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참된 자식사랑인가?

부모님을 위한 청소년 상담

2007-08-31     관리자
정희의 죽음

설날 이른 아침 다섯 시 경, 전화 벨이 울렸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수화기를 들었더니 가까운 친척 아주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가슴을 철렁하게 하였다. 외딸 정희가 어제 밤에, 그러니까 설 전날밤에 죽었다는 것이다.

왜? 무슨 일로 죽었습니까?
교통사고랍니다. 어제 밤 늦게 친구들하고 승용차를 타고 나가 놀다가 12시 경 친구들을 집에다 실어다 주고 혼자 돌아오다 사고가 났답니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
영동성모병원 영안실에 있어요.
가까운 친척 아이고 얼마 전까지 건강한 모습으로 학교에 다니는 걸 알고 있던 터라. 설날 아침임에도 불고하고 집안 가족들과 병원으로 달려갔다. 눈이 내려서 도로가 좋지 않은 걸 보고, 집사람과 나는 괜히 젊은 아이들한테 차를 맡겨서 죽게 만들었다 고 친척 아주머니의 과소비 풍조를 원망하는 한편, 차 조심해야지 하면서 조심 조심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에 도착해 보니, 아직 사진도 준비를 못한 사태에서 정희 큰 오빠 혼자서 눈이 빨개가지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간단히 분향을 하고 병원 가까이 있는 친척 집으로 찾아갔다.
부모님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다. 반포에 있는 어느 아파트10층 집으로 올라가 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친척 아주머니가 느닷없이 집사람의 목을 끌어안고 내가 죽였어, 정희는 내가 죽였어 라면서 넋나간 듯 소리치며 울었다. 차를 내 준 죄책 때문이려니 하고 한참 위로를 하고 있는데, 친척 아주머니는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이었다.
사정을 알고 보니까, 교통사고가 아니고 아이가 10층 난간에서 뛰어내렸다는 것이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신문에서나 전해 듣던 얘기가 내 주변에서 하나의 엄연한 현실로 벌어지고 있지 아니한가.
왜 뛰어내렸습니까?
글쎄 별 일도 없었는데 밤 늦게까지 나랑 오빠랑 셋이서 한강 변을 드라이브하고 돌아와서 옷 갈아 입으면서 속 끓이는 말을 하길래,
얼굴 보기가 싫으니까 내 앞에서 보이지 말아라 라고 홧김에 한 마디 했더니 고함을 꽤 지르면서 문을 박차고 나가지 뭐야. 오빠가 달려나가며 발을 잡았지만 이미 늦었어.

아주머니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이 사건이 한 순간의 돌발사가 결코 아니다라는 것을 생각하였다.
정희 가슴 속에 잠재해 있던 오랜 열등의식이 그 말 한 마디로 폭발해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정의는 공부 때문에, 오빠는 서울대 공대에 다니는데 자기는 겨우2류 신학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열등의식 때문에 항상 죽어 지냈고, 명절에 친척들이 모일 때도 담담하게 어울이지를 못하고 자기 방에서 홀로 지내고 하던 것이 생각났다. 사건이 난 뒤 일기장을 보니까 이렇게 씌여 있더란다.
나는 혼자다. 내 친구는 화니 (정희가 키우던 조그마한 서양개 이름)뿐이다.

그 아이가 얼마나 외로왔을까.
얼마나 외롭고 괴로웠으면 으였한 부모 형제 옆에 다 있는데 말 못하는 미물하고만 놀았을까.

생각하면서 나는ㅇ 눈물을 감추지 못하였다.

부모들은 무얼 하고 지내는 걸까? 무엇이 얼마나 바빠서, 자기네 외딸이 속으로 깊이 병들어 가는 데도 눈치채지 못하는 걸까? 옷이나 해 입히고 용돈이나 주는 것으로 부모들은 할 일 다 한다고 생가하는 걸까? 그러면서 자식들더러 공부 잘 하라는 성화만 부리고, 속 썩히는 짓 한다고 화를 내고 자기들 기분대로 될 소리 안될 소리 다 하는 걸까? 나는 뭘 하였는가? 가까운 친척 어른으로서 정희한테 평소 따뜻한 미소 한번 나눈 적이 있었던가? 내가 법사인가? 붓다의 자비를 설하는 법사인가?

벽제 화장터 영결식에서, 정희 앞에 향불 하나 사르고 나는 합장하며 조용히 축원하였다.
정희야 이 무거운 속세의 인연 훌훌 다 털어 버리고 생명 본래 자리로 돌아가거라. 갔다가 선한 인연따라 다시 오너라. 이 무정한 사람들이 아닌, 따뜻한 정이 흐르는 그런 인간들 사이로 오너라.

참된 사랑은 중생에(衆生愛)

붓다 석가모니께서 성도하신 후 십여년간 각지를 유행하며 전도하시다가 인연이 닿아 고향 가빌라성으로 돌아오셨다. 늙은 아버지 슛도오다나 왕과 옛 아내 야소다라 비(妃)와 일가 친척과 동족들이 그를 맞이하여 크게 환영하고 법을 청하여 들었다. 어느 날 야소다라 비는 어린 아들 라훌라(Rahula)를 아버님께로 보냈다. 라훌라는 처음 보는 아버님에게 절을 올리고 말하였다.
아버님 저에게 물려줄 재산을 주십시오.

붓다께서는 이 말에 아무 대답도 않고 라훌라를 데리고 니글다 정사(情舍)로 돌아와 제자 샤아리푸트라 (舍利佛)로 불러 분부하였다.
이 아이를 삭발하여 출가시켜라
우리는 자식들을 사랑한다. 아니,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사랑하고 아끼지 때문에, 공부 더 잘 하기를 바라고,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식 가진 부모들에게는 이 자식사랑이 가장 큰 면죄부가 된다. 자식 사랑하기 때문에,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아이를 공부에 붙잡아 두고도 별 고통을 느끼지 않고 성적 좀 떨어졌다고 야단치고 구박하고 심한 말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겨우 이 자식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다.
굳이 사랑 이라고 주장하려면 이기적 사랑 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나는 아무리 해도 남위 자식 들을 내 자식만큼 사랑할 수 없다.
내가 가르치는 아니들, 친척집 아이들, 옆집의 아이들을 내 아이들만큼 따뜻한 마음으로 대할 수 없다. 그래서 나의 자식사랑은 이기적 사랑임을 면치 못한다.

사랑은 고결한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 그러나 이기적 사랑은 고결하지 못한 번뇌이기 때문에, 그 대상들에게 오히려 부담이 되고 고통이 되고 반발을 자아낸다.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사랑 속에 도리 여 고독하게 하고 뛰쳐나가게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제 우리는 참된 사랑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더 늦기 전에 자식사랑을 고결한 사랑으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참된 사랑으로 무엇인가?
곧 중생애(衆生愛)이다. 중생에 대한 사랑, 중생으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내 자식을 보되 이 세상에 태어나 고뇌하며 살아가는 한 중생으로 보고, 아내를 보되 나를 만나 이런 저런 사연으로 괴로워하며 슬퍼하며 살아가려고 애쓰는 한 중생으로 보고, 남편을 보되 가정을 부지하기 위하여 이런 저런 고생 다 참아가며 살아보려고 애쓰는 한 중생으로 보는 것, 이것이 중생애 이다 . 이 중생애 때문에 붓다 석가모니께서는 라훌라의 머리를 깎게 하시는 것이다. 많은 재산 좋은 학벌 권세 있는 자리가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 머리를 깎게 하자는 말도 아니다. 이런 세속적인 재산을 물려주기 위하여 물불 가리지 아니하는 이기적 사랑에 집착할 때, 성공도 하기 전에 귀중한 우리 아이들을 파탄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진정한 재산은 건강한 몸과 쾌활한 성품, 따뜻한 인간관계의 능력이라는 진실을 깨닫자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많은 자식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이제 우리는 이런 따뜻한 중생애의 눈빛으로 우리 아이들을 보고, 또 친척과 이웃의 아이들을 바라보자. 佛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