서 소를 잃었습니다. 어떻게 소를 찾으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리무중에서 소를 잃었다는 af은 말 그대로 해석하면 앞뒤를 분간할 수 없도록 안개가 꽉 낀 그런 상황속에서 소를 잃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일상 생활 가운데서 참으로 가야할 길을 잃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선가에서 말하는 소는 자기 본성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소를 잃었다는 말은 번잡한 일상생활속에서 본성을 잊고 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살고 있으면서 나의 주인 노릇을 하고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을 놓아도 이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나고 옆에서 떠드는 소리가 내 생각 가운데 미쳐오는가 하면 엉뚱하게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생각을 가다듬고 딴 생각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어도 어느 틈에 또 이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납니다. 마치 길가에 있는 빈 집처럼 지나가던 사람이 아무나 들어와서 쉬었다 가고 놀다가고 어질러 놓고 갑니다. 나라고 하는이 주인공은 어디로 가버리고 이 생각 저 생각 객적은 생각들이 왔다 갔다 하여 마치 임자없는 길가 집같이 아무나 들어와서 앉아보는 그런 것이 됩니다.
우리들은 자칫하면 끊임없이 망념이 일어나서 생각을 말끔히 쉬자 마음 먹어도 쉬어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생각을 다 놓아버리면 고뇌가 없어지고, 허공에 구름이 가시면 푸른 하늘이 나타나듯이 번뇌망상을 쉬면 내 자성의 성품이 명로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알어도 그것이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

소를 찾는다는 말은 소를 먹이던 사람이 소를 놓쳐 그 소가 어디에 있는 지 조차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소를 붙잡아 길들여서 내가 뜻하는 대로 풀도 먹이고, 타고 가기도 할텐데 소가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소를 길들인다 하는 것은 즉, 내 마음의 주인이 내가 되고 내 생품의 주재자가 바로 나 자신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성품을 완전히 회복하시어 청정본분에 머무시는 분이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내 생품이 원래로 불성인데 그 불성의 주인공이 그 본성을 회복하고, 자유로이 활용한다면 이 사람은 큰일을 다해 마친 사람입니다. 소를 찾는다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내 주인이 된다는 말입니다. 내 성품 즉, 불성의 주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갖가지 생각에 끄달려 다니다가 원래로 있는 본성자리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메아리 없는 골짜리

오리무중에서 소를 잃었습니다. 이 말을 다시 정리해 보면 생활하는 가운데 온갖 번뇌 망상과 여러 가지 일들에 시달리다 보니 내 본성을 잃었습니다. 내 본성품은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을 찾으려 해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조차 모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물음에 보조스님은 “메아리 없는 골짜기를 찾아가라”하셨습니다. 이 메아리 없는 골짜기는 명백하게 불성이 있는 곳을 말한 것입니다. 소가 있는 곳을 말한 것이고, 무한보주가 있는 곳을 말한 것이고, 부처님을 만나는 곳을 말한 것이고, 참된 나의 본면목을 보게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어떤곳이 메아리없는 골짜기 인가. 사람들이 생각으로 아무리 꾸며대어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산골자기 저 산골짜기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질러보고 메아리가 없으면 그 건가 보다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구하는 것이 있고 상대가 있고 대립이 있고 벽이 있고 대할 것이 있고 의지한곳이 있는 한, 어디를 가든 메아리는 있습니다. 메아리 없는 곳은 바로 우리들 자신 가운데서 상대가 없고 대할 것이 없고 의지한 바 없고 얻을 것이 없는데서 찾아야 합니다.
메아리없는 골짜기의 입구를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일심(一心)입니다. 이 일심은 엄밀하게 말하면 처음에는 메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심으로 밀고 가면 마침내 메아리 없는 골짜기에 이를 수 있습니다. 메아리 없는 골짜기야말고 불보살님의 복적지이고 부처님의 무량광명 부처님의 무량공덕이 있는 곳이고 참으로 내 생명이 머물러 있는 곳입니다. 이 곳을 찾는 방법으로서 일심을 권합니다.
불교공부하는 사람들이 이 메아리 없는 골짜기로 가라는 공안(公案)으로 참선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메아리 없는 골짜기를 단번에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번에 보는 그릇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돌고 돌아서 라도 일심이 필경으로 가는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의 터가 메아리 없는 골짜기입니다. 얻고 잃는 것이 아니거, 현상이 없고 대립이 없고 주고 받는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어라고 형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일상생활 가운데서 이 일심의 법을 참으로 알고 행한다면 무량창조하는 신묘한 기술을 얻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일심의 법을 모르고 다른 묘한 방법을 찾는 것은 모두가 꾀를 부리는 것이 됩니다. 샘을 파서 물을 먹을 생각을 아니하고 물이 어디서 흘러 나오는데가 없나 하고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일심은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내는 것이며 그곳이야 말로 메아리 없는 공짜기를 보게 되는 곳입니다. 염불을 하거나 마하반야바라밀 수행을 하거나 어떤 수행을 하든 이 일심법문이 메아리없는 골짜기에 이르게 하고 정말로 오리무중에서 헤매던 사람으로 하여금 명확하게 자기 소를 붙잡아서 소를타고 콧노래를 불며 마음대로 부리는 그런 상태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일심이라는 실천이 없으면 결실을 가져오기 어렵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더라도 일심으로 할 것이요, 천수다라니를 외우더라도 일심으로 하여야 할 것이요, 염불을 하더라도 일심으로 하여야 합니다.
이 일심 불란법만이 마하반야바라밀의 무한공덕을 끌어내고, 일심만이 메아리없는 골짜기에 이르게 해서 내성품의 소를 잡아타고 동서남북으로 자유롭게 소요자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단 5분, 10분간이라도 전심전력을 기우려 일심으로 해서 진지하게 파고드는 사람이 소를 만다고 감로수를 만납니다. 벼락이 떨어지더라도 꼼짝 아니하는 철저한 신념을 갖고 돌진하지 아니하고는 힘을 얻지 못합니다. 일심으로 파고 들어가는 정진력 실천력 용맹력이 없으면 아니됩니다.
대립관계를 끊고 나가려해도 일심 하나로 나갈 것이요, 무량복덕의 문을 열고자 하더라도 오직 일심의 열쇠로 열 것이요, 무한의 청풍 대자재를 얻으려해도 이 일심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불을 지향하여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 만약일심이 빠진다면 결코 진리의 소, 자성의 소는 찾지 못할 것이며, 부처님의 무량공덕을 오늘의 현실생활 가운데서 실현하는 대성취는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일심일 뿐 딴 방법이 없다.

불자들은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정근을 하되 일심으로 진지하게 해야 합니다. 용감하게 저돌적으로 온 몸을 들이대는 그런 용맹스런정진력 없이는 결코 메아리 없는 골짜기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며, 지혜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의 목소리를 듣는 길도 이 메아리 없는 골짜기에 이르러서 얻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궁극적 완전에 이르자면 이 일심이라는 방법을 재쳐 놓고는 딴 방법이 없습니다.
“나는 성인 가운데 다시 성인. 일체 세간의 아버지. 이 삼계는 모두가 나의 소유. 그 가운데 중생은 모두가 나의 자식이니 나만이 능히 이를 구한다.”
이 법구는「법화경」의 말씀입니다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나’는 형제들이 잘 아시는 “나를 보는 자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 나를 본다.”하신 말씀의 ‘나’입니다. 법이야말로 부처님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관념속의 부처님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법이십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메아리없는 골짜기에 머무신다는 것을 알아서 일심을 통해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무한의 위신력을 쓰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가지가지 한계의 벽에 둘려싸여 있지만 일심의 법을 통해서 온갖한계의 벽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에게 온갖 장애가 있는 것은 우리 마음 가운데 제각기 상대와 대립과 장벽을 두고 있기 때문인 것을 알아서 일상수행을 통해서 마음의 구름을 쓸어버리고, 장벽을 허물어 메아리 가 없는 세계로부터 자재한 원만공덕을 끌어오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이 법을 실천해야 합니다. 오직 몸으로 행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의 믿음을 행의 생활로 끊임없이 열어 갈 때 부처님의 위덕 가운데서 일체를 성취하는 참불자로 성장 하는 것입니다.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