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덕전등록

선전해설(禪典解說)

2007-08-28     관리자
 

  선(禪)에는 무라고 하면 비무(非無)라고 하고, 즉심시불이라고 하면 비심비불이라고 하여, 무한정으로 부정하여 학인의 편견망집을 소탕하려고 하는 삼론적(三論的) 수법(手法)이 많으나, 이 본증묘수(本證妙修)도 실은 그것이다. 「수(修)」를 부정하는 것 같은 수법으로서 「수(修)」와「증(證)」을 대립적으로 보려고 하는 학인의 편견 망집의 근절을 도모하려는 것으로서 결코 「수(修)」의 부정은 아니다. 그래서 이 본증묘수로 허심(虛心)에 철저하는 것이 불오염(不汚染)이다.

  수(修)가 없이 증(證)에 이르므로, 좌선이야말로 선의 핵심이다. 다시 말하면 본증(本證)의 전체인 수(修, 불로서 그것)가 번뇌에 오염되지 않기 위하여, 고래로부터 불조들은 수(修)를 엄하게 하고 있었다는 것이 최후 일구의 취지다. 불오염은 본증묘수에의 허심한 투입(投入)이다.


   마전문답(磨磚門答)

  개원(開元)년간 경 마조도일(馬祖道一)이라는 승이 전법원에 있어서 좌선 전수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좌선하는 모습은 손님이 와도 결코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을 전해들은 남악은 마조가 대기(大器)임을 알고, 하루는 전법원에 갔다. 마조는 소문과 같이 남악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남악은 마조에게 질문했다.

 『그대는 열심히 좌선하고 있는데 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불이 되려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마조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남악은 밖에 나가 깨진 기왓장 하나를 주어다가 마조가 묵연히 좌선하고 있는 앞에 앉아 기왓장을 들에 대고 갈기 시작했다.

 『스님 무엇하고 계십니까?』

 『갈아서 거울 만들려고 한다.』

 『기왓장을 아무리 갈아도 거울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럴까, 그런데 인간은 어디까지 나 인간이다. 아무리 좌선해도 부처가 될 수는 없으리라.』

  남악의 의외의 말에 마조는 놀랐다. 선승은, 부처가 되기 위하여 좌선하고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세존도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90일 간의 좌선에 의하여 깨쳤고, 불타<정등각을 이룬 대성자(大成者)>가 되었다고 하는데, 왜 같은 좌선을 하여 불<불타>이 되려고 하는 마조가 잘못일까. 마조는 의심이 나서 절망이 빠졌다.

 『좌선하여 불이 되지 못 한다 하니 대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마조가 괴로운 어조로 하소연했다.

 『모르는가? 가령 사람이 우차(牛車)를 탄 것과 같다. 수레가 움직이지 않을 때, 사람은 수레를 채찍질하는 것이 좋을까. 그렇지 않으면, 수레를 끄는 소에게 매질할 것인가. 어떤가.』

  남악의 말은 너무도 평범하다. 어린애도 알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조를 어린애 취급한 말이다. 그러나 마조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무언가 추구하는 것 같았다. 잠깐 있다가 남악이 말했다.

 『그대는 좌선을 배우려고 하는가. 좌불(坐佛)을 배우려고 하는가. 만약 좌선을 배우려고 한다면, 선이 「좌(坐)」라든가 「와(臥)」라든가 하는 일정의 형(型)에 빠지지 않음을 명심할 것이고, 또 좌불을 배우려면 불도 일정불변의 형상을 가지지 않음에 주의하라. 「공(空)」인 일체의 제법에 형상이 있을 수 없으니 이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그대가, 만약 「좌(坐)」하여 불이 되는 것을 배우려고 하면 그대는 거꾸로 불을 멀리하고 조사스님도 멀리하고 선에 좌행(坐行)한다는 일정의 형상이 있는 것 같이 생각을 가진다면, 도리어 선의 「제일의」는 멀리 도망친다.』

  마조는 이 말에 남악의 「의(意)」가 잇는 바를 명확히 요해하고, 좌선을 포함한 「참선학도」의 참다움이 있는 것을 마치 맛있는 우유<美味)인 제호(醍醐)를 마시는 것 같은 한없는 법열(法悅)을 느껴 오득했다.


   수단으로서의 좌선

  남악과 마조의 문답 응수도, 선가에서 고래로부터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말의 안목은 「타거시우타시(打車是牛打是)」라고 한 남악의 일구에 있다.

  남악의 이 말은 「대장엄론경(大莊嚴論經)」마명(馬鳴)15권에 전한다. 그는 어떤 비구니가 고행하고 있는 바라문 승에 「고수연행(苦修練行)이라고 하여, 괜히 몸을 괴롭혀 보았자 심(心)의 조어(調御,조절)를 망각하고 있어서는 아무 것도 안 된다. 수레가 움직이지 않을 때 그를 끄는 소<心>을 쳐야 말이지, 수레<身>을 쳐서는 어떻게 되겠는가」고 충고한 일절이다.

  그런데 남악의 타거(他車)와 타우(他牛)의 뜻은 반드시 「대장엄론(大壯嚴論)」의 경우와는 같지 않다. 남악류(流) 혹은 선종류에 내용은 좀 고쳐져 있다. 따라서 남악의 이말의 뜻은 아무리 신(身.車)에 매질하여 좌선해도 심(心.牛)을 수련함에 불충분하면, 성불은 못 한다. 수심(修心,他牛)이 안목이다. 이 타거(他車)와 타우(他牛)에 대하여 신(身)의 좌선과 심(心)의 좌선으로 보는 설이 많다.

  좌선은 확실히 전미개오(轉迷開悟, 成佛得道)의 수단(他牛)이다. 불<깨침>을 가지고 불과 한 몸이 되기 위하는 수단이다. 그런데 참선학도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일은 학인이 좌선의 수단임을 강하게 의식하는 일이다. 수단의 의식은 필연적으로 학인에게 상태<迷.凡>와 수단을 필요로 하는 목적<悟.聴>과를 상대적 대립적으로 보게 하고 더욱 「미(迷)」를 꺼리게 하고 「오(悟)」를 바라게 하는 편견망집을 취하게 된다.

  선은 미오(迷悟) 선악(善惡) 등을 구별하지 않는다. 이는 평등체<원리>에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수단에 그러한 편견망집이 있다는 것은 수단의 목적이 편견 망집의 존재를 피하지 않는 공(空, 無性)인 법(法)에의 계당되는 한, 그 목적은 영구히 지속되지 않는다. 좌선에 수단으로서의 긴으을 상실하게 된다.

  작불(作佛)을 하려고 한 마조의 좌선은 수단으로써 기능을 상실한 좌선이다. 그래서 남악은 좌선을 수단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전혀 역(逆)의 입장을 표시했다.

  선가에서는 「유(有)」라고 하면 「무(無)」라고 하고 「무(無)」라고 하면 「비무(非無)」, 「비무(非無)」라고 하면 「비비무(非非無)」라고 하여 무한정 부정을 세워가는 것이 상투 수단이다. 이 부정의 의도는 학인의 심리(心裏)에 싹트는 편견망집의 소탕이다.

  남악과 마조와의 경우는 부정에 의하여 마조의 편견 망집을 제거하고, 좌선이란 수단으로써의 본래의 기능을 충분히 발취시키려는데 있다. 그리고 이 좌선 수단론의 부정을 사상화한 것이, 남악이 말한 좌불<他車>이고 또 본증묘수의 사상이기도 하다.

  좌불이란 「미(迷)」.「오(悟)」를 가리지 않고 편견 망집을 근절한 의식조차 않는 것이 좌선에 허심한 몰입(沒入)이다. 그러니까 선에서는 항사 편견 망집을 버리려고 해도 안 된다는 얘기다. 다시 말하면 선을 깨치려고 해도 안 된다. 즉 사량분별을 일체 포기해야 된다.


   좌선(坐禪)과 불교(佛敎)

  학도의 참구(參究)에는 좌선 변도(辨道)해야 한다. 이 종지는 작불을 구하지 않는 행불(行佛)이다. 행불이 행불이 아니기 때문에 공안견성(公案見成)이다. 신(身)불이 작불이 아니고 나룡(羅龍, 편견망집의 계박)을 타파하면 좌불이 작불이 아니다. <正法眼藏 坐禪藏.

 「작불을 구하지 않는 작불」이란 수단 의식<목적의식, 편견 망집>을 근절한 목적이 없는 좌불(他車)이야말로 스스로 작불을 현성(現成.見成)하는 유일의 정(正)한 좌선(他牛)이라는 취지이다.


   석진삼잡(錫振三匝)

  온주영각(溫州永覺)의 현각선사는 절강서 온주부 영가헌 탄생이다. 속성은 재(載)씨고, 어려서 출가하여 여러 해 삼장, 특히 천태지관의 법문 수학에 마음을 경주하면서 기회가 있는 대로 항상 선관(禪觀)에 몰입했다. 일성에 그의 수학은 천태 4조 천궁사 혜위(慧威)에 사사했다고 하는데 선배인 현명(玄明)의 격려를 받아 동양현책(東陽玄策)과 함께 6를 조계(曹溪)에 찾아갔다. 「송고승전(宋高僧傳)」은 현각이 북종 신수의 문을 두들겼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현각은 6조와의 초대면에서 석장(錫杖,선승들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을 휘두르고, 정병(淨甁)을 들고 무례하게도 6조가 앉은 주위를 세 번 돈 다음, 6조 앞에 버티고 섰다.

 『축가는 불제(佛制)에 따라 거동을 세밀(作法)히  하지 않아서는 아니 되는데, 그대는 심히 무법하다. 그대는 어디서 어떻게 수행하여 그러한 만심(慢心)이 생겼는가?』

  6조가 책하듯이 말했다. 그런데 현각은 태연히 대답했다.

 『인생은 존귀하지만 취(胞, 연할. 약할)하여 짧다. 그런 쓸모없는 질문에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쉽다.』

 『그런가? 그런 무상한 죽음이 닥쳐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면 왜 불생불사의 이(理, 진여)를 체득하여 죽음의 도래(到來)의 속불속(速不速)을 초탈한 경계를 오득(悟得)하지 못 하는가.』

 『사람의 몸<諸法>은 이(理,진여)다. 원래 불생불멸로 생사를 초탈하고 있다.  속불속(速不速)의 초탈은 오득할 것도 없다.』

 『그렇다, 그렇다.』

  보고 있던 대중은 뜻밖에 6조가 불작법(不作法, 건방진)한 현각을 인가(印可, 득오를 증명하는 것)함으로 모두 아연실색하고 있었다. 현각은 갑자가 태도를 바꿔 佛制불제>에 의한 작법으로 정중히 6조를 예배하고 물러가겠다고 사과의 뜻을 표했다.

 『가는 것도 좋지만, 너무 급작스럽지 않는가.』

 『내가 여기를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理, 진여), 그것으로서 이(理)에는 본래 동불동(動不動)이 없습니다. 다라서 가(去)는 것에 속불속(速不速)도 없을 것입니다.』

 『이치는 그러하나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당신은 자기 스스로 무용의 분별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당신은 인자(仁者)라는 뜻이다. 즉 고덕하신 분이라는 말인데 여기서는  제 2인자의 존칭 분별은 사량, 사유, 전색(詮索)들을 말한다.>

 『그대는 확실히 무생(無生)의 참다운 뜻을 체득했다.』

 『무생의 이(理, 진여)에 의의(意義)가 있겠습니까.』

 『의의가 없으면 누가 대체 분별한다고 할 것인가.』

 『분별은 의의를 분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생의 이(理), 그에 일체가 되는 일입니다.』

 『과연 그렇다. 어때 기왕이니 하룻밤 쉬어 가는 게 어떤가?』

  그래서 현각은 하룻밤 6조 곁에서 쉬고 이튿날 조계를 하직했다. 현각이 일숙각(一宿覺)이라고 불리운 것은 이때부터다.

  선관(禪觀) : 좌선하여 진리를 관찰하는 것

  무생(無生) : 생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는 절대의 이(理, 진여)를 말한다. 또 절대의 이(理)가 생명을 초절(超絶)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