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야소감(除夜所感)

보리수 그늘

2007-09-01     관리자

 어둠이 무겁게 뒤덮인 겨울거리에 바람은 몹시 사납게 칼부림을 하고 있다.

 앙상한 몰골의 나목(裸木) , 공사장에서 환하게 타오르는 장작불의 둔탁한 소리, 시내버스 종점에서 시장을 지나 언덕배기의 집까지 15분, 그 시간은 왜 그렇게 항상 길고 아득하게 여겨지는지. 을씨년 스럽고 허전한, 그리고 꽁꽁 얼어붙은 비탈길을 오를 때이면 나는 감기라도 걸린 듯 온몸은 찌뿌드드하고 멍해진다.

 따뜻한 밥과 옷과 잠을 벌기 위해서 일상의 강물에 던져둔 그물을 거두고서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귤이나 사과라도 한 봉지 사갈까, 아니면 만두? 아니 내일, 그래, 내일 사자.

 바람 때문에 성냥불 켜기가 어렵다. 성냥개비를 여러 개 버리고 나서 겨우 담배에 불을 붙인다. 길게 내 뿜은 담배연기가 멀리 재빠르게 달아난다. 허공 깊숙히 희미한 겨울 달이 박혀 있다. 나는 차가운 손을 부비다가 바지 주머니 속에 찔러 넣은 채 그 허공 하늘, 거대하고 심오한 창(窓)을 바라본다. 그 속으로 내 가벼운 몸이 빨려가는 듯 싶다. 정신도 덩달아서 출렁거린다.

 이때 문득 어지럽고 눈부신 성에 꽃이 생각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오늘 아침, 밤새 눈이라도 듬뿍 내렸을까 싶어 두꺼운 마직 커튼을 젖혔을 때, 눈 대신 유리창에 화려하고 창백한 성에 꽃이 푸석푸석한 겨울 햇빛을 받으며 피어 있었다. 나는 곧 사라질 그 꽃에 눈길을 주면서 시간의 계단을 거슬러 밟으며 그립고 쓸쓸한 추억의 숲속으로 가지 않았던가.

 지난 시절, 그 추억의 숲속에는 사랑과 자유를 위한 헌신과 삶에 대한 순수한 열정, 그리고 눈부신 이상이 있었다. 물론 좌절과 방황과 고독의 우울함이 잿빛으로 어둠에 눈덮여 있기도 했으나 그중 많은 것들은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으리라.

 아뭏든 지난 시간을 생각한다는 것은 과거를 그대로 재생하거나 복사함이 아니라 바로 현재의 반영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거도 현재시제에 속한다고나 할까.

  저기 보안등 아래에 있는 방범초소에서 왼쪽 길로 꺽어 들면, 가끔 물기 젖은 기침소리가 들리고 처마끝에 키가 제각기 다른 고드름이 열려 있는 나의 집이 말없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쯤 된장국이나 콩나물국을 끓이면서 내 작은 그물을 기다리고 있을 집.

 방범대원은 순찰중인가 보다. 초소에는 백열전구의 불빛만이 갇혀 있을 뿐이다. 길이 무척 미끄럽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걷는다고 해도 몇 번인가 넘어지겠지.

 넘어질 때 나의 표정은 어떨까. 아마 웃거나 찡그리겠지. 어쩌면 오래된 가죽처럼 뻣뻣한 무표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정말 곤란하다. 무표정은 두려우며 무섭다. 무표정 할 때는 차라리 「정말 재수없군」하고 한 마디  투덜거리는게 훨씬 낫다.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가끔 찾아가는 다방 「여백(餘白)」의 길모퉁이에서 쥐포, 군밤을 늘어놓고 파는 아낙네의 얼굴도 무표정이었다. 처녀시절 그녀에게도 달콤한 꿈과 가슴 설레는 희망이 있었으련만 지금은 힘겨운 생활의 칙칙한 그늘만이 얼굴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그녀의 주체가 산다기 보다 생활이 그녀를 부식시키고 있는 것 이다.

 나 역시 그렇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보다 더욱 비참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급기야 자신의 참된 존재성을 내팽개치고 사는 행복한(?) 속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나 강직하고 고아(高雅)한 선비는 못되더라도 최소한 속물은 벗어나야 하지 않는가.

 바람은 여전히 매몰차게 불어댄다. 이젠 거의 다와간다. 방 안에는 생강차 물이 뽀얀 수증기를 뿜어올리면서 끓을 것이며 가족은 「추운데 고생 많았다. 어서 오라」고 다감하게 말을 할 것이다.

 오늘 밤 나는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제야(除夜)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새해를 맞게 될 것이다.

 나는 마음 속 깊이 기원하리라.
 새해에는 어지러운 다툼은 멀리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진실로서 화합할 것이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만한 대우가 주어지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손길이 항상 닿을 것이며,

 보다 겸손하고 보다 이해하고 보다 자비롭고 보다 사랑하며, 한 사람의 기쁨일지라도 축복받고 한 사람의 눈물일지라도 위로받고 바른길로 걷는 사람이 억울하게 핍박받는 일이 없을 것이며, 우리 모두가 스스로 존귀할 수 있도록 노력할지니······.

 아하, 된장찌개 냄새가 구수하다. 어느덧 집 앞이다.

 집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나는 파란색 크레용으로 서툴고 큼지막하게「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써붙여 놓은 글을 읽는다.

 나는 「모두」라는 말을 입속에 우물거리면서 웃는다. 새벽에 함박눈이 내렸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